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와암주서(雲臥菴主書) 2.<終>
운와암주서(雲臥菴主書) 2.
매주(梅州)에서 죽은 63인이란 서사천이 소주에 머물렀던 날짜를 말하는 것과 비슷한 류라 하겠습니다.
또 연보에 '대혜선사가 매주에 있을 때 납자들은 거칠고 쓸쓸한 그곳까지 따라가 한마디 말씀을 청해 듣고 눈길 한번 받는 것만으로도 종신토록 위안을 삼으니 제방을 내려 볼 만하다' 하였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는 제방의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합니다. 노스님의 제자로서 종문의 본분사를 표방하지 않은 경우는 동산(東山)선사의 게송뿐이니, 지금 총림에서 큰 소리 친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또 연보에 '소흥 갑술년(1154) 매주에 있을 때 임제의 정통 법어를 법굉(法宏)수좌와 도선(道先)시자에게 부촉하였다.' 하지만 법굉수좌는 벌써 매양에서 비명횡사한 후였고 도선시자 역시 경산사에서 죽은 후였습니다. 굉수좌와 선시자가 이미 죽고 없는데 정통 법어를 누구에게 부촉했단 말입니까? 지금 정통 법어를 받지 못하고서 그의 법사(法嗣)가 된 이는 무슨 핑계를 대려는지…… 이런 일은 화려한 문장으로 사실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전에 원오(圓悟)선사가 촉(蜀)에 있을 무렵 법의와 바리때를 천남사(泉南寺)에 보내서 노스님께 전하였는데 이때 노스님께서 지은 게송이 있습니다.
부촉해온 쇠 바리때 고양이 밥 수북히 담고
마납(磨衲)가사는 검은 동이 속에 넣었으니
조종(祖宗)의 살림살이 모두 부서졌구나
장차 무엇으로 자손에게 부촉해야 할지
付來鐵鉢盛猫飯 磨衲袈裟入墨盆
祖宗活計都壞了 不知將底付兒孫
노스님이 이미 이렇게 하셨는데 굳이 정통 법어를 취하여 법굉과 도선에게 부촉했겠습니까?
또한 '형과 연(璉) 밀(密) 연(煙)이 노스님의 어록에서 강요(綱要)만을 간추려 5권으로 떼어냈다'하는데 '간추렸다'면 이는 번거롭고 쓸데없는 말들을 삭제한 것일테니 그 사이에 빼고 넣은 것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를 세상에 내보여서는 안될 듯하니 부질없이 총림에다가 눈먼 아란존자만 늘렸다는 탄식만을 더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종문무고」에 기재된 일을 고찰하면서도 「종문무고」가 나오게 된 단서와 유래는 자세히 서술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간략하게나마 「종문무고」의 발단을 말해보고자 합니다. 소흥 10년(1140) 봄, 신 무언(信無言) 등 몇 사람이 경산사에서 전후하여 노스님께서 말씀한 고금의 이야기를 모아 한편의 책을 만들었는데 복청(福淸)의 진(眞)형이 「진서(晉書)」「두예전(杜預傳)」의 '무고(武庫)'란 두 글자를 가지고 장난삼아 책 이름을 붙였습니다. 소흥 11년 4월에 노스님께서 법좌에 올랐을 때 마침 장(張)시랑이 법회에 참석하니 노스님은 이로 인하여 설법하였습니다.
'장위공(張魏公)의 형 장소원(張昭遠)이 원오(圓悟)선사를 찾아뵈니 원오스님이 그에게, 철전선(鐵剗禪)을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지금 장시랑의 선을 신비궁(神臂弓)이라고 하니 게송으로 내 뜻을 나타낼밖에…….
신비궁을 한번 쏘면
일천 겹 갑옷도 뚫어버린다
뽑아와 자세히 보니
지독한 가죽버선 구린 냄새로구나.'
神臂弓一發 穿過千重甲
子細拈來看 當甚臭皮韈
이튿날 장시랑이 법좌에 오르기를 청하니 태주(台州)의 요인(了因)선사가 대혜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신비궁을 한번 쏘아 일천 겹의 자물쇠를 일시에 열어 젖히고 취모검(吹毛劍)을 한번 휘둘러 만겁 의심을 모조리 깨친다 해도 그것은 마치 생사쪽의 일입니다. 작가 종장이 서로 만났을 때는 어떻습니까?'
