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애만록 下 1~6.
고애만록
下
1. 훌륭한 선지식을 두루 섬기다 / 몽암 총(蒙庵聰)선사
몽암 총(蒙庵聰)선사가 지난 날 복주(福州)로 돌아가 건원사(乾元寺)의 목암(木庵)스님을 참방하니 목암스님이 물었다.
"총(聰)시자가 아닌가?"
몽암스님이 이름을 미처 말하기도 전에 또다시 말하였다.
"이 일은 총명스러운 지혜로도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온몸이 모두 입이라 할지라도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독(毒)에 맞았구나!"
"다른 사람의 눈을 채단(彩緞)으로 가리지 마십시오."
"앉아서 차나 마시지."
차를 마신 후 목암스님이 또다시 말하였다.
"이 일이란 책에도 입술에도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결국 어디에 있습니까?"
"쇠가시를 앞에 던져야 아는가?"
"정말 입술에 있지 않군요."
목암스님이 후려치자 몽암스님은 할을 한번 하고 나와버렸다. 몽암스님은 이미 그의 삭발은사인 광 회암(光晦庵)스님에게 법을 얻고 설당(雪堂)스님을 대부(大父)로 섬겼는데도 또다시 건원사에서 목암스님을, 오거사(烏巨寺)에서 밀암(密庵)스님을, 정자사(淨慈寺)에서 수암(水庵)스님을, 고정사(高亭寺)에서 수암(誰庵)스님을 뵌 후에야 비로소 심오한 경계를 얻었다. 그는 단 하루도 훌륭한 스승과 함께 하지 않은 날이 없었으니, 그의 법도가 높아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2. 무준 불감(無準佛鑑)선사의 염고(拈古)
무준 불감 사범(無準佛鑑師範)선사가 말하였다.
"목평(木平)스님이 낙포(洛浦)스님을 찾아뵙고 질문 하나를 던졌다.
'물거품 하나가 생기기 전에는 어떻습니까?'
'물길을 찾아 배를 옮기고 노를 저으니 물결이 갈라지네[移舟諳水脈 擧棹別波瀾].'
목평스님은 깨닫지 못하고 반룡(盤龍)스님을 찾아가 또다시 물었다.
'물거품 하나가 생기기 전에는 어떻습니까?'
'배를 옮기되 물을 가르지 않고 노를 저으니 길을 잃으리[移舟不別水 擧棹即迷源].'
목평스님은 이 말끝에 깨달았다.
후학 운봉 열(雲峰悅)화상이 이 일에 대하여 염하였다.
'목평스님이 만일 낙포스님의 말끝에 깨달았더라면 그래도 조금은 나았을 것이다. 후학들은 반룡스님의 썩은 물 속으로 젖어 들어가서는 안된다.'
목평스님이 주지가 된 뒤 한 스님이 '요즘 어떠신지요?'하고 물으니 '과연 여기에만 앉았다'라고 대답하였다.
너희들은 말해 보아라. 글가 이렇게 말한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나는 많은 스님네들이 '배를 옮기되 물을 가르지 않고 노를 저으니 길을 잃으리'라고 한 말이 썩은 물과 같으며 목평스님에게 물었을 때 '여기에만 앉아 있다'라고 한 것을 논함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한다면 당나귀해가 된다한들 꿈 속에서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모름지기 옛사람들의 흔적을 보아야 하니 사람들에게 미움 받는 점이 있어야 하리라."
불감스님의 이 말은 학인들에게 상당한 약이 된다 할 수 있다. 만년에는 쌍경사(雙徑寺)에서 중봉(中峰 : 密庵)스님의 도를 제창하였다. 스님의 기용(機用)은 마치 전광석화처럼 번득였는데 위의 법어도 그와 같은 예이다. 그의 문하에 준수한 인재가 운집하였을 뿐 아니라 황제께서도 도를 묻고자 하였다. 소정(紹定) 6년(1233) 7월 15일 수정전(修政殿)에 납시어 스님을 뵙고 설법하도록 하였고 법호(佛鑑禪師)와 금란가사를 하사하였는데, 그 당시의 설법도 이러한 내용이었다. 그가 어찌 엉뚱한 수법을 썼겠는가.
