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마루 2015. 10. 27. 12:14

5. 여든 네살에도 참구하는 노선사 / 자비사(慈悲寺) 한(閑)장노

 

 소흥(紹興) 갑인(1134), 복주 민현(福州 閩縣) 반야정사 서당(西堂)에 동강(洞江) 대비사(大悲寺) 한(閑)장노가 있었는데 당시 84세였다. 대혜(大慧)노선사는 양서암(洋嶼菴)에 살았는데 반야정사와는 강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한장노는 비록 늙었으나 더욱 열심히 참구하였는데 하루는 양서암에 가서 대중을 따라 입실하니 대혜스님이 물었다.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어떤 사람인가?"

 "붙들어 일으킬 수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빨리 말해라, 빨리 말해!"

 한장노가 무어라고 대답하려는데 대혜스님이 죽비로 후려치니 한장노가 문득 깨쳤다. 이에 대혜스님이 게송을 지어 그를 인가하였다.

 

한 몽둥이로 생사의 굴을 깨뜨리니

그 자리에서 범인과 성인의 자취가 끊겼네

조주선사 마음쉬지 않은 것을 비웃더니*

늙으막에도 오히려 동서로 뛰어다니네!

一棒打破生死窟  當時凡聖絶行蹤

返笑趙州心不歇  老來猶自走西東

 

 민 땅에서는 게송을 지어 이 사실을 비웃는 사람이 있었다.

 

팔십 늙은이 한장노가 관정식(灌頂式)식 하고

이제 갈길이 어렵다고 말하누나!

바다 어귀 양서암 안개 속에서

변함없이 늙은 어부 낚싯대 잡고 있다.

八十老翁閑灌頂  只說如今行路難

海門洋嶼煙波裏  依舊漁翁把釣竿

 

 대혜스님이 이 게송에 다시 네 수를 덧붙였다.

 

팔십 늙으니 한장노가 관정식(灌頂式)식 하니

거위왕이 우유만을 가려 먹을 줄 스스로 알았다네

총림의 애꾸눈 먹통들에게 말하노니

학의 울음을 꾀꼬리 소리라 하지 말아라.

八十老翁閑灌頂  鵝王擇乳自家知

寄語叢林瞎漆桶  莫將鶴唳作鸚啼

 

이제 갈길이 어렵다하니

앞도 삼삼 뒤도 삼삼이라

총림의 애꾸눈 먹통들에게 말하노니

구름 위에서 모두 버리고 다시 참선하라.

只說如今行路難  前三三與後三三

寄語叢林瞎漆桶  雲頭放下更來參

 

바다어귀 양서암의 안개 속

그 곳에 몇 사람이나 갈 수 있었던가

총림의 애꾸눈 먹통들에게 말하노니

등 뒤에서 탐내고 화낼 필요 없다.

海門洋嶼煙波裏  得到其中有幾人

寄語叢林瞎漆桶  不須背後起貪嗔

 

변함없이 늙은 어부 낚싯대 잡았는데

아름다운 새우 게는 바보가 아니란다

총림의 애꾸눈 먹통들에게 말하노니

생멸의 화두를 가지고 보지 말아라!

依舊漁翁把釣竿  錦鱗蝦蠏不顢頇

寄語叢林瞎漆桶  休將生滅話頭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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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주(趙州)선사는 80나이에도 행각길을 떠났다.

 

 

6. 불인(佛印)선사와 왕안석(王安石)의 만남

 

 불인(佛印)선사는 원풍(元豊) 5년(1082) 9월에 여산(廬山)의 귀종사(歸宗寺)에서 금산사로 부임하라는 명을 받았다. 진회(秦淮)에 배를 매놓고 정림사(定林寺)에서 왕형공(王荆公 : 安石)을 만났는데, 그가 쌍림사(雙林寺) 부대사(傅大士)초상을 가지고 찬을 청하니, 불인스님은 붓을 들었다.

 

도교의 관을 쓰고 유교의 신을 신고 불교의 가사를 입었으니

삼가(三家)를 화합하여 일가로 만들었다

도솔천 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어리석게 쌍림사에 앉아 용화회상을 기다리네.

