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마루 2015. 11. 2. 08:32

18. 사방에 도를 묻다 / 비구니 진여(眞如)선사

 

 관서(關西) 땅 제근(除饉)의 딸 진여(眞如)는 일찍이 관에 나아가 뛰어난 재능으로 내부인에 선발, 교귀비(喬貴妃)의 내전 시녀가 되었는데 교귀비는 불교를 숭상하여 그에게 삭발을 허락하였다. 그는 사방에서 도를 참구하다가 민(閩) 땅에 들어와서는 대혜노스님의 천남 땅 소계사(小谿寺) 운문회상에 참여하였다. 하루는 게송을 한 수 지었다.

 

우연히 평지에서 엎어졌다가

일어나니 도무지 할 말이 없었다.

누군가 어찌된 일이냐고 다시 물으면

웃으면서 청풍명월을 가리키겠네.

平地偶然著攧  起來都無可說

若人更問如何  笑指淸風明月

 

 대혜스님이 소참 법문에서 그를 위해 대중에게 게송을 설하였다.

 

오늘의 진여비구니

옛날 왕녀의 사부었을 때

몸은 비단 숲 속에 살면서

거치른 삼베만 입고 살았다오

입을 열면 고상한 말씀이 나오고

부처를 헐뜯는 말은 하려하지 않았다.

시비의 구덩이에서 뛰쳐나와

생사의 길을 단절하니

범의 동굴 마귀 집에 들어가도

마음엔 두려움이 없네

 

팔양경(八陽經)을 되는대로 써서

스스로 3천부를 가졌으며

운자없는 시 읊기는 좋아하여

글자 수를 맞추지 않았네

행각하며 천하를 우비면서

참선해도 깨달은 바 없다가

요즘 운문에 도착하여

한꺼번에 모두 들켰으니

방아꽁이를 잘못 알고

겨울 오이라 하네

 

이렇게 해서 비구니가 되었는데

그대에게 권하노니 초 맛을 보시오!

틀린 데가 한군데 더 있으리니

말해 보아라. 어느 곳이 틀렸는가를

가주 땅 큰 불상이 불에 구운 밀가루를 먹고

섬부의 무쇠소는 째진 배를 붙들고 있단다.

 

今日如師姑  昔時王師父

身居羅綺叢  只著麤麻布

開口便高談  嫌佛不肯做

趒出是非坑  截斷生死路

入虎穴魔宮  心中無怕怖

 

杜撰八陽經  自有三千部

愛吟落韻詩  偏不勒字數

行脚走天下  參禪無所悟

近日到雲門  一時都敗露

錯認碓觜頭  喚作冬瓜瓠

 

如此作師姑  勸君少喫醋

更有一處乖  且道那一處

嘉州大象喫炙麩  陕府鐵牛撐破肚

 

 이로써 진여스님의 행적을 대략 알 수 있다.

 

 

19. 반짝반짝한 도인 / 보령사(保寧寺) 기도자(璣道者)

 

 보령(保寧) 기(璣)도인은 천품이 섬세하고 부지런하였으며 얘기를 재미있게 하였으므로 대혜노스님은 그를 반짝반짝한 도인[惺惺道者]이라 하였다. 당시 강동(江東) 조운사가 위세로 여러 선사에게 군림하고 있었다. 그가 기도인과 함께, 강물을 건너가는 나한의 그림을 구경하다가 나한이 너무 늙어서 강물을 건너갈 수 없을 것이라 하면서 기도인에게 물었다.

 "그대는 강을 건널 수 없겠지요?"

 "눈감고도 건너지요."

 조운사는 얼굴을 펴고 활짝 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많은 선사가 보령 보공암(寶公菴)에 모두 모였는데 한 사람이 제안하였다.

 "이곳의 이름이 보공암인데 어찌하여 보공(寶公)이 없소? 그러나 차례로 한마디씩 하여 오늘 이 훌륭한 모임을 즐겁게 합시다."

 기도인이 '나이가 적은 자로부터 위로 올라오면서 말하게 하자'고 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그의 나이가 가장 많았다. 기도인의 차례가 되어 어떤 사람이, '노화상께서 말씀하실 차례입니다.'하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많은 선사를 돌아보며, '방장실로 가서 차나 한 잔 합시다' 하니, 사람마다 크게 웃었다.

 기도인은 스님이 찾아오면 언제나 요즘 어느곳에서 왔으며 어디에서 여름 결제를 하였는가를 물었다. 그들이 공손히 대답하기를 기다렸다가는 다시 사람사람이 저마다 태어난 인연이 있는데 무엇이 그대의 생연(生緣)이냐고 물었다. 당시 적음(寂音)선사가 기도자(璣道者)에게 다시 가르침을 청하였다. 

 "스님께선 사형사제간에 만났을 때는 왜 생연을 묻지 않습니까?"

