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와기담 上 26~30.
26. 서호(西湖)에서 한가하고 청빈한 생활 / 이연 청순(怡然淸順)스님
희령(熙寧 : 1068~1077) 연간에 서호(西湖)에 청순(淸順)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그의 자는 이연(怡然)이다. 서호의 좋은 경관 속에 살면서 영은사와 천축사를 왕래하며 한가한 생활을 유려하게 묘사한 바 있다.
되는대로 한가히 시 읊으며 취미산을 내려오니
이 밖에 또 다시 무엇을 생각하리
나에게 산을 내려오는 뜻을 묻는다면
주장자 높이들어 헤진 승복 보여주리.
浪宕閑吟下翠微 更無一法可思惟
有人問我出山意 藜杖頭挑破衲衣
일마다 무능하여 한가지도 나아가지 못하니
천축사에 돌아가 기꺼이 여생을 보내리
허기지면 밥먹고 피로하면 잠자며 하릴없이 지내니
신선 세계에만 별천지가 있다고 말하지 마오.
事事無能一不前 喜歸天竺過殘年
飢餐困臥無餘事 休說壺中別有天
승상 석림(石林) 섭소온(葉少蘊)은 청순선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순선사는 인품이 청정하고 고요하여 아무하고나 사귀지 않았으며 큰 일이 없으면 성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를 찾아가고 수시로 양식을 보내주는 사대부들이 많았으나 몇말 이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양식을 병속에 담아 책상 위에 올려놓고 하루 두세 홉만을 먹었으며 채소마저도 항상 있는건 아니었다."
소동파가 영남에 있을 때, 마침 어느 사람이 서호에 간다기에 그를 통해 서찰을 보내왔다.
"수운 순(垂雲順)스님은 내가 고을을 다스릴 때 서로 오가면서 시를 읊던 벗[詩友]이었다. 그는 청렴하고 절개가 있으며 몹시 가난하여 겨우 끼니를 이을 뿐 언제나 부족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근심하는 빛이 없었는데 이제는 늙었다. 아직도 건강하신지?"
아! 지금의 우리들은 청빈을 치욕으로 여기고 많은 축적을 영예로 아니, 죽어서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을 자가 거의 없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조금치라도 순선사의 풍모를 사모한다면 어찌 죽은 후 오명을 남기겠는가?
27. 한림학사 왕조(汪藻, 汪彦章)가 여러 스님들을 뵙다
한림(翰林) 왕언장(汪彦章)이 소계(苕谿)를 다스릴 무렵 불법 늦게 만난 것에 한탄을 하며 쉬는 날[休沐日]이면 반드시 여러 사찰의 노장선사와 함께 법담을 나누었다. 사계사(思谿寺)의 자수(慈受)선사, 도량사(道場寺)의 보명(普明)선사, 하산사(何山寺)의 불등(佛燈)선사가 그의 서재에 앉아 있었는데 서재의 벽위에 걸어놓은 포대(布袋)화상의 영정이 명화였다. 그는 영정을 가리키며 여러 선사에게 물었다.
"그림이 어떻습니까?"
자수선사가 말하였다.
"이는 법도 속에서 새로운 뜻이 창출되고 호방한 모습 밖에 오묘한 진리가 담겨 있는 것이라 할 만합니다."
이에 한림이 말하였다.
"그도 선(禪)을 알았습니까?"
그러자 불등선사가 몰랐다고 하니, 한림이 불등선사에게 다시 물었다.
"무엇 때문에 몰랐다고 하십니까?"
"알았다면 묻지 않았을 것이오."
이 말에 한림은 크게 웃었다. 소계(苕谿) 정우공(鄭禹功)도 불등선사에게 불법을 배웠는데 그도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28. 은둔하며 사는 조주선사의 상수제자 엄양존자(嚴陽尊者)
엄양산(嚴陽山)은 무령현(武寧縣) 동남쪽 40리쯤에 있는 산인데 조주(趙州)선사의 상수 법제자 선신(善信)이라는 스님이 그 산의 수려한 모습을 즐기며 그 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선신스님은 도가 높아 세인의 존경을 받았으나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아 그냥 엄양존자(嚴陽尊者)라고만 불렀으며 호랑이 두마리와 뱀 한마리가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존자가 한번은 조주선사에게 물었다.
"아무것도[一物] 가져 오지 않았을 땐 어떻습니까?"
"내려 놓아라[放下着]."
"이미 아무것도 가져온 게 없는데 무엇을 내려놓으란 말입니까?"
"내려놓지 못하겠거든 짊어지고 가거라."
황룡 남(黃龍慧南)선사가 송을 지어 이 뜻을 밝혔다.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어깨 위 짐을 들지 못하네
말끝에 갑자기 잘못을 알아
마음 속에 한없는 기쁨이로세
악독이 이미 마음에 사라지니
뱀과 범이 벗이 되고
수백년 세월이 흘러갔지만
맑은 바람은 아직도 그치지 않네.
一物不將來 肩頭擔不起
言下忽知非 心中無限喜
毒惡旣忘懷 蛇虎爲知己
光陰幾百年 淸風猶未已
당(唐) 천우(天祐 : 904~907) 연간에 강서(江西) 제치 유공(制置劉公)이 그의 고을 서쪽에 신흥원(新興院)을 새로 지은 뒤 존자를 맞이하여 주석케 하였는데, 한 스님이 존자에게 물었다.
"무엇이 신흥원의 물입니까?"
"바로 앞에 보이는 강물이지!"
이제는 절 이름을 명심원(明心院)으로 바꾸었다.
