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애만록 中 37~43.
37. 대천 보제(大川普濟)선사의 게송
대천 제(大川普濟)선사는 불법으로 자신의 사명을 삼았고 절개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사명(四明) 보타사(寶陀寺)에 있을 때, 세 구절의 법어를 남겼다.
보타의 한 길은
오고 또 오고 가고 또 가나니
가파르고 험한 곳에 부딪히면
무수한 풍파가 이네.
寶陀一路 來來去去
撞着聱頭 風波無數
보타의 한 깊은 도는
팔을 끌고 주먹을 움켜쥐어
콧구멍을 없애니
아이고 아이고!
寶陀一玄 掣臂揎拳
打失鼻孔 蒼天蒼天
보타의 오묘한 도는
아무도 거기에 이른 이 없도다
그저 밥먹고 옷입고
똥누고 오줌싸는 일이로다.
寶陀一妙 無人能到
喫飯着衣 阿屎放尿
냉천사(冷泉寺)의 주지로 있으면서 입적할 때에 부도탑을 세우지 말고 뼛가루를 뿌려 달라고 유언하고 게송을 읊었다.
지수화풍을 옛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
차갑게 식은 잿더미 속에 사리가 없으리니
장강의 흰 물결 속에 쓸어 넣어다오
이는 천고만고에 최상의 뜻이리.
地水火風先佛記 冷灰堆裏無舍利
掃向長江白浪中 千古萬古第一義
스님은 참으로 일대 종사의 모범으로서 간동(澗東 : 浙翁)의 법을 일으킨 분이다.
38. 산음 청(山陰淸)수좌의 산초나무 송(頌)
산음(山陰)의 청(淸)수좌는 무용(無用)스님에게 심법을 전수받아 산초나무송[椒頌]을 지었다.
연기 머금고 이슬맺힌 채 가을을 겪고 나니
알알이 붉은 열매 그 맛도 아름다워
눈알이 튀쳐나올 듯 함박웃음 짓노라니
이번에는 까마득히 옛 가지를 잊었구려.
含煙帶露已經秋 顒顒通紅氣味周
突出眼睛開口笑 這回不戀舊枝頭
이 시는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읊조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시가 청좌수의 작품인 줄 모르고서 무용스님의 작품이라 기재하고 있으니 잘못된 일이다.
39. 몽당 승(夢堂升)선사의 염고(拈古)
몽당 승(夢堂 升)선사는 설두스님이 '주(主)와 객(客)을 세우는 것은 멀쩡한 살에 긁어 부스럼을 내는 일이요, 옛것과 이제를 들먹이는 것은 모래에 흙을 뿌리는 일이다. 그대로 아무 일 없다면 그야말로 구멍없는 철추(鐵鎚)이고, 따로 기관(機關)을 두면 무간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신 설법을 들어 염(拈)하였다.
"이런 놈은 승속(僧俗)의 눈을 다 갖추어야 하리라. 활구(活句) 아래서 밝히면 여러 불조에게 스승이 될 것이며 사구(死句) 아래서 밝힌다면 자신도 구제하지 못할 것이다."
이어서 말하였다.
"설두의 이러한 설법은 활구(活句)인가, 사구(死句)인가. 설두가 지옥에서 나온 후에 너희들에게 말해 주리라."
또 말하였다.
"달마대사께서 대중법문에서 제각기 소견을 말하게 하니 어린아이들이 투백초(鬪百草) 놀이하듯하다. 사방으로 흩어져 진귀한 풀을 찾다가 황혼이 되어 놀이를 마치고 돌아갈 때면 어지럽혀진 것은 누구에게 쓸도록 하겠는가?"
스님이 평소 하신 법문은 인간 중에는 주공 · 공자와 같고 금수 중에는 용과 봉황 같았다.
