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마루 2016. 2. 6. 05:39

고애만록

 

 

1. 토굴을 떠나지 않는 이유 / 토낭산(土囊山) 조현(祖賢)수좌

 

 조현(祖賢)수좌는 무주(撫州) 금계(金溪) 사람으로 인품이 고매하였다. 치둔(癡鈍)스님에게 법을 얻고 오랫동안 민현(閩縣)의 남쪽지방에 머물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의강(義江)까지 이르렀으나 느낀 바 있어 다시 되돌아와 도첩(度牒)을 불사르고 경가(竟嘉)스님과 함께 토굴을 마련하여 포주(莆州) 토낭산(土囊山)에 은거하였다. 경가스님이 복주(福州)자사 장생(長生)의 부름을 받도 떠나가자 곧 황산(黃山) 조당사(篠塘寺)로 옮겨 손수 토굴을 마련하였다. 겨우 몸 하나 들어갈 정도였지만 낙차암(樂此庵)이라 이름하니, 멀고 가까이 있는 대중들이 이 소식을 듣고 음식을 공양하기 시작하였다. 20여 년을 하루처럼 지내니, 그 고을 군수 증용호(曾用虎)가 스님의 풍모를 고상히 여겨 예의를 갖추고 토낭산 자수사(慈壽寺)의 주지로 초청하였으나 가지 않았다. 스님은 '십불거(十不去)'라는 글을 지어 자신의 뜻을 나타낸 적이 있는데, 맨 끝 장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열번째 떠나지 않는 이유는

여기가 바로 제불의 국토이기 때문이니

설령, 천자께서 조칙을 내린다 해도

일 만들 것 없다고 말해주리라.

十不去止此  便爲諸佛土

假饒天子詔書來  向道不須生事故

 

 복제 진복(復齊陳宓)이 '지경(持敬)'이라는 두 글자의 뜻을 그에게 물으니, "경(敬),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무엇 때문에 가질 지(持)를 더 쓰는가?"라고 답하였다.

 스님께서 입적하자, 옥당 임희일(玉堂 林希逸)이 제문을 올렸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육경(六經) 이외에 이처럼 좋은 벗을 얻었노라. 내 요사이 방(方) · 유(劉) 등과 함께 석실(石室)에 놀다가 늦게사 스님의 옛 집을 찾아가니 달빛이 맑게 흐르고 솔바람 소리 상쾌하여 어렴풋이나마 스님의 고매한 기상과 빼어난 운치를 그려볼 수 있었다."

 

 

2. 철편 소(鐵鞭韶)선사의 개당법문

 

 철편 소(鐵鞭韶)선사는 정직하고 성실하여 남의 비밀을 엿보는 일이 없었다. 그는 복주 면정(緜亭) 사람이다. 온릉(溫陵) 광효사(光孝寺)에 주지해 달라는 청을 받고 가서 개당법회를 연 자리에서 임금을 위해 축원하고 향을 사른뒤 말하였다.

 "무엇을 제일의제(第一義諦)라 하는가? 여기 모여있는 대중 가운데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자는 없는가? 있다면 앞으로 나와 말해 보아라."

 때마침 한 스님이 앞으로 나와 물었다.

 "이마에는 마혜수라의 눈이 툭 솟았습니다."

 스님은 주장자를 들어 탁자를 한 번 치고서 말하였다.

 "그만두어라. 오늘 개당법회는 보통 불사와 비할 바 아니다. 설령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문답한다 해도 쇠줄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 뿐, 그릇에 담긴 물이 새지 않듯 해결의 실마리가 틔이지 않는다. 다만 밥 먹고 죽 먹을 기운이나 북돋아 줄 뿐, 자기 문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물음은 답할 수 있는 곳에 있지 않고 대답은 묻는 곳에 있지 않고 하는 것이다. 불쑥불쑥 문답을 하는 것이 마치 마른하늘에 번개치듯 하여 눈뜨고 봐줄 수 없는데, 게다가 어떻게 말이나 글로 종지를 밝힐 수 있겠는가. 이는 마치 나무에거 물고기를 구하고 나무둥치를 세워놓고 토끼가 부딪혀 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아서, 우리 종지에는 말이나 글이 없고 남에게 줄 그 어떤 법도 없음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여기서 철저히 깨달으면 성상과 부처의 은혜를 일시에 갚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도 하지 않는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되겠지만."