'이 썩은 시체를 끌어내라!'
'스님께선 누구를 위하여 이렇게 말씀합니까?'
'관 속에서 눈이 휘둥그래졌구나'
'이는 제가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묻는 것은 무엇인고?'
'손을 잡고 높은 산을 오르는 것입니다.'
'네 경지가 아니다.'
'독사의 머리 위라도 가려운 곳은 긁어 주어야 합니다.'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용문폭포를 오르지 못하면 어떻게 바다가 넓은 줄을 알겠습니까?'
'벌써 낙방을 했는데야 어쩌겠느냐.'
5월에 장시랑이 조정의 비난(모함)을 받자 그 영향으로 대혜스님도 형양으로 쫓겨나는 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때 조정에서는 전쟁을 논의하던 즈음에 신비궁 이야기로 시비가 일어난 성 싶습니다. 그러므로 장시랑이 하중승(何中丞)에게 보낸 답서에서 '월말께 원수(元帥)로 임명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얼마 후 장휘유 소원(張徽猷 昭遠)이 게를 지어 노스님을 조롱하였습니다.
소계암주는 마음대로 어리석은 짓 해대며
사람들 앞에서 시비 따지기를 좋아하네
오직 가죽버선 구린 냄새라는 한 구절로
늙은이의 머리통을 날릴 뻔 했군!
小董菴主放憨癡 愛向人前說是非
只因一句臭皮韈 幾乎斷送老頭皮
이를 계기로 산중에서 사리깨나 안다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무고(무고)'라는 두 글자를 근심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천승각(千僧閣)의 수좌 강주(江州) 능(能)형은 천승각 문에 방을 써 붙였습니다.
'근래 형제들이 노스님께서 평상시 말씀하신 바를 책으로 엮어 무고(武庫)라 하였는데 노스님에게 불편한 일이 생길까 두려우니 제목을 잡록(雜錄)이라 고치면 아무런 탈이 없으리라 믿는다.'
그 후에 또 참정(參政) 이한노(李漢老)의 발문이라고 거짓으로 지어 '소흥 신유(1141) 상원일(上元日)에 소계(小谿)의 초당에서 썼노라'라고 하였는데, 사실 노스님은 「무고」란 책이 있는지고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소흥 경오(1150) 형양 땅에 있을 때 한 도인을 만나 그가 베낀 책을 보고서야 가져다 읽은 후 '여기에 이같은 나의 말도 있었구나! 그렇든 저렇든 어찌해서 무고라 이름을 붙였을까?' 하고 '훗날 여가가 있으면 백가지 일을 말하여 총림과 인연을 맺고 그 이름을 바꿔보리라.'고 하였는데 얼마 후 매양 땅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계유년(1153) 여름 법굉수좌가 전일에 한 말을 가지고 청하였습니다. 이에 고요히 앉아 있는 사이에 이야기를 하면 법굉수좌가 기록하여, '대여(大呂) 신집정(申執政)……'으로부터 '보령 용(保寧勇)선사는 사명사람이다'라는 부분까지 55단락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당시 복주(福州)의 예(禮)형도 그 책의 편집에 참여하였는데 법굉수좌는 마침내, 노스님께서 양서암(洋嶼菴) 대중처소의 문에 방을 써 붙인, '형제들이 참선을 하지 못하는 것은 대부분 잡독이 마음 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라는 구절을 가지고 노스님에게 아뢰어 책 이름을 「잡독해(雜毒海)」로 하였습니다. 법굉수좌의 친필기록은 덕(德)시자가 거두었고 예(禮)형의 친필기록은 나에게 있는데, 예형의 기록 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운개사(雲蓋寺)의 고(古)화상은 총림에서 <고모고(古慕固)>라고 불리우는데 '개는 불성이 없다[狗子無佛性]'는 화두에 대해 게송을 읊었다.
조주스님, 개는 불성이 없다하였네
종일토록 뜨락에서 깊은 잠에 놀라 깨지 않더니만
회오리 바람이 늙은 소나무에 불어 솔방울이 떨어지니
잠깨 일어나 컹컹 짖어댄다.