노년에는 문을 닫고 사람들과 만나주지 않았으므로 납자들이 그를 만나는 것은 과거에 급제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지난날 운개 지(雲蓋守智)스님은 참선하는 스님들이 편한 것만 찾으면 도심이 깊지 못하다고 미워하여 찾아오는 사람이 있어도 머리를 흔들고 거절하였다. 그러다가 입실을 허용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보니 선방에 사람이 가득하였다는데 몽당스님도 그러한 일이 있었다.
40. 파암(破庵)노스님의 말씀 / 석전 법훈(石田法薰)선사
석전 훈(石田法薰)선사가 파암(破庵)노스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선승이 선방에서 하는 법어는 모두가 지식과 견해로써 하는 말이니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는가. 말 밖에서 상황에 응하여 특별히 의지와 지혜가 있어야만 비로소 흙탕물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옛날 행각승일 때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느 동행과 함께 합주(合州) 조어사(釣魚寺)에 방부를 들이게 되었다. 거기에는 선배 노스님 한 분이 계셨는데 내가 그의 방에 두세 번 들어갔을 때는 나를 그냥 놔주고 그도 법을 거론하지 않았으나 동행 스님들은 그냥 두지 않고 무릎을 한 번 두드려 주면서 '그대는 여기서 한마디 내놔 보아라' 하였다. 동행하던 스님이 아무 말이 없었지만 그 방에 들어갈 때마다 노스님이 똑같은 말을 하니 동행스님이 내게 말하기를 '저 분은 번번히 똑같이 묻는데 나는 대답할 것이 없으니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그대는 나를 위하여 한마디 가르쳐다오'하니 파암 노화상이 말하였다. '그가 이번에도 또다시 그처럼 물으면 그대는 두 손가락으로 코를 쥐고 그에게 코를 풀어주고서 곧장 나와버려라' 그리하여 그의 방에 들어가 가르쳐준대로 하였더니 그 스님이 '어떤 사람이 너를 아주 망쳐 놓았구나!'라고 하였다.
참으로 이 도리를 깨달은 자는 마치 두개의 거울과 같아서 자연히 피차간에 속이지 못하는 법이다. 공부를 하려면 반드시 요긴한 곳을 살펴서 이러한 경지에 도달해야 종초(種草)를 감당할 수 있다.
41. 썰렁한 절에서 만난 눈썹 하얀 노승 / 소옹 묘감(笑翁妙堪)선사
소옹 감(笑翁妙堪)선사가 걸식 행각을 하면서 천남사(泉南寺)에 이르러 잠시 낙양에서 쉬게 되었다. 어느 노비와 함께 산길을 걷다가 우연히 하생원(下生院)이라는 절에 이르렀는데 낡은 집채가 수십 칸이나 되었고, 행랑 주변에는 낙엽만이 바람결에 나뒹굴고 있을 뿐 인기척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눈썹이 하얀 노스님 한 분이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따뜻한 햇살을 등에 쪼이고 있다가 서서히 일어나더니 길손을 멈춰 세우고 법당 앞의 부서진 의자에 앉도록 권하고서 소옹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온 곳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곳에 있는가?"
"이른 아침에 흰 죽을 먹었더니 지금은 뱃속이 휑합니다."
"그런 도리가 아니다. 빨리 말해라!"
소옹스님이 집 모퉁이에 서 있는 나무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참 좋습니다. 저 나무가 저렇게도 푸르다니."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크게 웃고는 서로 한참동안 이야기한 후에야 비로소 그 노스님이 일찍이 무용(無用)스님을 뵈었던 스님임을 알았다. 설봉스님의 빈(玢)시자에게 이 분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는데 안타깝게도 노스님의 이름을 잊었다고 한다.
42. 문장 좋아하는 병통을 경계함 / 철우 인(鐵牛印)선사
철우 인(鐵牛印)선사가 말하였다.
"정당 변(正堂辯) 화상이 일서기(日書記)에게 보낸 글에서 말했다.
