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와기담 上 50~52.
50. 양린(楊麟)의 출가와 서원
태학 상사생(太學 上舍生) 양린(楊麟)이 소흥(紹興) 정축년(1157) 여름에 의관을 갖추고 육왕사 무이당(無異堂)으로 대혜노스님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하였다.
"스님께 출가하기를 바라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관을 벗고 소매자락 속에서 칼을 꺼내 스스로 머리를 자르려 하였다. 대혜선사가 황급히 곁에 있던 사람을 불러 그의 손을 붙잡고 까닭을 물으니 그는 사실대로 대답하였고, 선사는 그를 문하에 받아들였다. 그 이튿날 법당에 올라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이미 살림살이가 드러났으니 잘못에 잘못을 더하는구나. 성승에 올라타는 이 기분도 괜찮은데 용과 코끼리 밟는 길 당나귀가 갈 길이 아닌데도, 우습구나, 제방에서 부질없이 천착하는구나. 천착을 하지 말라. 상서로운 기린은 하나의 뿔이 있을 뿐이다."
양린이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법명을 청하다 스님은 조린(祖麟)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리고는 육조스님께서 대유령(大庾嶺)에서 명(明)상좌에게 설법하셨던 것, 즉 선도 악도 생각치 말라는 것과 비밀한 말과 비밀한 뜻은 모두 너에게 있다는 화두를 주면서 그에게 일상생활에 항상 놓지 말라고 하였다. 그후로 조린은 대혜선사의 물음에 답하는 일 말고는 사대부나 승려들과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그의 태도가 당당하고 의젓하여 사람들도 그를 가까이 하거나 멀리 하지 않았다. 사인(舍人) 당입부(唐立夫)가 게를 지어 대혜선사에게 보냈다.
젊어서는 용을 잡고 만년에는 기린을 얻었으니
어느 날 밤 가을바람 바다에 먼지 이네
하늘과 땅을 뒤흔들어도 찾아 볼 수 없으니
아육산 앞에 몸을 잃었도다.
(癶+虫)歲屠龍晩獲麟 西風一夜海生塵
掀天攪地難尋提 阿育山前失却身
대혜선사가 경산사로 옮기자 조린도 따라 갔었는데 그는 이미 도를 깨달은 바 있었다. 그러던 중 생각지 않게 건강이 악화되어 대혜선사가 시자 요덕(了德)을 보내 그를 문병하니 조린이 종이조각에 게를 썼다.
의관을 단장하지 않고 머리털이 눈썹까지 내려오니
온 방의 고요함을 스스로 모를래라
박명(薄命)의 얼굴로 병에 누우니
다른 보살님에 많은 의심을 일으키네.
衣冠不御髮齊眉 一室翛然自不知
薄相等閒聊示疾 起佗菩薩幾多疑
이어 세 묶음의 향을 사르며 서원(誓願)을 세웠다.
"뒷 생에 남자 몸으로 태어나 눈 밝은 스님을 만나 동진(童眞)출가로 불문에 들어로리라."
향불이 사라지자 잠자듯 평온히 세상을 떠났다. 이에 대혜선사는 다비에서 불 붙이는 장작을 들고 말하였다.
목주의 한조각 널판지를 짊어지니
떠나가는 그대를 만마리의 소로도 끌어올 수 없구려
조사 문하에 참다운 기린이며
인천(人天)에 바른 법안이 될 만했네
그러나 어느덧 죽음이 이르자
붓 들어 게를 짓고 갈 길 재촉하였네
양도자여, 갈길을 재촉하지 마오
불 속의 지네가 쇠를 삼키도다.
擔却一片睦州版 一去萬牛不可挽
祖師門下眞祥麟 堪作人天正法眼
無何時節忽到來 援毫寫偈自催趲
楊道者休催趲 火裏蝍蟟呑鐵剗
조린은 건양(建陽) 사람이며 문공(文公)의 후예이다.
