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벽암록碧巖錄

벽암록 中 제47칙 운문의 육대(六大)에도 포함되지 않는 것[雲門六不]

쪽빛마루 2015. 11. 30. 08:25

제47칙

운문의 육대(六大)에도 포함되지 않는 것[雲門六不]

 

 

수시

 하늘이 어찌 말을 하랴마는 사계절은 (절도있게) 운행하고, 땅이 어찌 말을 하랴마는 만물을 자라게 한다. 사계절이 운행하는 속에서 본체를 볼 수 있고 만물이 생장하는 곳에서 오묘한 용[妙用]을 볼 수 있다. 말해보라, 어느 곳에서 납승을 볼 수 있을까? 어언동용(語言動用) 내지는 행주좌와에 의존하지도 말고, 말로도 설명하지 말고, 분별할 수 있겠느냐?

 

본칙

 어떤 스님이 운문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법신(法身)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했었지. 일천 성인이라도 벗어나질 못한다. 허물이 적지 않구나.

 

 “여섯으로는 알 수 없다.”

 -못을 자르고 쇠를 끊는다. 팔각형 맷돌이 허공으로 날아가고, 신령한 거북이 꼬리를 끈다. (조짐이 보이지 않았을 때 알아도 벌써 제2의 속제이며, 조짐이 생긴 뒤에 알아차리면 또한 제3의 자리에 떨어지며, 또한 언어로써 알려고 한다면 좋아하시네, 전혀 관계가 없다.)*

 

평창

 운문스님이 말하기를 “여섯으로는 거두지 못한다” 하였는데, 이 말은 참으로 뭐라고 하기가 어렵다. 조짐이 나뉘어지지 않은 때에 뭐라고 할 수 있다 해도 벌써 제2의 속제이며, 조짐이 생긴 뒤에 알면 제3의 자리에 떨어지며, 언구로 분별하고 밝히려 했다가는 끝내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무엇을 법신이라 할까? 작가라면 듣자마자 거량할 줄 알아서 바로 가버리지만, 생각하거나 기연에 매였다가는 엎드려 처분을 듣고야 만다.

 태원(太原)의 부상좌(孚上座)는 본디 강사였는데 하루는 법좌에 올라 강의를 하던 즈음에 법신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시간으로는 과거 · 현재 · 미래에 두루하고 공간으로는 시방(十方)에 뻗쳤다”고 하자, 어떤 한 선객이 그곳에 있다가 피시식 웃어버렸다. 부상좌는 법좌에서 내려와 말하였다.

 “제가 조금 전에 무슨 잘못이 있었습니까? 선승은 말씀해보십시오.”

 “좌주(座主)께서는 법신을 헤아리는 일만을 강의했을 뿐 법신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잠시 강의를 그만두고 고요한 방에 앉아 참선을 해보시오. 반드시 스스로 알게 될 것입니다.”

 부상좌는 그의 말을 따라서 하룻밤을 고요히 좌선하다가 오경(五更)을 알리는 종소리에 문득 크게 깨쳤다. 마침내 선객이 머무는 곳의 문을 두드리며 말하였다.

 “나는 알았습니다.”

 “어디 말해보시오.”

 “나는 오늘 이후론 다시는 부모가 낳아주신 이 몸을 가지고 재주를 뽐내지 않겠습니다.”

 또 교학[敎中 : 금광명경]에서는 말하기를,

 “부처님의 참 법신은 마치 허공과 같아, 사물을 따라 형태를 나타내니 물 속에 어린 달과 같도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스님은 협산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법신입니까?”

 “법신은 모습이 없다.”

 “어떤 것이 법안입니까?”

 “법안은 티가 없다.”

 운문스님이 말한 “여섯으로도 알 수 없다”는 공안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이는 6근 · 6식 · 6진이다. 이 여섯이 모두 법으로부터 생겨나므로 6근으로는 법신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이처럼 망정으로 헤아린다면, 좋아하시네, 전혀 이와는 관계가 없으면 나아가 운문스님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다. 보려면 바로 보아라. 천착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듣지 못하였느냐, 교학(법화경)의 말을. “이 법은 사량이나 분별로써 헤아릴 바 아니다.”

