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벽암록碧巖錄

벽암록 上 제5칙 설봉의 대지를 머금은 쌀 한톨[雪峰栗米粒]

쪽빛마루 2015. 11. 30. 06:53

제5칙

설봉의 대지를 머금은 쌀 한톨[雪峰栗米粒]

 

 

수시

 무릇 으뜸가는 가르침을 펴려면 모름지기 영특한 놈이어야 한다. 사람을 죽이고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솜씨가 있어야만 비로소 그 자리에서 부처를 이룰 수 있다. 이 때문에 관조(觀照)와 활용(活用)이 같으며, 일신(一身)을 나투어 설법함[卷]과 다신(多身)을 나투어 설법함[舒]이 같으며 이치[理]와 현상[事]이 둘이 아니며, 방편[權]과 진실[實]이 동시에 행하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한 수 물러나 제이의문(第二義門)을 세우니, 갑자기 언어문자를 끊어버리면 처음 배우는 후학들이 (이 경지에) 이르기가 어렵다. 그러나 지난날 이렇게 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지만, 오늘도 이렇게 하니 그 죄가 하늘에 가득하다. 눈 밝은 사람이라면 조금도 속아 넘어가지 않겠지만 혹 그렇지 못하다면 범의 입 안에 몸을 가로 눕혀 몸을 잃고 목숨을 버리게 될 것이다. 거량해보리라.

 

본칙

 설봉(雪峰 : 832~908)스님이 대중법문을 하였다.

 -한 봉사가 여러 봉사를 이끌고 가는군. 생긴 대로 놀고 있네.

 

 “온 대지를 움켜쥐어들면 좁쌀만하구나.

 -이 무슨 솜씨일까? 산승(원오스님 자신)은 원래 요술을 부리지는 않는다.

 

 이를 면전에다 던져도

 -던지지 못할까 두려울 뿐. 무슨 솜씨가 있을까?

 

 새까만 칠통 같아 알지 못하네.

 -세력을 의지하여 사람을 속임이다, 네 죄를 네가 알겠지! 대중을 속이지 말라!

 

 북을 쳐서 운력이나 하라.”

 -눈이 멀었군. 북을 침은 대국의 군대를 위해서이다.

 

 장경(長慶 : 854~932)스님이 운문(雲門 : 864~949)스님에게 물었다.

 “설봉스님이 이처럼 말했는데, 우리 앞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있지.”

 “무엇입니까.”

 “절대로 불여우 같은 견해를 지어서는 안 된다.”

 설봉스님이 말하기를

 “위쪽에다 견주면 부족하고 아래쪽에다 견주면 남는다. 내가 끝내는 그대에게 말해버리고 말았네”라고 하더니, 주장자를 들고서 말을 이었다.

 “설봉스님을 보았느냐? 쯧쯧! 왕의 법령이 점점 엄하여지니 저잣거리에서 폭리를 취하지는 못하리라.”

 대위 철(大潙喆 : ?~1095)스님은

 “내가 끝내 그대들에게 땅 위에 진흙을 바르는 것 같은 쓸데없는 소리를 한마디 하겠다”하고서 주장자를 들고 말하였다.

 “보아라, 보아라. 설봉스님이 사람들 앞에서 똥을 누었구나!

쯧쯧, 어찌하여 똥냄새도 모르는고?”

 설봉스님은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온 대지를 쥐어들면 좁쌀만하다.”

 옛사람이 사람을 제접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데 뛰어난 곳이 있었으니 참으로 고생하셨구나. 투자산(投子山)에 세 번 오르고 동산(洞山)스님을 아홉 차례 찾아가 칠통(漆桶)과 목작(木杓)처럼 속이 컴컴하여 깨치지 못하고, 이르는 곳마다 밥 짓는 소임을 맡아본 것도 ‘이 일’을 깨치기 위함이었다. 동산에 이르러 밥 짓는 소임을 하던 어느날 동산스님이 설봉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을 하느냐?”

 “쌀을 씻습니다.”

 “모래를 씻으며 쌀을 버리느냐. 쌀을 씻으며 모래를 버리느냐?”