51. 원감 원(圓鑑遠)선사의 시와 행적
부산사(浮山寺)의 원감 원(圓鑑遠)선사는 천성(天聖 : 1023~1031)연간에 회남(淮南) 조운관(漕運官) 허식(許式)의 명으로 태평(太平) 흥국사(興國寺)의 주지로 세상에 나갔다가 경력(慶曆) 계미년(1043)에 천주산(天柱山) 월화암(月華菴)에 은거하였는데 병술년(1046)에 한림학사 여제숙(呂濟叔)이 부산사(浮山寺)로 다시 그를 맞이하였다. 황우(皇祐) 신묘년(1051)에 주지 일을 그만두고 절 서쪽에 암자를 짓고 살다가 계사년(1053)에 고소(姑蘇) 천평사(天平寺)의 청에 의하여 그곳에 주석하였고 화중(和中) 연간(1055)에 또다시 부산사의 옛 암자로 되돌아 왔었다. 세차례 주지를 하는 동안 모두 옛것을 고치고 새것을 창안하여 선림(禪林)을 만들었는데 치평(治平) 정미년(1067) 2월 6일에 77세로 유언을 남겼다.
나 법원은 이 허깨비 몸으로 삼계를 떠돌면서 중생 제도할 직책을 맡고서도 실제로 한 법도 전해준 바 없으니 세상을 속인 죄 몹시 부끄러우며 헛된 명성이 실로 부끄러울 뿐이다. 마침내 나의 형체는 썩어지고 사대는 나를 떠나려하니 물거품으로 이뤄진 이 내몸에 어찌 장구히 버틸 힘이 있겠는가? 이미 바람 앞의 촛불이 되었으니 강물처럼 흘러가는 이 운명을 어이 한탄하리오. 또 생각하니 이 몸이 세상에 살았을 때 사랑스런 신도들이 많은 시주를 주셨으나 악업을 제도하는 도가 없었음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어찌하면 좋은 인연으로 보답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보니 내 일은 나만이 아는 법, 진리란 고요하니 본래의 도로 되돌아 와서 잠시 죽음을 뒤로하고 붓을 들어 여러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바이오.
이 글을 살펴보면 문장은 조잡한 점이 없지 않지만 그 이치는 극진하며 임종시의 친필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의 겸손은 우리를 일깨우기에 충분하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은 송을 남겼다.
일었다 꺼지는 허깨비 세상 무슨 끝이 있으랴
허깨비로 이루어진 것 그 자체 본래 공하니
남산에 구름 일어나니 북산에 비 뿌리고
누각 위에서 북 울리니 경양사에 종이 울린다.
幻世出沒有何窮 幻化本來體自空
南山起雲北山雨 樓頭鼓動慶陽鐘
올때 가져온 것 없어 떠날 때도 홀가분하니
이는 허공의 뜬 구름과 같은 것
한가닥 가죽 속의 뼈다귀를 던져버리니
이글거리는 화롯불 속에 들어간 한 점 눈과 같네.
來時無物去亦無 譬似浮雲布太虛
抛下一條皮袋骨 還如霜雪入洪爐
또한 스스로를 탄식하여 시를 지었다.
고요하고 깊은 밤 파도 위에 떠도는 외로운 배
양쪽 강변 갈대꽃은 밝은 달과 마주하고
깊은 연못으로 고기떼 가버린 후
부질없이 어부는 낚싯대를 잡고 있네.
孤舟夜靜泛波瀾 兩岸蘆花對月圓
金鱗自入深潭去 空使漁翁執釣竿
선사의 법제자 법운(法雲)이 부산사(浮山寺)의 주지를 뒤이어 선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에 의하면, 선사의 성은 심씨(沈氏)이며 17세에 승적을 얻었다. 「승보전(僧寶傳)」에는 심씨가 왕씨(王氏)로 씌어 있고 17세가 19세로 되어 있다. 경력 황우(慶曆 皇牛 : 1041~1053) 연간에 선사의 도가 세상에 크게 빛났으며 투자사(投子寺)의 청(靑)을 받아들여 동상종파(洞上宗派)를 잇게 하였으므로 '노동산(老東山)'이라 불리웠고 백운 단(白雲端)선사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이렇게 종문에 공로가 있는 분인데 그의 출처에 대하여 착오가 있어서야 되겠는가?
52. 적음존자(寂音尊者) 혜홍(慧洪)선사가 연루되어 견책받았던 일
적음(寂音)존자가 숭령(崇寧) 원년(1102)에 장사(長沙) 운개사(雲蓋寺)에서 여름안거를 할 때였다. 진관 형중(陳瓘 : 螢仲)이 영외(嶺外)에 귀양살이를 하면서 게를 지어 보냄과 동시에 「화엄경」을 짊어지고 영으로 돌아오겠노라는 뜻을 전해 왔었는데 그 게는 다음과 같다.
스님은 사방을 다니다가 흥이 다한 후 돌아오니
고을 산천 풍월에 티끌 하나 없도다
지팡이 끝에 얼마만큼 노는 땅 있다면
화엄경을 등에 지고 중증으로 들어가리.