 다시 주장자로 탁자를 치고 법좌에서 내려왔다.

 스님의 「팔회록(八會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니, 오성(五聲 : 金木水火土의 소리)을 살펴 팔음(八音 : 金石絲竹匏土革木의 여덟 악기, 또는 그 소리)을 알고 팔음을 살펴 음악을 알 것이다.

 

 

3. 벼슬도 마다하고 삭발을 / 각암 조찬부(覺庵趙贊府)

 

 각암(覺庵) 조찬부(趙贊府)는 불서를 읽고 느낀 바 있어 벼슬을 그만두고 취미(翠微)스님에게 귀의하여 유각(惟覺)이라는 법명을 얻고 갓을 찢어버린 후 삭발하고 비구계를 받은 후 산사에 살았다. 그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기력이 쇠진하여 말조차 나오지 않으나

득의만만 할 때면 어깨가 가뿐하다

세속도 벼슬도 버리고 욕심마저 버렸으니

사람으로 천명으로 또다시 하늘의 뜻을 따라

배고프면 기장 밥을 짓고

피곤하면 옷을 덮고 낮잠을 즐기노라

산새의 울음소리에 깜짝 놀라 꿈 깨보니

오늘저녁이 어느 해인 줄 알지 못하네.

氣衰力憊不堪言  得意濃時便息肩

棄俗棄官兼棄欲  由人由命更由天

飢來爛煑黃粮飯  困後和衣白日眼

山鳥一聲驚夢覺  不知今夕시하년

 

 가히 고요한 사람이 정숙함으로써 길(吉)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이 어지럽지 않기 때문이라(주역의 괘사) 하겠다.

 

 

4. 파암 조선(破庵祖先)선사의 참선

 

 파암 선(破庵祖先)선사가 한번은 말하였다.

 "요즘 형제들은 공부를 할 때 본성(本性)을 찾지않기 때문에 효험을 보지 못한다. 내가 행각할 당시 밀암(密庵)스님이 구주(衢州) 오거산(烏巨山)에 계셨는데, 나는 그곳에서 지객(知客) 소임을 맡아보다가 사임하고 쌍림사(雙林寺)를 찾아가 수암(水庵)스님을 뵈었다.

 쌍림사에는 두 개의 회랑이 있었는데 나는 밤이면 밤마다 잠을 자지 않고 동쪽 회랑에서 서쪽 회랑으로 왔다갔다 하며 화두를 들고 공부하였다. 이와 같이 두세 번을 돌고 승당으로 들어와 다시 하나에만 골똘하니, 상하에 있는 형제 모두가 얼어 터진 겨울 참외처럼 보였다. 이런 모습을 보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깨닫지 못한다면 나도 저 승당의 얼어 터진 겨울 참외같을 것이니 이러고서도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라고. 나는 그 당시, 웬만큼은 공부가 되어서 선실에서 입을 열 수 있을 정도였으나 미세한 번뇌[命根]까지는 끊지 못하여 마음이 결코 평온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몸을 일으켜 평강(平江)의 만수사(萬壽寺)를 찾아가 승당 앞에서 쉬고 있었다. 당시 만수사에 계시던 등지암(燈止庵)스님은 감쪽같은 솜씨로 학인을 다루는 노장이었는데, 공양을 마치고 북이 울리자 스님이 선실로 들어갔다. 나는 그때 마음 속으로 그를 속이고 들어가지 않을 심산이었으나 동행한 도반이 이미 선실로 들어가면서 내게 들어갔었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동행을 속이고 들어갔었노라고 하자니, 나와 동행인데 내가 그를 속이면 내 마음이 편안하지 못할 뿐 아니라, 점차 사천(四川)으로 돌아가자고 윽박지르게 될까봐 마음이 초조하고 번민스러웠다. 그리하여 승당(僧堂) 뒤편으로 들어갔는데 머리를 들어보니 순간 '조당(照堂)'이라는 두 글자가 눈앞에 와 닿았다. 그러자 이제껏 품어왔던 의심이 단박에 풀렸다. 유유자적하게 장산(蔣山)으로 올라가 다시 밀암스님을 뵈니 서로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게 없었다."

 파암스님의 참선은 마치 한신(韓信)의 적은 군사가 배 위에서 필사의 각오로 딴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일이다.

