운와기담 上 12~15.
12. 발우들고 날마다 탁발하다 / 경산 명(徑山明)선사
경산사(徑山寺)의 명(明)선사가 소흥(紹興) 신유년(1141)에 대혜(大慧)노스님을 시봉할 때였다. 형양(衡陽)을 지나는 길에 날마다 저자거리에서 탁발하여 암자의 대중을 도왔는데 하루 한 거리를 탁발하는 것으로 규칙을 삼았다. 그가 계해년(1143) 가을, 그곳을 떠나 절서(浙西)지방을 탁발하고 이듬해 정월 보름날 돌아오겠다고 기약하자 대혜선사가 게송을 지어 전송하였다.
장난꾸러기 명(明)선사는
맹랑하기 짝이 없네
현중현(玄中玄)을 알아서
주중주(主中主)가 되었네
맨발로 긴 거리를 뛰어다니며
하루에도 수백리길 걷건마는
얼굴과 체력이 매우 용맹하여
추위와 더위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네
이처럼 지내기를 이삼년
매일 언제나 이같을 뿐
모두들 그를 미쳤다 하지만
그는 그저 웃을 따름이라네
가을 색이 바야흐로 한창인 때
갑자기 나를 떠나
발우를 들고 법석대는 저자로 들어가니
보화(普化)스님이라야 그의 지기(知己)가 되리
밤나무지팡이 어깨에 비껴들고
흥에 겨워 어쩔 줄 모르네
떠나는 길에 그대에게 말하노니
그대, 부디 기억할지어다
갑자년 정월보름 전에
반드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하느니라.
藞苴明大禪 孟浪絶方比
識得玄中玄 作得主中主
赤脚走長街 一日數百里
色力旣勇猛 殊不畏寒暑
如是二三年 日日只如此
人皆謂渠狂 渠只笑而已
秋陽方熾然 忽來辭妙喜
持鉢入鬧市 普化乃知己
肩橫椰傈杖 其興不可止
臨行贈汝言 汝令*須記取
甲子上元前 却要到這裏
이어 그는 대혜선사의 초상화를 구하여 찬(讚)을 썼다.
설령 매우 잘 그렸다 하더라도
오히려 진상(眞常)이 끊임없이 흐르는데
보화(普化)스님 곤두박질에
또렷이 가려운 곳을 긁었구나
말후구(末後句)라는 것은
기연을 만나면 참지 못하는 법
쯧쯧! 군더더기는 필요없네.
直饒畫得十分 猶是眞常流注
普化倒翻筋斗 爬着了明痒處
有箇末後句 當機難禁制
咄且 不要絮
명선사는 용모가 훤출하고 기상이 웅장하며 기연에 따라 방편을 마련하고 법으로서 즐거움을 삼았기에 총림에서 '대선(大禪)'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그의 게송은 대부분 솔직하게 지은 것이 많지만 그 가운데에는 새로운 뜻이 담긴 것도 있다. 융흥(隆興) 원년(1163) 봄 장산사(莊山寺)에서 칙명을 받고 경산사의 주지가 되었다. 광덕군(廣德軍) 개법원(開法院)의 수좌 종엄(宗儼)스님이 송을 지어 절을 다시 짓는 의의를 밝혀 달라고 하니 명선사는 곧장 붓을 들어 써 주었다.
이곳 수좌 종엄스님은
신령한 기틀이 항상 손 안에 있어
축착합착 어느 곳에서나
어미의 입을 막아버린다
말 밖에서 알아차리니
삼삼은 구가 되지 않도다
수좌스님은 이와 같이 전하며
크게 사자후를 하고
제불도 이와 같이 하니
할 한마디에 수미산이 달아나고
하늘 닿는 큰 사찰 이룩하니
천년 만년 북두성을 매만지리.