道冠儒履佛袈裟  화회삼가작일가

망각솔타천상로  쌍림치좌대용화

 

 왕씨는 비록 불인스님에게 조롱을 받았으나 지극한 문장과 이치에 탄복하여 작은 글씨로 '미륵발원송(彌勒發願頌)' 수백자를 써서 답례하였고, 황산곡(黃山谷)이 발문을 썼다. 불인스님이 운거사에 주지로 있을 때 이를 돌에 새겼는데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7. 노화엄 회동(老華嚴懷洞)스님이 세상에 나와 하신 법문

 

 위부(魏府) 노화엄(老華嚴)은 법명이 회동(懷洞)이며 오계(五季 : 900년대) 때 사람이다. 초년에는 「화엄경」으로 도를 펴다가 만년에 흥화 존장(興化存奬)선사에게 공부하여 교외별전의 뜻을 깨달았다. 천발사(天鉢寺)의 주지가 되었다가 다시 압사선원(壓沙禪苑)으로 옮겨 살았는데 하북 땅의 승려와 속인이 그를 존경하여 '노화엄(老華嚴)'이라 불렀다. 「선문종파도(禪門宗派圖)」의 "천발화상은 흥화의 계보에서 나왔다."는 분이 바로 이 스님이다. 회동이 한번은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불법이란 너희들의 일용처에 있다. 행주좌와하는 데 있고, 차 마시고 밥 먹는 곳에 있으며, 묻고 말하는 곳에 있고, 일하고 행동하는 곳에 있다. 그러므로 마음을 움직였다 하면 도리어 틀린다. 알겠느냐? 알았다면 그것은 형틀을 지고 쇠사슬을 감은 중죄인이다. 왜 그런가? 불법이란 진사겁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생각에 보아내면 바로 너의 눈썹과 콧구멍에 있지만, 보지 못하면 마치 대나무를 이어 달을 따내려는 것처럼 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어찌 해야 하는가? 절대로 생각을 하지 말고 말을 하지도 말라. 그런 중에 어떤 가피력을 입어서 알게 되면 반드시 기쁨이 있을 것이다. 옛사람은 '고요하면서도 항상 역력하니 부처를 구할 것도 없다. 중생 소식이 끊어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알겠느냐? 모든 부처는 본래 헛된 생각이 없고 모든 부처는 본래 이름이 없으며 일체 중생은 본디 스스로 영묘(靈妙)하니 마치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는 흔연한 허공과도 같다. 만일 이런 줄 알지 못하면 그대들은 어디나 막히게 된다."

 지금 「임간록(林間錄)」에서는 이를 천발사(天鉢寺) 원(元)선사의 법어라 기록하고 또한 원선사를 노화엄(老華嚴)이라 하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원선사는 천의 회(天衣懷)선사의 법제자로 운문선사의 5대손이며, 회동선사는 임제선사를 조부로 모신 분이다. 그 설법의 취지에서 단적으로 이 사실을 볼 수 있다.

 

 

8. 탑청소를 하며 지은 게송 / 무제도인(無際道人)

 

 무제(無際)도인은 시랑(侍郞) 장연도(張淵道)의 딸이며 초종(超宗)도인은 시랑(侍郞) 유계고(劉季高)의 질녀로서 그들은 모두 대혜노스님 문하에서 법을 받았다. 무제가 한번은 경산사에 가서 대혜스님의 탑을 청소하며 게를 지었다.

 

영산의 눈물에 옷적시고

화로에는 소실봉의 향이 피어오른다

구름덮인 산은 속절없이 눈에 가득한데

법왕(法王)을 뵈옵디 못하누나!

衣濕靈山淚  鑪焚少室香

雲山空滿目  不見法中王

 

 이때 초종도인이 그곳에 이르지 않았기에 무제가 빨리 오라고 재촉하니 초종이 게송으로 답하였다.

 

탑은 본래 티끌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가서 청소하는가

쓰는대로 티끌이 일어나기에

그래서 나는 가지 않으려네.

塔本無塵  何用去掃

掃卽塵生  所以不到

 

 초년에 무제가 집에 있을 때 하루는 관상장이가 그곳을 지나다가, '이 분은 뒷날 보좌에 앉아 설법을 할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후에 과연 스님이 되어 법명을 혜조(慧照)라 하고 만년에는 삭발은사 자수 무착(자수무착)선사의 법을 이었다. 어부의 노래가락에 맞춰 원오(圓悟)선사를 찬하였다.

 

일곱 도량에 앉아 세차례 군왕의 조서를 받았네

허공 꽃과 물 속의 달은 어느 때 끝날까

소옥아! 부르는 소리에 도를 깨쳤으니

참으로 우습도다

 

이제껏 자손들을 족히 속여 넘겼으니

파도같은 논변에 탁 트인 목소리

공중에 달이 비치듯 환하도다

지팡이 날리며 서쪽으로 돌아가니 구름 아득한데

파초의 원숭이 울부짖을 때

모두들 귀향가를 부르는구나.