 

 

5. 마조대사의 일면월면(日面月面)에 붙인 게송 / 수암 서(秀巖瑞)선사

 

 수암 서(秀巖瑞)선사가 상당하여 마조(馬祖)대사의 일면월면(日面月面)*에 대해 후일 수암(水庵師一)스님이 붙인 게송을 거론하였다.

 

일면월면이여

되놈이 오면 되놈을, 중국인이 오면 중국인을 비치는구나

되놈도 중국인도 찾아오지 않으면

한조각 맑은 빛뿐인 것을.

日面月面  胡來漢現

胡漢不來  淸光一片

 

 여기에 수암(秀巖)스님이 염(拈)하면서 마조대사를 뵈옵지는 못했지만, 나도 게송을 짓는다 하였다.

 

일면월면이여

벽돌조각 기왓조각이로다

물병을 발로 걷어차 뒤엎으니

대문짝이 흔들거리는구나.

日面月面  磚頭瓦片

踢倒淨缾  撼動門扇

 

 또 "노스님께서 한여름 결제 동안 다른 스님과 말하지 않았다"는 화두를 들어 염하였다.

 "이 중이야말로 밥통 속에서 굶어죽을 놈이로다. 노스님이 무슨 일이 그리도 급하길래 이러한 견해를 갖게 되었을까? 그를 불러오라. 한 차례 매질을 한 후 산문 밖으로 내쫓으리라.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가? 사람을 위하려면 철저히 해야 하고 사람을 죽이려거든 피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아! 졸암(拙庵)스님을 위하여 염송한 말은 목암(木庵)스님에게서 들을 수 있으니, 그 말은 총림에 남아 있고 그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나 수암스님의 진면목은, 보려고 하면 바다가 가로막혀 있는 듯 아득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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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조스님이 입멸하기 전날 밤에 원주가 물었다. "스님께서는 사대(四大)가 평안치 못하셨는데 요즘은 어떠십니까?" 스님이 대답했다. "일면불월면불(日面佛月面佛)이니라."

 

 

6. 경산 겸(徑山謙)수좌가 주자(朱子)에게 보낸 편지

 

 강서(江西)의 운와 영(雲卧曉瑩) 암주는 말하였다.

 "경산(徑山)의 겸(謙)수좌가 건양(建陽)으로 돌아와 선주산(仙洲山)에 움막을 짓고 사니, 그의 명성을 전해들은 자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그에게 귀의하였다. 이를테면 시랑 증천유(侍郞 曾天游), 사인 여거인(舍人 呂居仁), 보학 유언수(寶學 劉彦修), 제형 주원회(提刑 朱元晦 : 朱熹) 등이 서신으로 도를 묻기도 하고 때로는 산중으로 그를 찾아오기도 하였다. 겸수좌가 주원회에게 보낸 답서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하루 스물네 시간 중 일이 있을 때는 일을 보고 일이 없을 때는 머리를 돌이켜 오로지 일념으로,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하는 물음에 조주(趙州)스님이 '없다'고 대답한 화두를 들으십시오. 이 화두만을 붙들고 있되, 헤아리지도 말고 천착하지도 말며, 지견을 내지도 말고 억지로 알아차릴려고 하지도 마십시오. 마치 눈감고 황하수를 건너뛸 적에 뛰어넘을 수 있을까, 없을까를 묻지 않고 힘을 다해 한 번에 뛰어넘는 것처럼. 참으로 한번에 뛰어넘기만 하면 백가지 천가지 일을 마칠 수 있습니다. 아직 뛰어넘지 못했다면 오로지 뛰어넘는 일만을 생각할 뿐, 잘 잘못을 논하지도 말고 위태로움을 아랑곳하지도 말고 용맹스럽게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여기서는 머뭇거리고 생각해서는 안되니, 만일 머뭇거리다가 생각이 일어나면 영판 멀어집니다.

 

 겸수좌는 일찍이 보학 유언수의 청에 따라 건양의 개선사(開善寺)에 주지하였으며 그 전엔 운와(雲卧)스님과 함께 가장 오랫동안 대혜(大慧)스님을 시봉하였다. 유삭재(劉朔齋)의 말에 의하면, 주자(朱子)가 처음 이연평(李延平)에게 도를 묻던 당시에는 책상자 속에 오직 「맹자」한 질과 「대혜어록(大慧語錄)」 한 권만을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