趙州狗子無佛性 終日庭前睡不驚
狂風打落古松子 起來連吠兩三聲
노스님은 이 글을 보고, 이야말로 개를 읊은 시라고 하였습니다.
예형의 작은 해서(楷書)는 필력이 정교하고 강하여 매우 운치가 있으니 이는 진송(晉宋)의 법첩에서 유래된 성 싶습니다.
또 연보의 20년 난에 4구 시가 수록되어 있으나 그 유래는 말하지 않고 다만 '이 모든 시는 영해(嶺海)로 유배될 것을 미리 예견한 듯한 뜻이 담겨 있다.'
고 밝히고 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기러기 돌아오니[鴈回] 비로소 소상강이 먼 곳임을 알았고
돌 부딪는 여울[石鼓灘] 기슭에서 하늘을 원망마오
한번 머문 지 어언 10년 진초(秦楚)가 가로막혀
목궁(木弓)이 옛 인연을 거듭 이어주도다.
鴈回始覺瀟湘遠 石鼓灘頭莫怨天
一住十年秦楚隔 木弓重續舊因緣
이 시는 설봉사(雪峰寺)의 문(聞)형이 소흥 12년(1142) 형양 땅에서 임안(臨安)으로 오는 길에, 서촉(西蜀)의 비효선(費孝先)이 점술집을 차려 사람들의 길흉을 점치는 것을 보고서 노스님의 일을 물었던 까닭에 씌어지게 되지 않았나 합니다. 형양에는 회안(回鴈)이라는 산이 있고 소상에는 석고탄(石鼓灘)이란 냇물이 있으며 신유년에서 겨오년 사이에 매양 땅으로 옮겨 갈 때까지가 꼭 10년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예전에는 매화나무로 활을 만들었다'고 하나, 그 출처는 자세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 시를 점괘 시로 보고 형양에서의 노스님의 행적과 비교해 본다면 너무나 잘 맞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 「연보」에는 수록되어 있으나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화약사(華藥寺) 참종루(懺鐘樓)의 중수를 경축하는 소참 법회에서 게송을 지어 설법하되 장난삼아 민현(閩縣)의 음율을 켜고 그 지방 사투리를 썼다고 하며 후미에는 두목지(杜牧之)의 시 '저문 하늘 모래 위에 놀란 기러기 날고[驚起暮天沙上鴈]……' 라는 구절로 단구(斷句)를 삼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지난 날 균양(筠陽) 땅 염(瑫)형의 말을 들어보니, '앙산사(仰山寺)' 종루의 벽 위에 옛날부터 이런 시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뚝히 한 칸 집을 세워
가운데 쇠종을 하나 매달아 놓으니
저문 하늘 모래 위에 놀란 기러기 일어나
바닷가로 비스듬히 두 세 줄 날아가네.
突然架起一間屋 中心懸箇鐵琅璫
驚起暮天沙上鴈 海門斜去兩三行
노스님이 죽암(竹菴)스님과 함께 앙산사에 있을 무렵 종루에 올라갔다가 이 시를 읽고 웃었으며 화약사의 소참 법회에서 이것으로 설법을 하였다고 합니다. 만일 바닷가 어귀[海門]라는 말을 예언이라고 한다면 노스님께서 바닷가에 주석한 적이 없으니 어떻게 이를 예언이랄 수 있겠습니까?
「연보」에 또한 원오선사에 대한 제문과 부동헌(不動軒)의 기(記)를 수록하고 있으나 이는 이미 천남사(泉南寺)에서 간행된 「주봉집(舟峰集)」에 기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같은 시대에 지어진 것일 뿐 노스님의 작품으로 수록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입적할 때 말씀하신 유언 42자는 노스님의 친필인데도 도리어 수록하지 않고 내가 기록했던, 법통을 이어달라는 간곡한 부탁의 말만을 수록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때 상례를 치르는 일에서 기록을 책임졌기에 노스님의 말씀 끝부분에 분명히 이는 시자에게 말로 전한 것을 기록하라 명한 것으로, 다른 기록과 구별을 두었습니다. 이는 이른바 '늙은이가 흔히 하는 말이니, 어찌 기록할 만한 게 되겠는가'라는 것입니다.