 "내 생연을 묻는 것은 우선 그들에게 입을 열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렇게 정성을 간직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20. 대혜선사 화상찬 / 풍제천(馮濟川)

 

 풍제천(馮濟川)이 소흥(紹興) 무오년(1138)에 경산사 여름 결제에 참여하였는데 선성(宣城) 광심(廣心)상좌라는 이가 대혜선사의 화상에 찬을 청하자 다음과 같이 썼다.

 

경산 장노를 알고자 하는가

목뼈가 뻣뻣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

백천 대중이 안주하는 곳에

절 살림이라곤 곡식 한 톨 없구려

 

도를 말하고 선을 말하는 것으로 논한다면

과연 종횡으로 대적할 사람 없으나

외곬수 성깔이 보통이 아니니

부처도 알지 못할래라

강 건너에서 한차례 보고 돌아온다 해도

운수 대통함을 내 감히 보장하리라.

 

要識徑山長老  强項更無倫匹

安却百千大衆  常住元無顆粒

 

若論說道說禪  果是縱橫難敵

一味性氣不常  佛也理會不得

隔江一見便回  敢保上上大吉

 

 대혜선사가 보고는 그 뒤에 글을 덧붙였다.

 

묘희여, 묘희여!

풍제천이 너를 칭찬하였도다

광심상좌는 알겠느냐

막혔도다 막혔도다.

妙喜妙喜  濟川讚你

廣心會麽  隘是隘是

 

 이는 선성(宣城) 땅의 속담에 "길이 행인들로 막혔느냐?"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한번은 풍제천이 중풍에 걸려 입이 돌아갔는데 대혜선사가 게송을 지어 안부를 물었다.

 

들개의 울음소리도 못내는 주제에

사자후부터 먼저 하다가

반야를 비방했기 때문에

한쪽 입가가 비틀어졌네!

未解野犴鳴  先作獅子吼

只因謗般若  喎却一邊口

 

 여기서 그들이 도로써 서로를 잊었음을 볼 수 있으니 여느 마음으로는 쉽사리 헤아릴 수 없으리라.

 

 

21. 악림사(岳林寺) 누각 중건에 얽힌 이야기

 

 명주(明州) 봉화현(奉化縣) 악림사(岳林寺)는 포대(布袋)화상의 도량이었는데 숭령(崇寧 : 1102~1106) 연간에 동씨(董氏)가 누각을 세우고 임씨(任氏)가 포대화상의 소상(塑像)을 만들어 봉안하였다. 그 후 동씨가 이에 불만을 품고 소상을 아래로 옮겨놓고 스스로 다시 소상을 만들었다. 얼마 후 점을 잘 치는 자가 말하기를, '동씨가 희사한 소상은 60년 운수밖에 없고 임씨의 소상이 처음 복을 일으키게 된다'고 하였는데 소흥(紹興) 말엽에 누각에 불이나서 소상이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그 햇수를 거슬러 계산해 보니 꼭 맞았다. 이 때 요도자(饒道者)가 한쪽 팔에 연비를 하고 모연하여 누각을 중건하고 임씨의 소상을 가운데 모셨으며 여기에 기도를 하면 반드시 효험이 있었다.

 주지 영(瑩)선사는 자가 온수(溫叟)인데 세 수의 게송을 지어 요도자에게 보냈다.

 

자신을 잊고 대수롭지 않게 한 팔뚝을 태우고

용맹한 고행으로 아름다운 인연 마쳤네

시끄러운 저자의 문전에서 목탁을 두드리니

비로소 손도 없이 주먹질하는 법을 깨달았다네

 

그대는 뼈를 부수는 노력으로 누구 은혜 보답하려는가

용화회상* 미륵 보살님께 머리 숙이네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도 힘이 덜리어

겹겹 누각 문이 저절로 열리네

 

나도 또한 머리 들고 시끄러운 절간으로 들어가

우선 포대화상에게 향불을 올리고저 한다

포대를 가득 채웠으나 한결같이 쓸쓸해

후미진 거리에서 방탕함을 배우네.

 

忘身一臂等閑然  勇猛頭陀了勝緣

鬧市門前打得著  始知無手解行拳

 

汝將粉骨報誰恩  稽首龍華補處尊

無指可彈猶省力  重重樓閣自開門

 

我亦將頭入鬧藍  且圖香火有同龕

布囊貯滿一落索  巷尾街頭學放憨

 

 그를 포대라고 이름한 것은 그가 지팡이 끝에 포대를 둘러매고 그 속에 모든 일용 도구를 가지고 다녔기 때문인데 그 스스로도 이름이 걸맞다고 하였다. 5계(五季)시대 양(梁) 정명(貞明) 2년(916) 병자년에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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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억 7천만년 후에 올 법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