'만일 도를 행하여 황룡(黃龍) 일파의 종지를 드날리려고 하면 결코 번드르한 문장으로 사람들을 홀려서는 안된다. 그렇게 해가지고는 선도(禪道)가 결코 펼쳐지지 못한다. 예전엔 규 초당(規草堂)이 있었고 근세엔 규 죽암(士珪竹庵)과 또 홍 각범(慧洪覺範)스님이 있으나 오늘날 사대부들은 그들을 문장승이라 부르고 있으니 이 일을 어찌하겠는가? 그대가 지은 「3일 동안 귀가 멀었다[三日耳聾]」는 것에 대한 게송과 「여자출정(女子出定)」에 대한 게송은 불법의 연원을 투철하게 깨달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이와같이 지을 수 있겠는가? 사소한 일 때문에 큰 법에 장애가 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하니 이는 자기 한 몸을 밝힐 뿐 아니라 제방의 노스님들도 모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를 알아주는 것도 나를 허물하는 것도 이 글에 있으니, 부디 부디 이 점을 살펴 보아라'
이 말은 오늘날의 병폐에 딱 들어맞는 말이니 배우는 자들은 이를 소홀히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철우스님의 기록은 참으로 후학에게 도움이 될 만하다. 초당(草堂)스님 같은 여러 노스님의 견해가 온당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 이러한 시비를 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가정(嘉定 : 1208~1224) 연간에 석전 훈(石田薰)스님이 박식하고 문장에 능하였으나 스스로 철저히 억제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은산 찬(隱山瓚)스님이 처음 「원성어록(元城語錄)」을 보고서 매우 기뻐한 나머지 그 책을 가지고 돌아와 읽다가 끝까지 보지 않고서 책을 덮어버리니 시자가 물었다.
"무슨 까닭에 처음엔 기뻐하시다가 갑자기 덮어버리십니까?"
"납승은 생각생각이 오로지 화두 '마른 똥막대기(乾屎橛)'에 있어도 오히려 번잡하게 마음쓰는 것인데, 하물며 세간의 이론과 문장이야 말할 것이 있겠느냐?"
이 또한 미리 병폐를 막자는 법이니 마땅히 이처럼 해야 하는 것이다.
옛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배우는 이가 언어문자에 빠지는 것은 마치 그물망에 바람을 불어넣어 부풀기를 바라는 일이니, 어리석은 이가 아니라면 미친 사람일 것이다."
43. 친척권속과 인연을 끊고 혼자 살다 / 민산거사 유경현(閩山居士 兪景賢)
민산거사 유경현(閩山居士 兪景賢)이 절(浙)땅에 들어가 선지식을 두루 방문한 후 무봉 용(鄮峰用) 수좌를 뵙고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그대에게 말해 주고 싶지만 그대가 믿겠습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어떻게 감히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대에게는 참선이 요긴한 것이지 서쪽에서 오신 뜻을 물을 것이 없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서쪽에서 오신 데에 무슨 의의가 있겠습니까?"
이에 거사는 환히 깨닫고 옷을 털며 일어나 나가자 용수좌가 다시 그를 불러세우며 말하였다.
"무엇을 보았기에 곧바로 나가시오?"
거사가 뒤를 돌아보는 찰나에 용수좌가 악! 하고 할을 하니 거사는 "그만, 그만!" 하고서 곧장 나가버렸다. 그 후 고향에 돌아가 친척권속과 인연을 끊고 말없이 섬 위의 별채에서 홀로 살며 게송을 지었다.
잘못 내친 걸음으로 홍주 제주를 다니다가 돌아오니
아무 것도 생각할 것이 없네
장강 위에 사립문 굳게 닫아 걸었으니
누가 시끄러운 시비에 상관하랴.
錯脚游洪歷淛歸 更無一法可思惟
紫門高掩長江上 誰管風濤鼓是非
용수좌는 수암(誰庵)스님을 뵙고 공부한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