「연보」에 이르기를, 노스님은 융흥(隆興) 계미년(1163) 3월 우리 군사가 개선한다는 말을 듣고 게송을 지었다고 하면서, '자욱한 티끌 한번 씻기니 넓다란 하늘이어라'는 한 구(一句)만을 실었을 뿐입니다. 이 게송은 애당초 황제에게 올리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답니다. 그 친필 진본(眞本)은 현(賢) 형에게 있었는데 현 형이 죽자 이리저리 뒹굴다가 앙산사 권(權)형이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게송 앞에 '신 아무개 올리다[臣某甲上進]'라는 다섯 자가 있으며 본문엔,
자욱한 먼지 한번 씻기니 넓다란 하늘이어라
수많은 산, 두 줄기 강물이 손바닥에 있도다
세상 안팎의 일 모두 분명히 깨달아
당장에 주인공을 어둡게 하지 않네.
氛埃一掃蕩然空 百二山河在掌中
世出世間俱了了 當陽不昧主人公
라고 씌어 있습니다. 이런 게송이라면 전문을 수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연보」 끝에 노스님의 법어 가운데 '배고픈 사람에게서 밥을 빼앗고 밭가는 농부에게서 소를 몰아간다[奪食驅耕]'는 말과 '다리를 끊어놓고 길을 막아버린다[斷橋塞路]'는 말씀은 아마 장난삼아 한 성싶다.'고 하였는데, 이 말을 장난삼아 했다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허튼 말은 바른 말을 해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선배스님들은 '배고픈 자에게서 밥을 빼앗고 밭가는 농부에게서 소를 몰아가는 매서운 수단, 바로 여기서 종사(宗師)의 면모를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은 창고를 기울여 털고 귀거리와 비녀를 잃으면서도[墮珥遺簪] 오직 노스님의 뜻을 거슬릴까봐 걱정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인정으로 노스님을 받들어 모시는 것이지 지극한 불교의 도리에 귀의하고저 노스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귀거리와 비녀를 잃었다는 말은 물건의 유실을 말함이지 한퇴지(韓退之)가 말한 바 '월(越)나라의 장사치, 오랑캐[胡]의 장사치 까지도 입었던 옷가지들을 모두 벗어 바쳤다'는 뜻과는 다른 것입니다.
「연보」 중간 부분의 탑명(塔銘)을 살펴보니 정전 속전(正傳續傳)을 상고한 글은 하나도 없고 심지어 여러 편의 글들은 노스님께서 시자에게 일러주신 말들에 의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은 애당초 정설이 아니므로 여기에 수록할 만한 게 못됩니다. 그것을 어떻게 고찰이라 하겠습니까? 속담에, '오가는 얘기들은 근거가 없다'는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또 「연보」의 발문에서는 '정전과 속전에 실려 있지 않은 것을 모아 연보를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연보」에 기록된 일들을 살펴보면 모두 정전과 속전에 실려있는 것들이니 어찌 실려있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흥국군(興國軍) 안(安)형이 건염 정강(建炎 政康 : 1126~1127) 연간에 출정할 때 선봉으로 나갔다가 돌아와 나에게 하는 말이 "노스님은 진태사(秦太師)의 친척의 명으로 법좌에 올라서 설법하시기를 '나는 17년 동안이나 진태사의 관할에 편입되어 그의 속박을 받았으나 한번도 그를 원망해 본 적이 없었다. 실상은 전생에 이미 정해진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하시고, 드디어 동산사(東山寺) 수업원(受業院)에서 숭령(崇寧) 갑신년(1104)에 불상을 만들었는데 '불상에 재난이 있으면 사람이 찾아와 출가하게 되고 불상이 훼손되면 그 사람에게 재난이 있게 될 것이다'는 정생(丁生)이란 기인의 말을 인용하여, '나의 평생 일과 견주어 보니 그 시일이 차이가 없다. 어찌 전생에 이미 정해진 인연이 아니겠느냐?'고 하셨다. 이 말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그의 달관에 탄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하였는데 정전과 속전의 맨 앞에 이 이야기를 실었으나 「연보」에서는 도리어 '정(定)상좌를 위한 설법'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일을 설법하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 차라리 진태사(秦太師)의 친척을 위한 설법이라고 말하느니만 못할 것입니다. 