大士遊方興盡回 家山風月絶纖埃
杖頭多少閑田地 挑取華嚴入嶺來
이에 적음존자가 화답하였다.
법을 인연하여 서로 만나 웃음지며
인간 세계 굽어보니 뽀얀 먼지 일어나네
호상이니 영외이니 구분하지 말고
원만하고 고요한 광채 속에 함께 왕래하시오.
因法相逢一笑開 俯看人世過飛埃
湖湘嶺外休分別 圜寂光中共往來
그후 적음존자는 그와 교류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게 되자 정강(靖康) 원년(1126) 형부(刑部)에 나아가 진술하였다.
"방정승 혜홍(放停僧 慧洪)은 올해 나이 56세로, 본관은 균주이며 원래 우가(右街) 향적원(香積院)에 승적이 올라 있습니다. 숭령(崇寧)초에 간관 진관이 채경(蔡京)의 일을 거론하다가 황제의 비위를 거슬려 연주(連州)로 유배된 것을 보고서, 저는 진관(陳瓘)이 벼슬에 있을 때 충절을 다했는데도 영해(嶺海)로 유배되었다 생각하여 만리 타향에서 그의 일신에 생각지 못한 일이 생길까봐 그의 앞길을 돌보며 4년간을 바다 위를 왕래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진관과 교분이 두터워졌습니다.
또한 도첩을 얻어 승려가 되었는데 원래 이 일은 고(故) 재상 장상영(張商英)의 추천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정화(政和) 원년(1111), 장상영이 진관의 저술 「존요록(尊堯錄)」을 올리자 내관 양사성(梁師成)이 채경과 결탁하고서 재상 장상영이 채경의 원수인 진관을 천거하였다 하여 온갖 계책으로 모함하여 한달 사이에 과연 그들의 뜻대로 축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제기 진관과 함께 마련하였다고 의심하고 성을 내어 개봉윤(開封尹) 이효수(李孝壽)에게 사주, 저를 구금 하옥시키고 불법(不法)으로 고문하여 길양군(吉陽軍)에 유배시켰다가 그 후 노역을 감당하지 못할까 근심한 나머지 국은(國恩)으로 방면하고 조금 나은 곳으로 추방된 적이 있습니다. 이 일은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의 일입니다. 요사이 조정에서 장상영과 진관의 벼슬을 추증(追贈)하고 아울러 그들의 충절을 포상하였으며 채경과 양사성을 영외로 유배하여 그들의 죄를 바로 잡았다고 하니 이로써 제가 지난 날 연루되었던 실상이 억울한 누명이었음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소성(紹聖 : 1094~1097) 연간에 항주(杭州) 승려 도잠(道潜)이 내한(內翰) 소식(蘇軾)과 교류했다는 이유로 소식의 원수인 여승경(呂升卿)이 절서사자(浙西使者)로 임명되자 도잠을 소주(蘇州) 옥에 구속하고 불법적으로 그를 연주(兗州)로 유배하였다가 후일 조정에서 이 사실을 밝혀 승려로 환원시킨 일을 저는 절실히 보아 왔습니다. 요사이에도 우가(右街) 승려 영도(永道)가 선화(宣和 : 1119~1125) 초에 덕사(德士 : 혜홍)의 경질을 상소하여 구제하려다가 개봉윤(開封尹) 성장(盛章)이 그를 도주(道州)로 유배시켰는데 역시 지난 해 사실이 밝혀져 사면되었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저는 별다른 범법 사실이 없는데도 오로지 개봉부의 관리들이 내신(內臣)의 권세를 욕심낸 나머지 저에게 불법적으로 무고한 죄를 덮어 씌웠던 것입니다. 이를 지난날 도잠과 영도가 억울하게 누명 썼던 사실과 비교해 보면 똑같은 예입니다.
오늘날 장계(상소의 일종)를 갖추어 판부상서(判部尙書)에게 올리오니, 도잠과 영도의 예에 따라 특별히 사실을 밝혀주는 은전을 내려, 다시 승려가 되도록 해 주십시오.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대감의 뜻을 듣고자 합니다."
당시 조정에는 많은 사건이 누적되어 끝내 처리되지 못했고, 적음존자는 그 이듬해 동안(同安) 땅에서 입적하였다. 사인(舍人) 한자창(韓子蒼)이 그의 묘비명에, "그는 어진 이를 벗하였다가 화근을 불러들였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를 아는 말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