3. 성리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 이암 옥(伊巖玉)선사
이암 옥(伊巖玉)선사는 엄주(嚴州) 사람이다. 초년에는 이름난 유생으로 공부를 독실히 하였는데 중년에 과거공부에 싫증을 느낀 나머지 성리학(性理學)을 전공하던 중 갑자기, 이것으로는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유학자의 옷을 찢어버리고 수염과 머리를 깎고 출세간법을 배우러 경산(徑山)으로 올라가 불심(佛心)스님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아무런 깨침이 없자 다시 설두사(雪竇寺)의 치둔(癡鈍)스님을 찾아가 거기서 3년 동안 머물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이 곧 부처'라는 화두를 깨치고, 글귀를 지었다.
"털없는 고니새는 하늘높이 나는데 수많은 산들이 우뚝하구나."
스님이 한번은 유원성(劉元城)의 어록을 보다가, "이른바 선(禪)이라는 글자는 6경(六經)에도 이러한 이치가 있지만 선이라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달마 서래의(西來意)'에 대한 화두가 세상에 크게 유행되었으나 이 일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에 공자께서도 대답하지 않았던 그런 예이다. 달마스님의 서쪽에서 온 뜻도 물을 필요도, 답할 필요도 없는 것이나 향상(向上)의 노스님은 사람을 애먹이려고 대답없음으로 대답한 것이다. 이른바 '뜰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 따위의 화두는 당나귀 매는 말뚝[繋驢橛]일 뿐인데, 후학들이 알지 못하고 그저 '나무'만을 붙들고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온 뜻을 찾고 있으니 가소로운 일이다"라고 한 여기까지 읽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만일 그 때 이 말을 들었다면 송곳으로 한방 찔러주었을 것이다."
4. 묘희(妙喜)스님이 시랑 장자소(張子韶)와 풍제천(馮濟川)에게 던진 질문 / 진원 일(眞源日)선사
진원 일(眞源日)선사가 말하였다.
"시랑 풍제천(侍郞 馮濟川)과 시랑 장자소(張子韶)는 경산사 묘희(妙喜)스님에게 도를 물었는데 스님께서 그들에게 물었다.
'사물에 막혀 도를 보지 못할 때는 어떻소?'
장자소가 대답하였다.
'오늘 직접 스님 얼굴을 뵙습니다.'
'막혔구나.'
'그렇긴 하나 조금도 그를 속일 수 없을 것입니다.'
묘희스님이 같은 질문을 풍제천에게 던지니 그가 답하였다.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두 분의 대답이 가까이 가긴 했으나 아직은 도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어떤 물건이 침실에 엄연히 있는데도 벽이 한 겹 가로막혀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엇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일까? 선승들이 도리를 설할 때, 시방에 벽이 없고 사면에 문도 없는데 무엇이 막고 있는가. 설령 그대들의 눈망울이 방울처럼 또렷해도 반드시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다. 또한 편벽된 견해를 가진 선승들이 몇 마디 던졌다 하면 엇비슷하지도 못하면서도 도리어 내가 모든 것을 깨치고 체험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얼마 전 불지(佛智) 노스님을 만났더니 그 분도 "묘희스님의 자유자재한 말씀은 요즘시대의 병폐를 잘 꼬집어 준 말이다. 요즘에 사람을 속이고 명예를 도적질하여, 깨닫지 못하고서도 깨달은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서로가 인가를 주고받으니 동산(東山)스님과 견주어 본다면 불법의 죄인이 아닐 자가 거의 드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학인으로서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말이다.
5. 동산 도원(東山道源)선사의 행리
동산 원(東山道源)선사가 말하였다.