시험삼아 「광등록(廣燈錄)」에서 정상좌를 위한 설법이 있었나를 살펴 보았더니 그가 허공에 구멍을 뚫듯 단서를 조작해서 세상에 떠벌린 속임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흥(紹興) 병자년(1156) 가을 노스님은 일찍이 배타고 악저(鄂渚)를 지나면서 나의 출생지 홍주(洪州)에 관해 말하기를 '몇몇분의 큰스님이 배출된 곳이다. 보봉 월(寳峰月)선사, 해회 종(海會從)선사, 운봉 열(雲峰悅)선사와 같은 훌륭한 선사들이 어쩜 차례차례 태어났을까!' 하셨습니다. 또한 '내 나이 19세 때 은정사(隱靜寺)의 배도암(杯渡菴)에 놀러갔더니 그곳 암주가 꿈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운봉 열(雲峰悅)화상의 후신이라 하여, 그후 서죽사(瑞竹寺) 정(珵)화상의 처소에 이르자 그가 갑자기 나를 보고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노스님의 설명이 몹시 자세하였으므로 이 사실을 빠짐없이 「운와기담」에 수록했었습니다. 그러나 연보에서는 오직 정(珵)화상이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한 것만을 언급했을 뿐 운봉(雲峰)의 후신이라는 말은 수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에 관해서는 노스님이 여러 차례 말하였고, 총림에서도 이를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지난 번 영문(靈文)선사와 대담할 때 그는 '온 세상이 운봉 열선사의 후신임을 알고 있고 또 때를 만나 남악 양(南嶽讓)선사의 옛 호를 얻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남악선사 또한 대혜선사란 법호를 하사받았기 때문입니다. 강서(江西)지방에 한 스님이 「융흥불운통기(隆興佛運統記)」란 책을 써서 모두 두 편의 큰 책으로 간행한 일이 있습니다. 그 내용 가운데 '가섭이 주(周) 의왕(懿王) 4년 경인에 계족산(谿足山)으로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전등록」에서는 도리어 효왕(孝王) 5년 병진의 일로 기재하여 그 차이가 28년이나 됩니다. 가섭의 사적마저도 이와 같은데 그 나머지야 가히 알 만한 일 아닙니까.
또한 그 책에서는 진 회제(晉 懷帝 : 306~312)가 유요(劉曜)를 위하여 푸른 옷을 입게 하고 술을 돌리게 하였고 동진(東晉)의 효무제(孝武帝) 만년(395무렵)에 이르러 큰 별이 나타났다고 하여 축배를 올리고 '큰별이 너에게 한잔 술을 권하였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일이 불법의 운세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까? 따라서 「통기(統紀)」를 읽어보면 취할 만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는 소청강(小靑江) 종이 한 폭 위에 작은 불상을 그려놓고 양 측면에 80개의 눈동자를 그린 후 눈마다 네 글자를 베껴썼습니다. 예를 들면 갑인년에 태어나 임신년에 입적하기 까지의 햇수를 썼고 그 아래에 행적을 기술한 것이 700여 자입니다. 이를 이름하여 「석가문불주세도(釋迦文佛住世圖)」라 하고 그 그림에다 설법 시기를 서술하였는데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 녹야원에 가서 이승(二乘)을 열어보이시고 계미년에서 갑오년까지는 생멸법을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아함경(阿含經)」으로서 성문소승(聲聞小乘)의 법이다. 