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와기담 上 43~45.
43. 언제나 '소로소로…'로 대답하다 / 용아 재(龍牙才)선사
용아 재(龍牙才)선사는 어린 나이로 부지런히 불감(佛鑒)선사를 섬기면서 아무리 어려운 일도 사양하지 아니하여 이름이 총림에 알려졌다. 그가 행각할 때 해질녘이 되어 황룡사에 도착했다. 사심(死心)선사는 때마침 삼문(三門) 밖에 있다가 어디서 왔는가를 물어 그의 이름을 듣고는 서주(舒州) 태평사(太平寺)의 재장주(才莊主)임을 알게 되었다. 그 이튿날 방장실로 들어가니 사심선사가 물었다.
"맨 첫 구절을 알면 맨 끝 구절을 알 수 있고 맨 끝 구절을 알면 맨 첫 구절을 깨닫게 된다. 맨 첫 구절과 맨 끝 구절을 한쪽으로 던져버리면 '백장야호(百丈野狐)' 화두를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는가?"
"방에 들어올 때 이미 찾아 온 뜻을 알고 있는데 무엇하러 또다시 수레바퀴에 묻은 진흙을 들추십니까?"
"이 신장노(新長老)가 상좌의 손아귀에 죽었다."
"말씀이야 비록 다르지만 지극한 이치는 차이가 없습니다."
"무엇이 차이가 없는 일인가?"
"황룡(黃龍)의 뿔을 두들기지 않으면 어떻게 턱 밑의 구슬을 알겠습니까?"
이 말에 사심선사는 그를 때렸다. 당시 사심선사는 자신의 초상화에 제(題)를 썼다.
헐렁한 이빨 검은 얼굴은
광남지방의 도적이로다
속은 텅 비고 마음만 높은 것이
문필을 모르도다.
齒缺面黑 廣南正賊
空腹高心 不識文墨
재선사가 4수의 게송으로 이를 해석하여 사심선사에게 올렸다.
헐렁한 이빨 검은 얼굴은
달마가 다시 오심이라
사람 마음 곧바로 가리켜
큰 복문을 열었도다.
齒缺面黑 達磨重來
人心直指 大施門開
광남지방의 도적
일찍이 바다에서 전쟁 겪었으니
여의주를 빼앗아 무진장 써먹었네.
廣南正賊 曾經海陣
奪得驢珠 受用無盡
속은 텅 비고 마음만 높은 것이
부처와 사람을 꾸짖으니
그의 이름이 천하에 알려져
고금을 초월했네.
空腹高心 罵佛罵人
名傳天下 越古超今
문필을 알지 못하니
육조의 도반이라
방아를 찧지야 않았지만
경지는 같은 경지일세.
不識文墨 六祖同參
雖不踏碓 見解一般
이 게송을 보고 사심선사는 기뻐하였다. 재선사가 용아사(龍牙寺)의 주지로 있을 무렵 담부(潭府)에서 개당하였는데 법을 묻는 사람이 있으면 으레 '소로소로(蘇로嚧蘇嚧)'라고 대답하여 총림에서는 그를 재소로(才蘇嚧)라 불렀다.
44. 탐색할 것 없는 종지 / 회옥산(懷玉山) 선(宣)수좌
회옥산(懷玉山)의 선(宣)수좌가 처음 균양(筠陽) 황벽사(黃檗寺)에 있을 때였다. 상(祥)화상이 야참(夜參)법문에서 '허공에 나는 잎새 하나에 가을을 나타내니 법신은 모름지기 시끄러운 가을소리에 나타난다[一葉飄空便見秋法身須透鬧啾啾]'고 거론하는 것을 듣고 문득 깨친 바 있었다. 이어 경산사(徑山寺)에 갔는데 어떤 이가 대혜노스님에게 말하였다.
"명주(明州) 선(宣)수좌가 종지를 탐색하려고 왔습니다."
"나의 선(禪)은 조개와 같아 열어 젖히면 오장이 모두 보이는데 무엇하러 탐색하려는가?"
선수좌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는 대혜선사를 따라 다니며 형양(衡陽)에 머물 때 오랫동안 시봉하였다. 일찍이 죽비(竹篦)화두에 대하여 송하였다.
