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마루 2016. 1. 23. 04:49

12. 긍당 언충(肯堂彦充)선사의 염송

 

 임안부(臨安府) 정자사(淨慈寺) 긍당 충(肯堂彦充)선사는 여항(餘杭) 사람이다. 만암 안(萬庵道顔)의 법제자로서 도풍이 엄정하여 당시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즉심즉불(卽心卽佛)에 대하여 송하였다.

 

황금대궐을 살며시 떠나오는 서시(西施)의 아름다움이요

옥루(玉樓)에서 사뿐사뿐 내려오는 양귀비의 교태로다

하루종일 그대와 꽃그늘에 취하노니

어딘들 풍류스럽지 않다고 싫어하리.

美如西子離金闕  嬌似楊妃下玉樓

終日與君花下醉  更嫌何處不風流

 

 조산(曹山) 끽주(喫酒) 화두를 송하였다.*

 

페르샤의 장사치가 당나라에 들어와

맨먼저 값진 보물은 숨겨두고

또다시 손 뻗어 남의 보물 욕심내나

남 속이기 어려우니 이 일을 어찌하랴.

販海波欺入大唐  先將珍寶暗埋藏

却來伸手從人覓  爭奈難瞞有當行

 

 스승 만암(萬庵)선사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부처님 자리에 앉아

부처님 발목을 부러뜨리고

동쪽 이웃집 공자도 존경하지 않고

다른 고을 찾아 예악을 배우리라.

坐佛床  斫佛脚

不敬東家孔夫子  却向他鄕習禮樂

 

 그리고는 이에 대해 염(拈)하였다.

 "진창에 들어가고 물 속에 들어갔으니, 스승이 없다고는 못하리라. 그러나 벙어리 매미가 고목을 안고 울며 머리를 돌리지 않으니, 이를 어찌하리."

 주장자로 법상을 한 차례 친 후 다시 말하였다.

 "분명히 머리를 돌리지 않는 자가 있다면 이 긍당(肯堂)이 법상에서 그대들에게 3배를 올리리라."

 지난날, 대위사(大潙寺) 불성(佛性法泰)스님이 "옛 스님의 법어를 송(頌)하고 염(拈)하는 것은 사치와 검소함을 각각 알맞게 쓰는 것과 같은 일이니, 굳이 많은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오늘날 긍당스님의 법어집을 잘 읽는 자는 스스로 이 이치를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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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예(淸銳)라는 스님이 조산스님에게 말했다. "불쌍한(孤貧) 저를 구해주십시오." 조산스님이 "예(銳) 사리, 가까이 오라!"하여 가까이 가니 이렇게 말했다. "천주(泉州) 백씨네 술 석잔을 입술에 적셔 보지도 못했구나!"

 

 

13. 산문 밖을 나서지 않다 / 보봉사(寶峰寺) 단(端)암주

 

 

 보봉사(寶峰寺) 단암주(端庵主)는 오랫동안 불조(佛照)스님을 시봉했는데 불조스님이 여자출정인연(女子出定因緣)에 대해 지은 송(頌)을 듣고 깨달은 바 있었다. 어느 날 방장실로 불조스님을 찾아가 스님의 왼쪽에서 차수하고 서 있다가 잠깐만에 나와버리니 불조스님이 앞으로 불러서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

 그러자 이번에는 스님의 오른쪽에서 차수하고 서자, 불조스님이 할을 하니 얼른 나와버렸다. 이에 불조스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암주는 매우 공손하여 마치 신분이 낮은 사람 같았다. 그가 살던 조그마한 암자에는 쌓아둔 양식은 넉넉하지 못하였으나 문 밖엔 항상 손님의 신발이 가득하였고, 동문(同門)인 권고운(權孤雲) 인철우(印鐵禹) 등이 서신을 보내 불렀으나 끝내 산문 밖을 나서지 않았다.