그 다음 을미에서 임인년까지는 「방등(方等)」의 여러 대승 경전을 설법하시고 이승을 꾸짖어 소승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대승을 우러르게 하셨으며, 그 다음 계묘년에서 갑자년까지는 「반야경」을 설법하시어 이승을 틔워주어 마음을 커지게 하셨으며 그 다음 을축년에서 임신년까지는 「법화경(法華經)」 「열반경(涅槃經)」 등을 설법하셔서 거짓을 헤쳐 진실을 나타내시고 소승이 곧 대승임을 가리켜 흔연히 하나가 됨을 설하셨으니 이른바 세상에 계신 79년 동안 300여회의 교설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내 지난날에 지주(地州) 남도자(南道者)와 상의하여 노스님의 「주세도(住世圖)」를 만들려고 하였는데 지금까지도 그 뜻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남도자는 술(述)수좌(字는 無已)와 같은 고향사람으로, 술수좌는 노스님과 함께 서울의 원오(圓悟)선사 회중에 있다가 운거사(雲居寺)에 갔으니, 노스님의 자세한 출처를 아는 자로는 술수좌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남도자가 그와 함께 생활했으니 그가 듣고 본 바를 알고도 남음직합니다. 노스님이 처음 경산사의 주지가 되었을 때 술수좌가 선봉[先馳]이 되어 그곳 수좌와 논변을 다퉜는데 그때의 기어(機語)가 뛰어나 이를 계기로 총림에서는 그를 '술선치(述先馳)'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일찍이 노스님을 따라 형양 땅에서 머물다가 매양으로 옮겨간 후 술수좌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매산 우구(梅山愚丘)선사 회중의 수좌로 있다가 입적하였습니다. 나는 평소 남도자와는 친밀히 지냈으며 그가 총림의 전고(典故)에 대하여 하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나는 또 그러한 인연으로 길주(吉州) 화산사(禾山寺) 방(方)화상을 뵙고 그가 복당(福唐)의 조일(祖一)서기에게 편찬케 한 사심(死心)선사의 「행장」을 보았는데 이를 주봉(舟峰)선사가 지은 「속승보전(續僧寳傳)」과 비교해보니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속승보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 서현사(棲賢寺)의 수(秀)선사를 배알하였고 다음에 황룡사(黃龍寺) 회당(晦堂)선사의 회하에 참여, 끝자리에 앉아 행자 단련시키는 일을 맡아보다가 지팡이로 때리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만년에 황룡사의 주지를 하다가 회당(晦堂)에 물러나 앉았는데 저녁 법회에 말후구(末後句)를 가르쳐 달라는 사람이 있어 그에게 게송을 지어주고 담담하게 세상을 떠나셨다.
한편 행장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 황룡사에서 회당선사를 배알한 후 그곳에서 9년을 지내다가 어느 날 편히 앉아 졸고 있을 때 천둥 치는 소리를 듣고 훤히 깨쳤다. 9년을 그곳에서 더 지내다가 비로소 황룡사를 떠나 두루 여러 선방을 다닌 후 서현사(棲賢寺)에 이르러 수철면(秀鐵面)선사를 뵈었다. 두번 째 황룡사의 주지를 지낼 때 대장사(大莊寺) 북루(鼓樓)의 현판을 베껴써서 안심각(安心閣)을 만들고 몸이 불편하자 대중들이 돌아가자고 청하니 노여워하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나는 삼천 대천세계를 집으로 삼고 있는데 어느 곳으로 돌아가잔 말이냐? 하물며 납승이 어디간들 편치 않는 곳이 있겠는가?'
장주(藏主) 혜선(慧宣)이 '스님께선 정신 차리소서!'하고 외치자 노스님은 박차고 일어서면서 '이 사천(四川) 땅 중놈아! 나는 이곳에서 일을 끝마치겠다'하고 편안히 서거하셨다.
당시 영원(靈源)선사가 소묵당(昭默堂)에 계시다가 사심(死心)선사의 영전에 게송을 고하였는데 그 게송과 서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엎드려 생각하니 13일에 저의 방을 찾아오셔서 차를 달이고 음식을 갖추어 놓고 이야기했던 일 몹시 기뻤습니다. 또 어제 서주(舒州) 조청대부(朝請大夫) 서사천(徐師川)의 감로진승(甘露眞乘)에 대한 물음의 답서를 거론해주시니 평소와는 달리 그 말씀이 자상하여 빈틈없고 부드러웠습니다. 또 오늘 아침에 은정(隱靜)의 조인(祖印)선사에게 회답한 편지를 내보이시며 '그가 이미 부도를 만들었다고 하니 피차 늙은 이로서 앞으로는 편지를 보내올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식사를 끝마치고 조용히 이야기하다가 가셨는데 이튿날 저물녘에 기별을 보내니 화상은 이른 새벽에 장원(莊園)을 나가 재를 마친 후에 몸이 편찮은 듯 하니 오늘 저녁 돌아오시지 못할까 두렵다고 하였는데 15일 아침 일찍 돌아가셨다 합니다.