송대 초기(960년대)에 도령(道寧)이라는 스님이 있어 존자의 사당에 존자가 어느 승려를 송별하며 지은 게송을 예서로 썼는데 대관(大觀 : 1107~1110) 연간까지도 허물어진 벽 사이에 그 글씨가 남아 있었다.
몸은 구름같고 모습은 조사같아
몸 속엔 아무 상대도 없네
지팡이 비껴 들고 사람을 돌아보지 않은 채
곧바로 만학천봉 깊은 골로 들어가네.
身如雲兮貌如祖 及至身中無伴侶
榔(木栗)橫擔不顧人 直入千峰萬峰去
이제 총림에서는 이 게송의 뒤 2구만을 음미해 올 뿐이며 누구의 작품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심지어 「전등록」에서는 존자의 이름마저 빠져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다.
29. 운봉(雲峰)선사의 후신(後身), 대혜선사
대혜(大慧) 노스님은 대관(大觀) 정해(丁亥 : 1107)년에 나이 19세였다. 태평주(太平州) 은정사(隱靜寺)를 지나는 길에 두 승려와 함께 배도암(杯渡菴)에 이르렀는데 개가 사납게 짖어대자 두 승려는 겁에 질려 돌아갔다. 그러나 대혜스님이 곧바로 다가가니 개는 마치 잘 아는 손님을 맞이하듯 하였고, 암자의 주승이 반갑게 맞이하여 후히 접대하자 대혜스님이 말하였다.
"저같은 후생이 이와 같은 성의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습니까?"
주승은 절에 있는 토우(土偶)를 돌아보면서, '어젯밤 삼경무렵 이 토우가 현몽하여 오늘 운봉 열(雲峯悅)선사께서 오시니 잘 접대하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혜스님은 자신은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고 사의를 표하고는 은정사로 돌아왔다. 노스님에게 운봉선사에 대하여 물으니 「운봉어록(雲峯語錄)」이 있다고 하면서 그 책을 보여주기에 책을 펼쳐보니 훤하게 마음이 열려 눈에 스쳐가면 외울 수 있게 되고 끝내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후로 총림에서는 대혜스님을 운봉선사의 후신이라 전하게 되었고 입적했을 때 누군가 영가법문(對靈文)에서 '세상에서는 모두 운봉 열스님의 후신이라고 알고 있다'고 하였다. 또 때를 만나 남악 양(南嶽讓)선사의 옛 호를 얻었다. 남악 양화상은 대혜선사(大慧禪師)라는 시호를 받았었다고 한다.
30. 예장태수(豫章太帥) 정벽(程闢)이 혜남스님을 주지로 맞이하다
남(慧南)선사가 황벽사(黃檗寺) 적취암(積翠庵)에 주석할 때 예장(豫章) 태수 정벽(程闢)이 시를 지어 그를 취암사(翠巖寺)의 주지로 맞이하였다.
취암사의 산천경개 서산에서 으뜸이라
높은 스님 만나서 여기에 모시고저
일찍이 지난 날 법문을 들었지만
금생에 다시 한번 선사 얼굴 뵈옵고저.
翠巖泉石冠西山 欲得高人住此間
曾是早年聽法者 今生更欲見師顔
남선사가 화답시를 지었다.
흰머리칼 머리가득 눈쌓인 산같은데
늙고 쇄잔하여 인간세상에 나갈 힘 없지마는
뒤집어 생각하니 그대 명을 저버린 일
조석으로 방황하니, 더욱 낯이 두터울 뿐이오.
白髮滿頭如雪山 尪羸無力出人間
飜思有負公侯命 旦夕彷徨益厚顔
정벽이 조정으로 돌아간 2년 후 또다시 강서(江西) 조운사(漕運使)가 되자 남선사가 송을 지어 보냈다.
홍정(洪井)에서 이별한 지도 어느덧 두 해
숲 속에서 조정에서 서로 그리워하다가
요사이 듣자하니 대궐에서 명을 내려
또다시 강서 조운사로 부임했다 하네
백성들은 바람에 풀 눕듯 그대의 교화를 따르는데
친구는 베개높여 구름 속에 단잠 자네
그대의 말 어느제쯤 찾아올지 모르나니
미리 서신 전하여 소식을 알리오.
洪井分飛早二年 林間仕路兩相懸
近聞北闕明君詔 又領江西漕使權
列郡望風皆艸偃 故人高枕得雲眠
馬塵未卜趨何日 預把音書作信傳
이에 정벽이 화답하였다.
7언 시를 보고 지난 옛날 생각하니
그때의 회포가 몹시도 그리워라
선사는 도가 높아 선승의 으뜸이나
나는 본디 어떤 사람이기에 벼슬살이 하는건가
달밝은 밤엔 구름아래 앉아보는 생각에 젖고
청산에서 마음놓고 낮잠을 즐겨보리
선사의 문하에 많은 제자 있으리니
오는 인편마다 밝은 소식 끊임없이 전해주오.
七字新吟憶*舊年 此時懷抱極懸懸
師今有道居禪首 我本何人掌吏權
明月每思雲下坐 靑山一任日高眠
庵前弟子知多少 來者如燈續續傳
정벽이 예장태수로 있을 당시는 치평(治平) 3년 병오년(1066)이었는데 그때 조정에 아뢰어 명당(明堂)의 사령(赦令)에 준하여 이름이 붙지 않은 사원을 조사하여 선례에 따라 사원의 이름을 내리도록 하였다. 이를 계기로 예장 관내의 율원(律院)도 모두 이름[額]을 얻게 되었는데 오늘날 그것이 정공의 공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가 남선사의 도를 존경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처럼 정성껏 불문을 보호할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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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의 '억'은 '억'의 오기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