這箇儼僧首 靈機常在手
祝著磕著處 塞却娘生口
言外領略得 三三不成九
僧首如是傳 大作獅子吼
諸佛亦如是 喝下須彌走
做起參天大梵刹 千年萬歲摩星斗
이제 경산 고소사(姑蘇寺) 별업전(別業田)의 연간 수입이 2만석[斛]인데 이는 바로 명선사가 양화왕부(楊和王府) 화주에게 얻은 것이다. 그리고는 얼마 안되어 입적하였는데 그 토지에 대한 기록에 명선사는 관여되어 있지 않다.
지난 날 한창려(韓昌黎 : 愈)는 어명을 받고 '평회서비문(平淮西碑文)'을 지었는데 이소(李愬)의 부하 석효충(石孝忠)이 이소를 밀쳐 버렸기 때문에 이소의 공적까지는 언급되지 않았다. 이 사실과 그 토지에 대한 기록을 비교해 보면 매우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총림에 석효충과 같은 일을 한 사람이 없는 것이 애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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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卍속장경 주에는 '令은 今이 아닌가 한다'고 되어 있다.
13. 오랜 세월동안 선정에 들다 / 동산사(東山寺) 수연(修演)스님
예장(豫章) 동산사(東山寺)의 승려 수연(修演)은 그 마을 유씨(劉氏)의 아들이며 석문사(石門寺) 겸(謙)선사에게 법을 얻었다. 그는 게송을 지었다.
깨닫지 못했을 땐 참선을 하다가
단 한번 석문을 보고서 활짝 트였네
스승이 지시하는 참 소식을 들은 후에야
비로소 소금은 짜고 초는 시큼한 줄 알았노라.
未悟之日要參禪 一見石門便坦然
蒙師指箇眞消息 方知鹽鹹醋是酸
그 뒤로 탁발 수행을 닦았는데 여름 날 밤이면 항시 벗은 채로 모기떼의 밥이 되고, 옷을 시주하면 받아서 없는 자에게 돌려 주었다. 또 게를 지어 자신의 뜻을 나타낸 적이 있다.
40년 동안 항상 맨발인 채로
머리도 깎지않고 목욕도 하지 않았네
고을 관리 나를 위해 적삼을 갈아입히지만
다만 평생의 원력 부족할까ㅑ 두려울 뿐.
四十年來常跣足 不剃頭兮不澡浴
郡官爲我換衣衫 只恐平生願不足
이 때문에 세상에서는 그를 '유도자(劉道者)'라 불렀다. 얼마 후 그는 제자에게 고하였다.
"내가 머지않아 선정에 들어갈 것이니 벽돌과 진흙으로 내 몸을 감싸두어라. 3년 뒤에 너희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자 과연 그의 말대로 선정에서 깨어났고, 그의 법력이 남달라 사찰을 낙성하게 되었다.
천희(天禧) 2년(1018) 섣달 그믐 이틀전 다시 정(定)에 들어가면서 그의 제자들에게 "49년이 지난 뒤 나의 무덤을 열어보면 내가 눈을 감고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치평(治平) 3년(1066)은 그가 말한 해였으므로 그 사찰의 승려가 이 사실을 태수 정벽(程闢)에게 알렸다. 태수는 관료를 거느리고 그의 무덤을 살펴보니 단정히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었다. 이에 향니(香泥)로 상을 만들어 후세에 전하고, 법당 서쪽 별채에 봉안하여 백성들의 기도처로 삼았다.
연선사는 자비와 원력이 크고 깊었기에 이와 같이 티끌 세상으로 머리를 돌리고 친절하게 방편을 열어주셨다.
14. 고산사(鼓山寺)에서 간행된 어록
소흥(紹興 : 1131~1162) 연간 초에 복주 고산사(鼓山寺)에서 스물 두 분의 옛 큰스님 어록[古尊宿語錄]을 간행하였는데 홍주(洪州) 취암사(翠巖寺)의 지(芝)선사도 그 중 한분이다. 지선사가 군성(郡城)에서 개당법문을 할 때 어느 사람이 물었다.
"홍주의 경계는 어떻습니까?"