저는 병든 몸을 무릅쓰고 방장실에 올라와 보니 담담히 가부좌하신 모습이 평상시아 같고 몸도 따뜻하였으나 다만 묻는 말에 다시는 대답이 없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대답없음도 잔소리인 줄을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귀가 없이도 말을 들을 수 있으리만큼 도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야 어찌 하겠습니까? 따라서 게송을 지어 영전에 고하옵니다. 아! 자비로우신 음성과 안색은 아직도 저를 위하여 거듭 꾸지람을 해 주십니다.
일평생 진실되 말을 하시고
얼굴빛이 똑발라서 거리낌이 없어라
입적에 가까워서도 부드러운 말씀 흘려 내시고
사람에게 진실로 하신 말씀 있었네
나에겐 더욱 정성을 주시어
차를 달이고 별미음식을 차렸으나
하루 저녁 사이에
갑자기 몸을 뒤집을 줄이야
소식을 듣고 방장실에 올라와 보니
가부좌를 한 모습 온화하게 빛나시나
물어봐도 대답이 없으시구려
이것이 곧 친히 말씀으로 보여주심을 받자옵는 일이나
귀가 있는 사람으로서
소리 없는 뜻을 듣기 어려우니
미묘한 고요의 경지에서
어찌 또다시 비밀묘의 연설하기를 기다리랴.
平生詆眞語 正色無忌謂
垂滅流軟音 向人眞有謂
於余尤更懃 煮茗羅珍味
那知越夕間 遽作翻身勢
聞登方丈觀 跏趺貌*和睟
問焉不余應 卽承親說示
其如有耳人 難聽無聲義
何當妙寂中 等復演玄秘
그러나 그 게송의 서문과 행장은 내용이 같으나 「속승보전」과는 다릅니다. 그런데 「속승보전」은 이미 간행되어 널리 반포되었으나 「행장」은 총림에 알려지지 못한 형편입니다. 사심(死心)선사는 세상의 큰 종사(大宗師)라 불리우는 분이나 평소 그의 행적이 총림에 자세히 전해오지 못함은 크게 탄식할 만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나는 요즘 용심을 잘못해서 듣고 본 바를 토대로 「대혜정속전(大慧正續傳)」과 「무구문도전(無垢聞道傳)」 「무착투기전(無著投機傳)」을 편집하긴 하였으나 이러한 저서들이 상서(尙書) 손중익(孫仲益)의 「원오전(圓悟傳)」과 수자지(秀紫芝)의 「구양문충공전(歐陽文忠公傳)」처럼 후세의 큰 문장가에 의해 다듬어지기를 바랄 뿐 주봉(舟峰)의 「사심전(死心傳)」처럼 빠지고 생략된 부분이 많지 않았으면 합니다.
얼마 전 설봉사(雪峰寺)의 문(聞)형과 운거사(雲居寺)의 희(熙)형이 함께 이를 목판에 인쇄하자고 하였으나 극력 거절한 것은 이중에 반드시 여러 사람 의견에 맞지 않는 곳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판각을 하지 않은 상태라면 아직도 고칠 수가 있지만 해버렸다면 이는 좁은 견문으로 당시 회중의 도반들을 속이는 일이 되며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일했다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영원(靈源)선사가 회당(晦堂)선사의 「행장」을 지으면서 '젊어서 계율을 받들지 않아서 횡액을 만나게 되었다.'는 말을 넣었는데 천주사(天柱寺) 정(靜)선사는 그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런 얘기를 해서는 안된다고 몹시 나무랐습니다. 또 소산 여(疎山如)선사가 초당(草堂)선사의 「행록」을 편집하면서 날마다 「심경(心經)」 한 편을 지송하여 반야의 힘으로 운암(雲巖)스님의 장경 출판을 도왔다고 하였는데 동산 공(東山公)선사가 편지를 보내 그 말이 옳지 않다고 규명하였습니다. 박식하고 지혜로웠던 영원스님과 소산스님도 오히려 도반들의 꾸지람을 받았는데 하물며 그 밖의 사람이야…
그러나 「정전 · 속전」에 수록된 법제자로는 양서(洋嶼)와 소계(小谿), 그리고 처음 경산사에서 주지를 할 때에 기별(記莂)을 받은 제자에 그쳤고, 그가 형양과 매주에 있을 때와 두번째 경산사 주지로 있을 때의 법제자는 모두 여기에 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착(無著)선사를 수록한 일은 「달마전(達磨傳)」에 비구니 총지(總持)를 기재한 예를 따랐으니 무착선사에게 욕되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문(聞) 광(光) 두 선사의 법제자들이 여러 산문에 바둑알 깔리듯 많은데 그들이 자기들의 스승이 「대혜전(大慧傳)」에 수록되지 않았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죽일 놈 살릴 놈 하며 화를 낼 것입니다.