 “모래와 쌀을 모두 버립니다.”

 “대중들은 무얼 먹으라고?”

 설봉스님이 문득 항아리를 뒤엎어버리자, 동산스님은

 “그대는 덕산(德山)스님과 인연이 있다.”

하고는 그를 찾아뵙도록 가르쳐주었다. 설봉스님은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덕산스님에게 물었다.

 “옛부터 내려오는 종승(宗乘)의 일이 제게도 있습니까?”

 덕산스님이 한 방망이를 때리고서는 “뭐라고 말했지?”라고 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깨침이 있었다.

 그후 오산(鰲山)에서 폭설로 길이 막히자 암두(巖頭 : 827~887)스님에게 말하였다.

 “내가 당시 덕산에 있을 때 몽둥이가 떨어지자 통(桶) 밑바닥이 쑤욱 빠진 것 같았네.”

 암두스님이 소리 지르더니 말하였다.

 "그대는 모르는가? (감각기관의) 문으로 들어오는 것은 집안의 보물이 아니라, 모름지기 자기의 가슴속에서 흘러나와 하늘을 덮고 땅을 덮어야만이 비로소 조금은 들어맞는다는 것을.”

 설봉스님이 완전히 깨치고 예배하며 말하였다.

 “사형(師兄)이여! 오늘에야 비로소 오산에서의 도를 깨쳤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그저 “옛사람은 일부러 만들어서 후세 사람들에게 그 법규를 따르도록 하였다”고들 말한다. 만일 이와 같다면 이것이야말로 옛사람을 비방하는 것이니, 이것을 두고 부처의 몸에 피를 내는 것이라 한다. 옛사람들은 요즈음 사람처럼 구차하지 않았다. 일상수행에서 일언반구조차도 쓰지 않았다. 으뜸가는 가르침을 세워 불교 수명(壽命)을 이어간다면, 한마디 말, 반 글귀[一言半句]를 내뱉어도 자연히 천하 사람의 혀를 꼼짝 못 하게 한다. 사량분별하거나 이러쿵저러쿵할 여지가 없다.

 그의 이 대중법문을 살펴보니, 그는 일찍이 작가(作家)의 도리를 알아차렸으므로 작가의 겸추(鉗鎚 : 망치와 집게)를 가지고서, 아무리 일언반구를 내뱉어도 알음알이로 헤아려 귀신의 굴속에서 살림살이를 하지 않고, 많은 사람 중에 뛰어나 고금의 모든 이를 꽉 거머쥐고 머뭇거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의 하는 일이란 모두 이와 같았다.

 하루는 대중에게 법문하였다.

 “남산에 코가 자라처럼 생긴 뱀 한 마리가 있다. 너희들은 잘 살펴보도록 하라.” 그때에 능도자(稜道者, 長慶慧稜 )가 대중 가운데서 나와 말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이 집안에서 분명히 목숨을 잃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또다시 말하였다. “온 누리가 이 사문(沙門)의 외눈[一隻眼 : 진리를 아는 눈]이니 너희들은 어디에다 똥을 누려는가?” 또 말했다. (설봉산에 있는) "망주정(望州亭)에서도 오석령(烏石嶺)에서도 승당(僧堂)앞에서도 너희들을 인도해줬다.”

 이때 어떤 스님이 앞으로 나와서 물었다. “승당 앞에서의 제접 해줌은 곧 그만두고라도, 망주정 · 오석령에서 제접해준 것은 무엇입니까?” 설봉스님은 종종걸음치며 방장실로 돌아가버렸다.

 그는 평소에 이러한 말들을 들어 대중에게 설법했다. “그런데 온 대지를 움켜쥐어들면 좁쌀알 만하다”고 말한 바로 이러한 상황을, 말해보라, 정식(情識)으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그물을 타파해버리고 득실시비를 일시에 놓아버리고 깨끗하고 해맑아 자연히 그 울타리를 꿰뚫어야만 비로소 그의 용처(用處)를 알게 될 것이다. 말해보라, 설봉스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많은 사람들이 알음알이를 지어 말하기를, “마음은 모든 법의 주인이므로 온 대지가 일시에 나의 손 안에 있다”고 하지만 좋아하시네! 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모름지기 진실한 놈이라야 그저 귀뜸만 해줘도 골수까지 사무쳐서 투철히 알아차려 알음알이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행각납자라면 그 (운문스님)가 이렇게 한 것은 이미 어줍잖게 사람을 가르쳤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저 설두스님의 송을 보아라.