 

七坐道場三奉詔  空花水月何時了

小玉聲中曾悟道  眞堪笑

 

從來謾得兒孫好  辯湧海潮聲浩浩

明如皓月當空照  飛錫西歸雲杳渺

巴猿嘯  大家唱起還鄕調

 

 건도(乾道) 7년(1171)에 임평(臨平) 명인사(明因寺)의 주지로 옮겨갔다가 순희(淳熙) 4년(1177) 6월에 무위군(無爲軍)에서 그의 아들 양첨판(梁簽判)과 이별하고 곧바로 광효사(光孝寺)의 법상에서 앉은 채 서거하였다. 머리를 깎으니 무수한 사리가 나왔으며 당시 삼복 더위였으나 몇일이 지나서도 그의 용모는 엄연하였다. 자수사(資壽寺)에 머물다가 그의 제자 각진(覺眞) 고소사(姑蘇寺)로 모시고 돌아가 잠시 능가산(楞伽山)에 초빙하였다. 11년 후에 그의 아들이 삼구(三衢)로 옮겨 갔는데 뼈를 봉안했던 감(龕)을 땅속에서 파내자마자 샘물이 솟아 나오니 승려나 속인들이 모두 놀라 공경하였다. 이는 반야의 영검이 아니겠는가? 

 

 

9. 유정(惟正)선사의 행적과 법문

 

 유정(惟正)선사는 수주(秀州) 화정 황씨(華亭黃氏) 자손이다. 5세에 불서를 보고 글자를 짚어낼 줄 알았으며 읽어주기만 하면 낭랑히 외웠다. 20세에 항주 북산 자성사(資聖寺)에 찾아가 본여(本如)선사에게 사사하니 그 고을 주소안(朱紹安)이 자기 돈을 내어 승적을 얻는 데 보탬이 되겠다고 하였으나 승낙하지 않고 슬픈 어조로 말하였다.

 "옛날에는 맑은 인연과 깊은 종지로 승려를 만들었으나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삭발하고 승복을 입는 것으로 따질 뿐이니, 참됨이 거짓을 이기지 못하고 그저 무두들 되는대로 쏠려가는 데야 어쩌겠습니까!"

 얼마 후 상부(祥符 : 1008~1016) 연간에 큰 은전을 입었으나 그는 오로지 낡은 승복을 안고 있을 뿐이었다. 도반 하나가 업신여기자 그가 말하였다.

 "부처님 부처님 하는 것이 그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며, 스님 스님 하는 것이 옷 차림을 가지고 하는 말이겠느냐"

 그 후 일년 살림살이를 차례로 맡으며 본여(本如)선사의 일을 잇게 하자는 사람이 있었으나 역시 사절하면서 말하였다.

 "탁발걸식한다는 말은 들었으나 편안히 앉아서 받아 먹는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여러 조사를 낱낱이 배알한다는 말은 들었으나 배우기를 그만두고 스스로 자부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하물며 나는 나이도 젊고 기력도 좋으니 힘써서 조사들에게 참례할 때이지 집안 일을 할 때가 아니다."

 이에 지팡이를 들고 행장을 꾸려 동쪽으로 가 천태산에서 세가지 관법[三觀]을 배우고 다시 경산사로 발길을 돌려 노스님 거소(居素)선사에게 단전직지(單傳直指)의 종지를 물었다. 그리고는 임안부(臨安府) 공신산(功臣山) 정토원(淨土院)에서 거소선사를 모시고 힘을 다해 일을 하다가 천희(天禧 : 1017~1021) 연간에 거소선사가 입적하자 많은 사람의 뜻에 따라 자리를 이어 받았다.

 유정선사는 학문이 높고 풍부하여 시에는 도연명(陶淵明) · 사령운(謝靈運)의 운치가 있었으며 글씨에 있어서는 왕희지보다도 더욱 간략하고 순박함을 존중하였다. 이론에도 탁월하고 말솜씨도 뛰어난 사람으로 추대받았으며 왕문강(王文康) 서한림(胥翰林) 오선헌(吳宣獻) 채밀학(蔡密學) 등이 모두 그와 방외(方外)의 교유를 가졌었다. 그러나 평소 깨끗한 몸가짐으로 세상에 누를 끼치지 않았으며 처신이 청정하였다.

 이러한 몸가짐은 그의 시에서 더욱 잘 볼 수 있는데 '시냇가를 거닐며'라는 시 절구(絶句)는 다음과 같다.

 

작은 개울 한 구비에 시 한수 이루고

시의 근원을 다 마셨으나 싯구 더욱 청아하다

상류에 이르러 고요히 쉬노라니

구름 열리고 안개 개인 곳에 달이 새롭다.

小谿一曲一詩成  吸盡詩源句愈淸

行到上流聊憇寂  雲披煙斷月初明

 

 황우(皇祐) 원년(1049) 4월 8일 대중에게 법문하였다.

 "움직임이란 고요함과 짝이 되어 애당초 끝이 없다. 내 한번 움직여 64년을 지났으니 이제는 고요할 때이다. 그러나 동정이란 것이 본래 있겠는가?"

 그리고는 잠자듯 서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