예전에 영원선사가 오조 법연(五祖法演)스님의 「정속명(正續銘)」을 저술하면서 그 중에 원오(圓悟) 선사의 이름을 빼고 오직 불감(佛鑑) · 불안(佛眼) 두 선사만을 기록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는 아마 그 당시 원오선사는 서촉(西蜀)에서 출세하여 도의 명성이 남방까지는 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른바 '서경(書經)이라 하여 모두 믿는다면 차라리 「서경」이 없느니만 못하다'고 한 맹자의 말씀과 같다 하겠습니다.
형은 설당(雪堂)선사가 오래 전에 지은 「불안정속기(佛眼正續記)」라는 책을 본 적이 있으신지요? 지난 번 형의 편지를 받았을 때 다른 말씀만 있고 안부는 듣지 못하였는데 그것도 벌써 10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입에 오르는대로 게송 한 수를 지어봅니다.
오(吳)와 초(楚)에서 서로 그리워 한 지 아득하다가
10년만에 처음으로 편지 한장 받았네
세상에는 백년 사는 사람이 없는데
편지를 받았다 하나 몇번이나 오가겠나.
吳楚相望亦遠哉 十年方得一書來
世無百歲之人也 縱有書來能幾回
피차 편지를 주고 받음이 드물다고 하나 대원경지라는 도를 놓고 보면 어찌 먼 일이라 하겠습니까? 어제 오가는 사람에게 문(聞)형이 수봉사(秀峰寺)에 주지하라는 명을 강력히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습니다. 설정(薛廷)이 덕산(德山)선사에게 요청했던 고사를 인용하는 사람이 있다 하여도 반드시 그 생각을 시행하기란 어려울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런 까닭에 게송 두 수를 지어 나의 마음을 전합니다.
서로 헤어진 지 몇 해나 지났나
강호에 떠도는 명성만 들리네
숨을 둔(遯)자로 암자이름 짓더니만 참으로 숨어버렸소
하늘 사람들 꽃을 바치려해도 길이 없어라.
自從相別幾經年 湖海唯聞道價傳
以遯名菴眞箇遯 獻花無路在諸天
듣자니 수봉사의 초청에도 가지 않았다하니
쌍경사에서 세상을 마치려는 게 아니오!
콧속이나 후비며 길게 누어있으려 하니
감히 묻노니, 사람들이여, 어찌 간파하겠소.
聞道秀峯招不去 想於雙徑作終焉
旣然穴鼻圖高臥 敢問時人作麽穿
되는대로 써 본 것이니 그저 한 웃음거리나 될 것입니다.
내 나이 올해 68세. 남은 생애가 많지 않습니다. 선배들의 말에 '인생 70이면 귀신과 이웃한다' 하더니만 내가 꼭 그 짝입니다. 이제 우리 두 사람은 모두 늙은이가 되었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니 만날 인연이 없을 듯 합니다. 이 나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할 수 있을까? 감히 지루한 말을 구구히 적은 것은 형이 뜻을 알아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고 싶은 것은 항상 부처님의 가호아래 오래오래 장수를 누리어 많은 총림에서 우러러 보는 바람을 저버리지 마시는 일입니다. 이 밖엔 더 축원할 말이 없습니다.
효영(曉瑩) 재배(再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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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의 '兒'는 '貌'의 잘못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