"지난 날 산을 나와 처음 경산사를 올라갔을 때 고선(枯禪)스님은 수좌로서 입승(立僧)이었고, 파암(破庵)스님은 서당(西堂)에 방부를 들였고, 당대의 고승들이 모두 모였으니, 석전(石田), 무준(無準)스님도 모두 대중방에 있었다. 파암스님은 평소 선실에서 '경행을 하거나 앉거나 눕거나 항시 그 중에 있어야 한다. 무엇이 <그 중 일>인가?' 라는 화두 거량하기를 유난히 좋아하였다. 내가 한번은 스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한 적도 있었으나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다가 떠나려는 차에 게송 한 수를 지어 주며 작별하였다.
뼈를 바꾸고 힘줄을 뽑는 이 한 마디에
머리를 끄덕인다[點頭自許]는 말이 빠졌을 뿐
만일 잘못된 점을 스스로 알 수 있다면
온 세상 집어 삼킴을 보리라.
換骨抽筋一句 只欠點頭自許
若能自解知非 便見平呑海宇
이 송은 사람들의 고루한 병폐와 집착을 뽑아준 말이라 하겠다. 그 뒤 평강(平江) 영암사(靈巖寺)를 지나는 길에 치둔스님을 뵈었을 때는 무 업해(茂業해)스님이 전당(前堂)의 입승으로 계셨고, 지금 대자사((大慈寺) 소옹(笑翁)스님과 육왕사(育王寺) 대몽(大夢)스님이 모두 그곳에 있어 총림의 법석(法席)이 매우 훌륭하였다. 치둔스님은 항시, "순 불등(守詢佛燈)스님은 49일 동안 밤마다 법당 앞 기둥을 안고 용맹정진을 하다가 마침내 깨쳤다"고 하였다.
그 후에 장산(蔣山)으로 절옹(浙翁, 淛翁)스님을 찾아뵈었다. 그때 선실에서는 '마음이 부처[即心是佛]'라는 화두를 거량하고 있었는데 스님이 한마디 던졌다.
'다리 기둥을 안고 목욕을 했습니다.'
절옹스님이 말하였다.
'뭐 상쾌할 거라도 있던가?'
'스님께서는 놔 버리십시오. 사람들에게 쫓겨나겠습니다.'
그 후 다시 암운 소(巖雲巢)스님과 교 중암(皎中庵)스님을 찾아뵙고 구주(衢州) 상부사(祥符寺)에 올라가서 살육암(殺六巖)스님을 만났으며, 그 밖의 20여 선지식을 방문하였다. 이처럼 많은 곳을 찾아보았지만 응암(應庵)문하 제자처럼 법이 높은 곳은 일찍이 없었으니, 이 때문에 응암의 문하가 융성하게 된 것이다."
아! 동산스님은 이처럼 드넓은 깨달음을 얻었으나 그의 몸가짐은 오히려 선대의 성인(공자제자)처럼 선(善)을 하나 들으면 가슴속에 새겨 잃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6. 설소(雪巢)스님의 풍번(風幡)화두에 대한 거량 / 진원 일(眞源日)선사
진원 일(眞源日)선사가 말하였다.
"설소(雪巢)화상이 선실에 들어와 선승들에게 물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오,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오, 그대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하는데 무엇이 너의 마음인가?'
다시 말하였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오,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오, 그대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하는데 너희는 어디에서 육조스님을 뵙겠느냐?'
또 다시 말하였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오,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오, 그대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가?'
이는 참으로 임제종의 심오한 종지를 밝히고 납자들의 안목을 증험한 말로써 마치 바람을 일으키면서 도끼를 휘두르는 솜씨와 같은 것이니 그 묘는 일도양단(一刀兩斷)에 있다."
설소화상은 금나라와의 전란 남송 말엽 시, 대혜(大慧)스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대혜스님이 노자로 쓰기 위하여 삿갓 속에 숨겨둔 금비녀 하나를 수시로 확인해 보았다. 설소스님이 그가 방심한 틈을 타 금비녀를 빼앗아 강물 속에 던져버리자 대혜스님이 부끄러워하고 사죄한 후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진원스님은 설소스님의 법을 이었고 초당(草堂)스님을 대부(大父)로 모셨기에 일생 동안 뛰어난 법문으로 승(先師)의 기풍을 지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