앞뒤(背觸)가 너무 어긋져
어리석은 선객의 눈 염소눈알 같구려
다른 사람의 쌀 한톨을 탐내다가
반년 양식을 잃었도다.
背觸太乖張 痴禪眼似羊
貪佗一粒米 失却半年糧
설봉 혜일(雪峰慧日)선사는 선수좌가 형양(衡陽)에서 회옥사(懷玉寺)에 주지하라는 명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선수좌와 동행하여 보사사(保社寺)를 함께 지었다. 그런데 당시 의춘통판(宜春通判) 왕성석(汪聖錫)이 남원사(南源寺)의 주지로 선수좌을 맞이하는 소(疏)를 올렸다.
"불법이 자명(慈明)선사에 이르러 지극히 복잡해지고 많이 변하여 도첩을 얻은 자만도 무려 46명이나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 분파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갔으며 세월이 갈수록 더욱 많이 갈라졌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선(宣)선사만이 그는 참다운 법통을 잃지 않은 자이니 자명선사의 5대손입니다. 그는 한계단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묘각(妙覺)에 들어갔으며, 이미 얻은 것을 얻었다 하지 않고 보배를 보배롭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빛나는 자취를 감추고 오직 다른 사람이 나를 보호할까 두려워 했으나 그의 향기로운 명성은 끝내 숨길 수 없었습니다. 이제 고향 남원(南源)은 실제로 자명선사가 좌선하던 곳으로 아가위나무는 가지를 잘라주지 않았고 세갈래 오솔길은 황폐해 갑니다. 자손된 도리로 차마 앉아서 볼 수만은 없는 처지라, 은혜를 은혜로 갚는 뜻에서 형편 부득이하게 선사를 청하는 바이니, 바라건대 이 간절한 바람을 들어 주소서."
그러나 선수좌는 야유조로 말하였다.
"나는 밥이나 먹는 중이니 정말로 인간 세상에 나아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사인(舍人) 왕양(王洋)이 산사에 올라와 선수좌를 만난 후 시를 지어 보내왔다.
나풀거리는 승복에 밥이나 먹는 중
그 아무도 하산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네
만나면 으레 무능하고 모른다고 말하지만
홍루의 과거시를 어찌 지었소.
衲帔騰騰粥飯師 無人曾見下山時
相逢只道無能解 肯作紅樓應制詩
선수좌의 면모는 그의 시소(詩疏)에서 엿볼 수 있다.
45. 원오(圓悟)선사가 은둔자 왕범지(王梵志)의 시에 붙인 글
건염(建炎) 3년(1129) 정월 초하루, 원오(圓悟)선사는 운거사(雲居寺)에서 은사(隱士) 왕범지(王梵志)가 지은 게송을 소개하고 덧붙였다.
성밖에는 흙만두(묘지의 비유)가 있고
성안에는 팥고물이 있네
사람마다 한개씩 먹이노니
맛이 없다고 싫어하지 마오.
城外土饅頭 豏草在城裏
每人喫一箇 莫嫌沒滋味
황노직(黃魯直 : 黃庭堅)이 여기에 한마디 붙였다.
자기도 흙만두가 되는데
누구에게 그것을 먹이려는가.
己且爲土饅頭 當使誰食之
이를 계기로 소동파는 뒷부분 두 구절을
먼저 술을 뿌려서
맛이 나도록 하여라.
預先著酒澆 使敎有滋味
라고 고쳤다. 그러나 왕범지가 지은 원래의 송에 깊은 의미가 있다. 다만 표현의 차이 때문에 소동파가 뒷 구절을 고쳤지만 시의 여흥은 끝내 다하지 못하였다. 이제 사운(四韻)을 만들어 세상을 경책하고 나 자신도 경책하고자 한다.
성 밖에는 흙만두
성 안에는 팥고물
많은 사람이 통곡으로 이별할 때
흙 속으로 들어가
차례 차례 만두 고물이 되어
무궁히 이별하는구나
이로 세인을 일깨우노니
눈뜨고 졸지 말게나!
城外土饅頭 豏草在城裏
著群哭相送 入在土皮裏
次第作豏草 相送無窮已
以玆警世人 莫開眼瞌睡
원오선사는 손수 이 글을 적어 한 서기에게 보냈는데 그가 바로 만년사(萬年寺) 주지 촌승(村僧)이라는 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