 

 소머리[牛頭] 귀신이 죽으니

 -번쩍이는 섬광 같다. 엇갈려 지나갔구나!

 

 말머리[馬頭] 귀신이 돌아온다.

 -마찰에서 튀기는 돌불[石火] 같구나.

 

 조계(曹溪)의 거울 속에 티끌이 없네.

 -거울을 깨버려야만 서로 만나볼 수 있다. 반드시 깨버려야만 된다.

 

 북을 쳐보아도 그대는 보질 못하는데

 -그대의 눈동자를 찔러 부숴라! 가볍고 쉽게 여기지 말아라. 먹통 같은 놈아, 알지 못할 게 뭐 있냐?

 

 봄날의 온갖 꽃 누굴 위해 피는가?

 -진리에 임해서는 양보할 수 없다. 한바탕 어지럽더니 언어문자의 굴 속에서 나왔군.

 

 설두스님은 애시당초부터 저 옛사람의 뜻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대뜸 그의 급소를 한번 찌르고서 송을 지었다.

 “소머리 귀신이 죽으니 말머리 귀신이 되돌아왔다”하니, 말해보라, 무엇을 말했는가를. 투철히 알아차린 놈에게는 아침에 죽 먹고 점심 때 밥을 먹는 것처럼 일상적인 일일 뿐이다. 설두스님은 자비로워 그 자리에서 한 망치로 쳐부수고 한 구절로 끝내버렸으니 참으로 고준(孤峻)하다 하겠다. 마치 번뜩이는 번갯불빛[電光石火]처럼 칼끝을 드러내지 않아 접근할 수가 없다. 말해보라, 의근(意根)으로 헤아려서 알 수 있을까? 이 두 구절로써 일시에 다 말해버렸구나.

 설두스님이 세 번째 구절에서는 가느다란 (방편의) 길을 터놓고 풍규(風規)를 조금 드러내 보였으니, 벌써 이는 낙초(落草 : 비천한 지위에 떨어짐을 비유함)이며, 네 번째 구절 또한 그대로 낙초이다. 만일 말 위에다 말을 보태고 구절 위에다 구절을 보태고, 의근(意根) 위에다 의근을 내어 헤아려서 이해하려 한다면 노승(원오스님 자신)에게 누를 끼칠 뿐 아니라, 설두스님까지도 저버리는 것이다. 옛사람의 언구는 비록 이와 같으나 그 의도는 이와 같지 않으니, 끝내 이러쿵저러쿵하는 말로써 사람을 얽어 묶지는 않는다.

 “조계의 거울 속에 티끌이 없다”했는데, 사람들이 더러는 “고요한 마음이 바로 거울이다” 라고 하나, 좋아하시네! 전혀 관계가 없다. 이는 다만 말로 이리저리 따졌을 뿐이니 어찌 (윤회를) 끝마칠 기약이 있겠는가? 이는 본분(本分)의 말이므로 산승()인들 감히 본분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소머리 귀신이 죽으니 말머리 귀신이 되돌아온다”고 설두스님은 분명히 말하였는데도 사람들이 스스로 보질 못하였다. 그 때문에 설두스님이 이처럼 어줍잖게 송하여 말하기를 “북을 쳐보아도 그대는 보질 못하네”라고 한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이 보겠는가?

 다시 그대에게 말하기를 “봄날의 온갖 꽃 누굴 위해 피었느냐?”고 하니,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그대에게 일시에 분명하게 내보여준 것이다. 봄이 되어 깊은 골짜기와 들녘 시냇물, 나아가 인적 없는 곳까지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니, 그대는 말해보라, 참으로 누구를 위하여 꽃피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