 

 

14. 목동으로 출가하여 / 월림 사관(月林師觀)선사

 

 안길주(安吉州) 오회사(烏回寺) 월림 관(月林師觀)선사는 성품이 순수하고 진실하여 꾸밈이 없었다. 복주(福州) 후관(候官) 황씨(黃氏)의 아들로서 처음엔 목동이었는데 소를 채찍질하다가 깨달은 바 있어 파, 마늘 등과 고기를 먹지 않았다. 설봉사(雪峰寺) 충도자(忠道者)에게 귀의하여 출가하였고, 형남(荆南) 이성사(二聖寺)의 계준(戒準)스님에게 계를 받았으며 풍주(澧州) 증노납(證老衲 : 祖證)에게 법을 얻었다.

 처음 방장실에 갔을 때 증스님이 말하였다.

 "만일 물건을 굴릴 수 있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자, 부처님 앞의 향대(香臺)는 어떻게 굴리겠는가?" 월림선사는 "맷돌 맞듯 방아공이 맞듯 착착 맞아 돌아갑니다"했다가 꾸지람만 듣고 그곳을 나왔다. 그 후 다시 스님을 모시고 요주(饒州) 천복사(薦福寺)에서 지내면서 '운문화타(雲門話墮)' 공안을 참구하였다. 그 후 10년이 지난 어느 날 연꽃 핀 연못가를 홀로 거닐면서, "어떤 점이 그 스님이 말에 떨어졌다는 곳일까?"라고 뇌이다가 갑자기 도를 통하게 되었다.

 당시 도독(塗毒)스님은 경산사(徑山寺)에, 둔암(庵)스님은 화장사(華藏寺)에 있었는데, 서신을 보내 스님을 초청하여 함께 설법을 하였다.

 동산(洞山守初)스님의 '마삼근(麻三斤)' 화두에 대해 송하였다.

 

입술소리[脣音]는 삐 · 빤 · 삔 · 빠-오 · 뻐

혀소리[舌音]는 땅 · 떠 · 띠 · 떠 -우 · 띵

하인 소옥(小玉)이를 자주 부름은 딴 일 아니라

단랑(檀郞)에게 목소리를 알려주고파서

脣上碧斑賓豹愽  舌頭當的帝都丁

頻呼小玉元無事  只要檀郞認得聲

 

 가태(嘉泰 : 1201~1204) 연간에 오문(吳門) 성인사(聖因寺)에 주지하다가 승천(承天) 만수사(萬壽寺)로 옮겨 가니 많은 학인이 모여들었다. 오회사(烏回寺)에 살 때부터 병세가 심해갔으나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여전히 법고(法鼓)를 치고 설법하였다. 방장실로 들어가면서 "계수나무에 꽃이 활짝 필 때면 나는 떠날 것이다" 하고 문도들에게 여름 결제를 서두르게 하였는데, 이윽고 계수나무에 꽃이 활짝 핀 가정(嘉定) 정축(1217)년 4월 13일이었다. 부처님 전에 3배하고 방장실에 들어와 두 차례 법고를 울려 대중에게 법회를 알리고 대중이 모두 제자리에 앉자 주장자를 뽑아들고 말하였다.

 "내게 주장자가 있다면 주장자를 주고 내게 주장자가 없다면 주장자를 빼앗는다. 이 대중 속에 이 뜻을 아는 사람이 없는가? 있으면 나와서 일러 보라."

 대중이 대답이 없자, 주장자를 내던지고 정좌한 수 게송을 쓰고 입적하시니, 향년 75세이며 법랍은 51세이다. 스님께서 열반하신 후 무수한 사리가 나왔다.

 아! 일세의 추앙을 한몸에 받은 종사(宗師)로서 죽고 삶에 흐르는 구름처럼, 나는 새처럼 조금치라도 매임이 없었다. 오회사에서 입적하신 여름에 계수나무에 꽃이 활짝 피어 자신의 예언과 맞았으니 이로써 더욱더 스님의 뛰어나심과 명백한 상서의 증험을 볼수 있다. 실로 불법을 짊어지고 전일하게 정진한 임 때문이 아니겠는가?

