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애만록 上 29~33.
29. 단하(丹霞)스님 찬과 스스로 지은 묘지문 / 귤주 보담(橘州寶曇)선사
귤주 담(橘州寶曇)스님의 자(字)는 소운(少雲)이며 가정부(嘉定府) 사람이다. 협주(峽州)에서 나와 명주(明州) 장석사(仗錫寺)에 주지하면서 틈만 있으면 불조의 기연을 밝힐 수 있는 논저를 저술하여 이를 「대광명장(大光明藏)」이라 이름하였다. 그 문장의 흐름이 웅장하고 막힘이 없었으나 애석하게도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입적하였다. 그 중 단하(丹霞天然)스님을 찬(贊)한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대웅전 앞에서 풀을 깎다 삭발을 하고, 성승의 목에 올라타고, 날씨가 차니 목불을 가지고 불을 지폈다.* 이 세 가지 일을 하나 하나 생각해 보니, 다른 사람이라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치 형산(衡山)을 덮고 있던 구름이 활짝 걷히면 웅장한 산세가 드러나듯 스스로 하려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때로는 남의 눈치를 보며 두려워한 나머지 그가 지켜야 할 바를 잃어버리는 자가 있으니 원주(院主)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남양(南陽)국사의 시자는 그저 지나쳐 가게 놓아두었다가 곧바로 남양국사를 사로잡으니 이른바 활을 당기려거든 강궁(强弓)을 당기라는 말이 바로 이러한 방법이다. 그러나 병들어 신음하는 말세중생을 가엾게 여겨 옛사람의 특효 처방에 덜고 보태서 훌륭한 법약(法藥)을 조제하려는 자는 마땅히 먼저 원기를 회복시킬 수 있는 진액을 써야 몸이 거뜬해지는 복을 찾게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불지(佛智) 노스님이 우연히 이 책갈피를 펼쳐 보다가' 요즘 학인들이야말로 원기를 되찾을 수 있는 이 진액을 복용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귤주스님은 스스로 묘지문을 지었는데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처음에는 능엄경과 원각경과 기신론을 들었으나 그것을 버리고 떠나 성도(成都) 소각사(昭覺寺)의 철암(徹庵)스님과 백수사(白水寺)의 이암(∴庵)스님에게 귀의하였다. 다시 걸망을 꾸려 들고 남쪽으로 내려와 먼저 경산(徑山) 육왕사(育王寺)에서 대혜(大慧)스님을 뵈었고 그 후 동림사(東林寺)의 만암(萬庵)스님, 장산(蔣山)의 응암(應庵)스님을 찾아뵈었으며, 천신만고 끝에야 비로소 평생의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이 말로 살펴보면 그의 일생은 고난으로 점철된 생애로서 쉽사리 도를 깨우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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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하스님이 석두스님을 찾아가 3년을 공양간에서 불을 땠다. 하루는 불당 앞에 풀깎는 운력을 하는데, 다른 사미들이 풀을 깎는 동안 단하스님은 대야에다 물을 가득 떠다가 머리를 씻고 석두스님 앞에 길게 꿇어 앉으니 석두스님은 웃으면서 비로소 삭발해 주었다. 그리고는 계법을 설하려 하는데 단하스님은 귀를 막고 나가버렸다.
단하스님이 석두스님에게 있다가 마조스님을 찾아뵈러 갔다. 법당에 들어가자마자 성승(불상, 보살상)의 목에 타고 앉으니 대중들이 마조스님에게 일렀다. 마조스님이 가서 보고는 "내 아들, 천연!"하고 부르니 단하스님은 절을 올리며 "이름을 지어주셔서 고맙습니다"하였다.
단하스님이 한번은 혜림사(慧林寺)에 갔는데 날씨가 추워졌다. 스님은 법당에서 목불상을 갖다 불을 땠다. 원주가 나와서, 어떻게 우리 부처님을 불 땔 수가 있느냐고 하자 단하스님은 주장자로 재를 들춰보면서 사리를 찾는 중이가고 했다. 목불에 무슨 사리가 있느냐고 하자 사리가 없다면 무슨 부처냐고 했다. 나중에 그 원주는 눈썹이 다 빠졌다.
30. 무제 요파(無際了派)선사의 상당법문과 게송
경원부(慶元府) 천동사(天童寺)의 무제 파(無際了派)선사는 불조(佛照)스님의 법제자로, 건안 장씨(建安張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경원(慶元) 4년(1198) 상주(常州) 보안사(保安寺)에서 개당법회를 하였는데 상당하여 설법하였다.
"말을 하면 공덕이 없어지지만 잘못해놓고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잘못이다. 이제부터는 제각기 자신의 허물만을 반성하고 남의 허물을 꾸짖지 말라. 이 주장자가 그냥 있지 않을 것이니, 철저히 살펴봐야겠다."