 그의 대답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음알이를 야기시켰다. 그러므로 한 구절 속에는 반드시 삼구(三句)가 구비되어 반드시 그의 물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나아가 상황에 딱 들어맞아 한 말씀 한 구절과 한 점 한 획에서도 몸을 벗어나는 곳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 구절을 깨치면 천 구절 만 구절을 일시에 깨친다.”고 하였다. 말해보라. 이는 법신일까, 조사일까? 그대들에게 삼십 방망이를 먹이리라. 설두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또 세고 또 센다. 낙숫물 지는 족족 얼어붙는다. 궁리를 많이 하여 무엇하려고?

 

 푸른 눈 달마가 셈하여도 다하지 못하리.

 -삼생육십겁(三生六十劫) 걸려도 다 셀 수 없다. 달마인들 꿈엔들 알았겠는가? 스님은 무슨 까닭에 알면서도 일부러 범하였느냐?

 

 소림(少林)에서 신광(神光) 스님에게 부촉했다고 부질없는 말들을 하더니만

 -한 사람의 헛소문에 많은 사람이 진짜인 줄로 전한다. 애시당초부터 잘못 되었다.

 

 옷을 걷어붙이고는 또다시 천축(天竺)으로 되돌아갔다고 말하네.

 -한 배를 탄 사람을 모두 속였다. 부끄러움이 적지 않군.

 

 천축은 아득하여 찾을 곳이 없는데,

 -어느 곳에 있을까? 비로소 태평하구나. 지금은 어느 곳에 있을까?

 

 간밤에 유봉(乳峰)을 건너다보면서 잠을 잤네.

 -네 눈을 멀게 하는군. 괜히 풍랑을 일으키는군. 말해보라, 이는 법신일까, 불신일까? 그대에게 삼십 방망이를 먹이리라.

 

평창

 설두스님은 꿰맨 흔적도 없는 것 (여섯으로는 알 수 없다는 말)에 대해, 훌륭히 안목을 드러내어 송으로써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운문스님은 “여섯으로는 알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설두스님은 무엇 때문에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이라 했을까? 설사 달마스님이라 할지라도 세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달마스님이 알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께쳤다고는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반드시 그 (운문스님) 의 자손이어야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본칙의 [평창]에서 말한 “한 말씀 한 구절이 상황에 딱딱 들어맞는다”고 한 것을 철저히 깨치면 “언구에 있지 않다”는 말을 알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알음알이로 이해하고 말 것이다.

 오조(五祖) 큰스님께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비천한 엉뚱한 짓하는 놈이며, ‘뜰 앞의 잣나무’는 하나, 둘, 셋, 넷, 다섯이다” 라고 하였다. 자세히 운문스님의 말을 잘 알아차리면 단박에 그러한 경계에 이를 것이다.

 “소림에서 신광(神光)스님에게 부촉했다고 부질없는 말들을 한다.”고 하였는데 이조(二祖) 스님의 처음 이름이 신광이었다. 이어서 “천축으로 되돌아갔다”고 한 것은, 달마스님을 웅이산(熊耳山) 아래에 장례를 치뤘는데, 송운(宋雲)이 서역(西域)에 사신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서령(西嶺 : 파미르 고원)에서 한쪽 신만을 들고 서천으로 되돌아가는 달마스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송운이 이를 황제에게 아뢰어 무덤을 파헤치니 한쪽 신만 남아 있었다.

 설두스님은 “실로 ‘이 일’을 어떻게 전해줄 수 있으리요, 결코 전해준 적이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옷을 걷어붙이고 천축으로 되돌아갔다고 말들을 하는군”이라고 말하였다. 말해보라, 무엇 때문에 이 국토에 6대의 조사들이 계속 이어서 전해왔었는가를. 이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모름지기 이를 알아야 비로소 작가 선지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천축은 아득하여 찾을 곳 없는데, 간밤에 유봉을 건너다보면서 잠을 잤다”고 하였다. 말해보라,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를. (원오)스님은 한 차례 친 후 말하였다. 눈이 멀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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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분은 복본(福本)에는 [평창]에만 들어 있다. [평창]과 겹치지만 여기서는 삼성본을 따라 그대로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