 

 

15. 조원 도생(曹源道生)선사의 대중법문

 

 조원 생(曹源道生)선사가 신주(信州) 귀봉사(龜峰寺)에 살 때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치고 북쳐서 여러분을 위해 상상기연(上上機緣)을 마련해주었다. 만일 믿는다면 모래알처럼 많은 부처가 그대의 발 아래에서 뛰겠지만 믿지 못하면 내가 주워서 먹어 치울것이다."

 그리고는 법상을 치고 내려오니 이는 참으로 황룡(黃龍)스님께서 말하였던, "몇 대를 이어 내려온 갑부는 돈 한푼 헛되이 쓰지 않는다"는 가르침과 같은 말이다.

 

 

16. 송원 숭악(松源崇岳)선사의 깨침 

 

 송원 악(松源崇岳)선사가 처음 민주(閩州) 건원사(乾元寺)의 목암(木庵)스님을 찾아뵙고 오랫동안 공부하다가 하직인사를 드리니 목암스님이 '유구무구(有句無句)가 등나무 넝쿨이 나무에 기대 있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를 거론하였다. 그러자 송원스님이 대답하였다.

 "싹둑 잘라버릴 것입니다."

 "낭야(琅邪)스님은 이에 대해 '한 무더기 좋은 땔감이로다'라고 하였다."

 "화살 위에 화살을 얹는 격입니다."

 "그대의 말을 내 따를 수야 없지만 그렇게 공부가 안되가지고는 뒷날 손에 불자를 잡고 설법한다 해도 사람을 가르칠 수 없고 사람을 간파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사람을 가르치는 일은 온갖 번뇌에 매인 범부를 단숨에 성인의 경지로 뛰어들어가게 하는 것이니 진실로 어려운 일이겠지만, 사람을 간파한다는 것은 얼굴만 스치면 말한마디 안해도 그의 골수까지 알 수 있으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이에 목암스님은 손을 들어 저지하며 말하였다.

 "그만! 그만! 그대에게 명백히 말해 주리라. 입을 벌려 말한다는 것은 혓바닥에 있는 것이 아니니, 그대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그 이듬해 송원스님은 구주(衢州) 서산사(西山寺)에서 밀암스님을 찾아뵙고 묻는 족족 대답하였는데, 밀암스님이 웃으면서 "황양선(黃楊禪)*이로다"하였다.

 송원스님은 뒷날 경산에서 밀암스님이 곁에 있는 스님에게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는 문득 크게 깨치고서 말하였다.

 "오늘에야 비로소 지난날 목암(木庵)스님이 '입을 벌려 말하는 것은 혓바닥에 있는 것이 아니다'하신 말씀의 뜻을 알았노라."

 송원스님은 처주(處州) 용천 오씨(龍泉吳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소대(蘇臺) 징조사(澄照寺)에서 개법(開法)하였고, 경원(慶元 : 1195~1200) 연간에는 영종(寧宗)의 칙명으로 영은사(靈隱寺)의 주지가 되었다. 그의 가풍은 몹시 엄하였으므로 그 문하에서 큰 그릇을 이루지 못한 자는 거의 없었다.

 아! 송원(松源) 파암(破庵) 조원(曹源) 만암(萬庵)스님이야말로 중봉(中峰 : 밀암스님의 탑소)의 도를 일으킨 분들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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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양(黃楊)은 회양목. 잘 자라나지 않는 생태를 가졌으므로 융통성 없고 답답한 선수행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17. 지옹 상(止翁祥)선사의 대중법문

 

 대매사(大梅寺) 지옹 상(止翁祥)선사는 무용(無用淨全)스님의 법제자이다. 대중에게 다음과 같은 설법을 하였다.

 "서암(瑞岩)스님의 설법은 자질구레하지 않아서 율극봉 금강권을 세차게 휘두른다. 그랬더니 당장에 누군가가 이를 받아 삼켜버리고 또다시 정수리 위의 철추를 씹는다."

 이 말은 마치 그의 인품과 같이 진솔하다. 또한 산사를 다스리는 일도 남보다 훨씬 규모있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