"등왕각(滕王閣) 아래 많은 봉우리가 수려하고 유자정(孺子亭) 앞에는 엷은 안개가 피어 오른다."
"그 경계 가운데에 사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출입할 때는 쇠북을 두들기고 붉은 옷에 비단 병풍을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고산사에서 간행된 어록에는 경계에 대한 대답과 사람에 대한 질문이 누락되어, 결국 경계를 물었는데 사람을 대답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 그 어록은 이처럼 잘못되어 있다. 소흥(紹興) 갑자년(1144)에서 이제까지 그 책이 인쇄되어 세상에 유포된 양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며 결국 불도에 뜻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옛분들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없도록 하였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15. 회석두(回石頭)스님 어록에 서문을 쓰다 / 풍당가(馮當可)
서촉(西蜀) 조어산(釣魚山)의 회(回)선사는 일찍이 석공(石工)으로 일하다가 깨달았으므로 총림에서는 그를 '회석두(回石頭 : 돌쟁이 회스님)'라 하였다.
촉의 명사 풍당가(馮當可)와 당문약(唐文若) 등 몇몇 사람과 「논어(論語)」를 이야기하다가 "공자가 자로(子路)에게, '유(由 : 자로의 이름)여! 너에게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다'고 말하였다"는 부분을 들어 논란을 하였다. 회선사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귀담아 듣기만 하다가 천천히 "옛 분의 뜻은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고 말하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그에게 그 뜻을 해석해 보도록 하였다. 회선사는 즉석에서 게를 지었다.
'아는 것을 안다 하고' 하는 뜻을 알면
걸음걸음 하늘 사다리를 밟아나가리
고인의 알음알이 없는 경지를 어찌하지 못하고
억지로 한가한 사람들에게 시비를 일으키는구나.
會得知之爲知之 步步踏著上天梯
叵耐古人無意智 剛惹閒人說是非
이에 모든 사람이 경청하고 탄복하였으며 그 뒤 풍당가는 회선사의 어록에 서문을 썼다.
오조(五祖)선사가 노년에 남당(南堂元靜 : 1065~1135)이라는 제자를 하나 얻었는데, 그는 성격이 거칠고 사나웠으며, 하늘 땅이 비좁은 양 여기저기 날뛰고 다니다가 노대수(老大隋)에게 귀의하였다. 회도자는 철퇴를 휘두르고 바위를 다듬던 솜씨로 굳건하고 높은 도를 우러러 보며 두들기고 큰힘을 내어 일퇴에 도맥을 뚫고 조어산(釣魚山)아래에 돌아와 안주하니 가파르고 험한 절벽과 같은 경지는 스승보다도 열곱절이 높았다. 독극물 비상(砒霜)이란 목구멍에 삼키지 못하는 것인데 그의 제자 언문(彦文)이 깨닫지 못하므로 나머지 독약을 가져다가 사방에 뿌려 버렸다. 나는 후세사람들이 이 편리한 방편을 밟지 않고 스스로 시체처럼 자빠질까 두려운 마음에 이 서문을 기록하여 어록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바이다.
소흥(1131~1162) 연간에 만암 안(卍菴顔)선사가 경산사의 수좌승으로 있다가 촉으로 돌아오는 길에 조어산에 들렀는데 때마침 회선사가 대중을 위하여 입실하는 중이었다. 안선사는 곧바로 앞으로 나아가 그와 몇마디 주고 받다 나왔는데 조금 후 회선사가 대중에게 물었다.
"방금 왔던 얼굴에 먹물 박힌 그 승려는 어디에 있는가?"
이에 안선사를 아는 사람이, '그는 경산사의 안수좌인데 이미 배에 올랐다'고 하자 회선사는 시자를 보내 안선사를 맞이하여 산사에 올라오도록 하고 총림의 예법을 구하였다.
안선사는 지난 날 사나운 도적에게 잡혀 얼굴에 먹물을 찍힌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