주장자를 내리치면서 말하였다.
"내, 내괘(內卦 : 六爻 중 아래 三爻를 말한다)는 이루었으나, 다시 외상(外象 : 六爻 중 위 三爻를 말한다)을 구해야 하겠다."
다시 주장자를 세 차례 내려 치고서 말하였다.
"풍천소축(風天小蓄)이 택풍대과(澤風大過)로 변하였구나."*
다시 주장자를 한 차례 내려 친 후 법상에서 내려왔다.
처음 밀암(密庵)스님의 법석(法席)에 갔을 때 마침 종이로 오려 만든 탑이 있었다. 이에 밀암스님은 장난삼아 게송을 짓도록 하니 무제스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었다.
앉은 자리에서 칼을 놀려 종이를 재단하니
7층 부도 이리저리 손따라 쌓아지네
가소롭다. 말 많은 탐원(耽源) 늙은이
소상강 남녘 청담 북쪽에 시체를 뒹굴리도다.
當陽拈起剪刀裁 七級浮圖應手回
堪笑耽源多口老 湘南潭北露尸骸
이 게송을 보고 대중이 모두 감복하였다.
뱃사공 선자(船子 : 德誠)스님을 찬하는 글을 지었다.
세치 거리에 낚싯바늘 하나의 노에
수많은 털구멍이 섬짓섬짓 솟구친다
두 손으로 친히 건네주시나
요는 그 스스로 머리 끄덕여야 하리.
三寸離鉤摵一橈 百千毛竅冷(風+曳)(風+曳)
雖然兩手親分付 要在渠儂自點頭
또한 영조녀(靈照女 : 방거사의 딸)를 찬하는 글을 지었다.
늙은 아비 모든 재산 잃은 후에
남겨준 건 길거리에 대조리 장수
가난의 고통을 자식에게 물려준 것 아니니
이 마음을 알아줄 이 몇이나 될까.
老爺喪盡生涯後 累汝沿街賣笊篱
不是家貧兒子苦 此心能有幾人知
이는 총림에서 유명한 글이다.
가정(嘉定) 연간에 천동사(天童寺)에서 머물던 중 병세를 보이더니 대중과 작별을 나누고 법상에 올라가 설법하였다.
"시방세계는 벽이 없고 사면에는 문도 없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고 말끔하여 잡을 데가 없도다."
할을 한번 하고는 이어서 말하였다.
몇 번 팔았다가 다시 샀던가
송죽에 스며드는 맑은 바람이 사랑스럽도다.
幾度賣來還自買 爲憐松竹引淸風
법상에서 내려와 방장실로 들어가 단정히 앉으신 후 잠자는 듯 입적하시니, 향년 76세이며 법랍은 52세이다. 불과(佛果)스님 이후 대혜(大慧)스님은 마조(馬祖)스님처럼 많은 문도를 맞이하였는데 이제는 동암(東庵 : 德光)스님 문하가 가장 융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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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괘 중 풍천소축(風天小蓄)은 하늘이 아래 있고 바람이 위에 있는, 조금 저축하여 아직 움직이지 않는 상, 택풍대과(象, 澤風大過)는 바람이 아래 있고 못이 위에 있는, 너무나 성대한 상(象).
31. 나암 조(螺庵肇)선사의 조사찬과 영정에 붙인 글
나암 조(螺庵肇)선사가 설봉사(雪峯寺)에 있을 때, 어느날 조사(祖師 : 義存)를 찬하였다.
덕산스님 몽둥이 아래 통 밑이 쑥 빠진 듯하니
초파리의 눈알 속엔 넓은 천지 담겨있네
동남지방 제일봉에 눌러 앉으니
수많은 여울물이 시끄럽게 역류하네.
德山棒下桶底脫 蟭螟眼裏乾坤濶
坐斷東南第一峰 百川倒流鬧聒聒
또한 그의 영정에 스스로 글을 지었다.
어둔 절벽에 새 날지 않고 뱃전엔 눈내리는데
연기서린 대숲에는 원숭이 밤새 운다
재주없는 산사람을 이상히 생각마오
소타고 강물 속의 하늘을 밟으니.
陰崖鳥滅槎頭雪 午夜猿啼竹外煙
莫怪住山無伎倆 騎牛踏破水中天
나는 기유년(1249) 여름, 석옹 옥(石翁玉)화상의 법회에서 원로스님들로부터 나암스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겨우 이 찬시(贊詩) 두 수 밖에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32. 답변을 시험해 보려는 태도 / 금화사(金華寺) 원(元)수좌
금화사(金華寺)의 원(元)수좌는 강직하고 준엄한 성품을 지녔다. 총림에서는 그를 오랫동안 참선한 스님이라고 하였으나 백운사(白雲寺) 등암(等庵)스님을 뵙고서야 처음으로 큰 일을 깨치게 되었다. 한 스님이 그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마음이 부처다."
"무엇이 도입니까?" "평상심(平常心)이 도이다."
"달마스님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 "조주(趙州)스님께서 일렀느니라."
이 말을 듣고 모두 웃었다. 그 후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남두성은 일곱이고 북두성은 여덟이다."
"무엇이 도입니까?" "센 불로 삼씨 기름을 달이는 것이다."
"달마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 "거북이 등에 터럭이 몇 발이나 되는구나."
이 말을 전해 들은 자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슬프다. 이런 식으로 답변을 시험해 보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매몰시킬 뿐 아니라 선배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일이다.
33. 일심발원, 용맹정진 / 몽암 총(蒙庵聰)선사
몽암 총(蒙庵聰)선사는 복주(福州)의 장락 주씨(長樂朱氏)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조금 자라서는 남에게 대들어 모욕을 주거나 너무 가깝게 지내거나 하지 않았다. 19세에 신주(信州) 귀봉사(龜峰寺)의 광 회암(光晦庵)스님에게 귀의하였고 27세에 도첩을 얻자 회암스님에게, 대중에 섞여 오로지 자신의 생사대사를 깨닫는데 전념하고 여러 가지 소임에서 벗어나게 해주기를 바라니 회암스님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너는 참선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불법이란 일상생활 모든 작용 가운데 있는 것인데 어찌하여 일 때문에 빼앗길까 두려워하는가?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한달 안에 깨닫지 못한다면 그 죄를 용서하지 않으리라."
이에 물러나와 "불법이란 평상시 모든 작용 가운데 있다"는 구절을 창문 위에 써붙여놓고 옆구리를 자리에 붙이지 않은 채 보름을 지냈다. 회암스님이 수시로 그의 행동을 엿보니, 그의 결심은 매우 맹렬하였다. 이에 회암스님은 그가 만일 깨치지 못하면 미쳐버릴까봐 속으로 걱정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콧물을 훌쩍거리며 우는 소리가 나기에 그는 마음속으로 "아! 이 아이를 버렸구나!"하고 그 연유를 물어보니 속가의 부친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랬다는 것이다. 회암스님은 마음 속으로 "이때가 일추(一槌)를 가하기에 좋은 기회다" 하고 몽암스님을 불러 물었다.
"무슨 일이 생겼느냐? 말해 보아라."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멱살을 움켜쥐고 세차게 뺨을 때리면서 말하였다.
"수많은 무명번뇌가 어느 곳에서 오느냐?"
그리고 또 한차례 따귀를 후려치니 그 자리에서 의심이 얼음녹듯 풀리게 되었다. 이에 몽암스님은 예의를 갖추어 사례하고 소리 높여 게송을 읊어 바쳤다.
알았다. 알았다. 철저히 알았다
괜스레 맨발 벗고 동분서주했었구나
창공의 둥근 달을 밟으니
팔만사천문이 밝기도 하다.
了了了徹底了 無端赤脚東西走
踏破晴空月一輪 八萬四千門洞曉
그러나 회암스님은 또다시 소리쳤다.
"이 둔한 놈아, 몽둥이 30대는 맞아야겠다."
"저도 스님에게 30대를 치겠습니다."
"보자하니 애꾸눈이 감히 법통을 어지럽히는구나."
이 뒤로 그의 기봉(機鋒)이 준엄하고 민첩하여 감히 당할 사람이 없었다.
회암스님이 입적하면서 몽암스님에게 법의와 게송을 전하였다.
다시 찾아온 독종은, 원래 총시자로다
우리 종법이 너에게서 망하는 것을 어찌하기 어렵구나.
再來毒種元聰侍者 尀耐吾宗滅汝邊也
이어서 말하였다.
"뒷날 노승을 저버리지 말라."
"지금도 기대에 어긋난 바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30년 후에 이 이야기가 크게 퍼질 것이다."
"통곡에 원통함과 괴로움을 더하여 주시렵니까?"
귀봉사의 주지가 되어 회암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그 후 여섯 차례 자리를 옮겼고 황제의 명을 받고 경산사(徑山寺)의 주지가 된 지 14년 만에 입적하였다.
아! 몽암스님은 회암스님의 문하에서 그의 뒤를 빛낸 사람이다. 이는 마치 조과(鳥窠)스님이 회통(會通)시자를 만난 것과 같아서 세번씩 아홉번씩 찾아가는 수고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스승과 제자가 만나는 인연은 숨고 드러남이 하나라 하지만 마치 허공에 도장을 찍어도 아무런 흔적이 없는 듯하니, 이는 굳은 의지로 용맹정진을 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발원한 증험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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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봉스님이 동산스님을 뵙기 위해 여러 번 찾아갔던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