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마루 2016. 2. 20. 12:04

25. 욕쟁이 질여 담(疾藜曇)선사

 

 질여 담(疾藜曇)선사가 처음 호주(湖州) 보제사(普濟寺)에 머물때 사찰이 황폐하여 마치 시골 여관과 같았으나 밤낮으로 보살상을 마주하고 9년 동안 좌선하였다. 후일 소주(蘇州) 궁융사(穹隆寺)의 주지가 되었는데 가풍이 매우 준엄하여 그 문하에 들어가는 사람이 적었다. 스님은 선실에서 항상 "내게 한마디가 있다"하고는 납승들이 거기에 대해 말을 하든지 못하든지 욕을 해주었다.

 그 당시 문하에 무준(無準)스님이 장주(藏主)로 있다가 스님의 뜻을 거슬러 쫓겨난 일이 있었는데, 스님은 "그가 경산사(徑山寺)의 주지가 되었을 때 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후일 무준스님이 경산사의 주지가 되어 사찰을 보수하는 일로 오문(吳門) 지방에서 시주행각 하던 중 질여스님이 아직 호구사(虎丘寺)에 있다가 두 노스님이 서로 만나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26. 강원에서 공부하다가 행각을 떠남 / 엄실 개(掩室開)선사

 

 진강부(鎭江府) 금산사(金山寺)의 엄실 개(掩室開)선사는 성도(成都) 사람이다. 여러 강원을 두루 다녔으나 홀연히 싫증을 느낀 나머지 대사를 이루고자 영남으로 나가려 하니 추사 안공(樞使 安公) 또한 그를 격려하여 게송을 지어 주었다.

 

나에게 큰 우환이 있음은 나의 몸이 있기 때문

이 몸은 참 아닌 거짓 집합체

유마거사의 병은 원래 병이 아니니

남쪽으로 발걸음 옮기며 나루터나 물으시오.

吾有大患爲有身  是身假合亦非眞

維摩示病元非病  好向南方更問津

 

 엄실스님이 번양(番陽) 동호사(東湖寺)에 도착하자 때마침 송원스님이 개실(開室)하던 참이었다. 송원스님이 '눈 밝은 납승이 무슨 까닭에 콧구멍을 잃었는가?'라는 화두를 거론한 것을 듣고 엄실스님은 말끝에 그 뜻을 깨닫게 되었다.

 어느 날, 함께 경학하던 도반이 스님의 경전을 읽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

 "후일 자리를 얻어 법의를 걸친다면 어떻게 학인을 가르치겠소?"

 스님이 읽던 경전을 건네 주니 그는 경전을 책상 위에 팽개쳐버렸다. 스님이 또다시 책을 집어들고 낭랑한 소리로 경을 읽으니 그는 그만두고 가버렸다.

 가태(嘉泰) 신유년(1201) 처음으로 여산(廬山) 운거사(雲居寺)에 주지해달라는 청을 받고 갔다가 얼마 후 또다시 황제의 명으로 금산사 주지가 되었다. 그의 저서 「남전법어(藍田法語)」는 참선의 길잡이가 되는 책이며, 평소 많은 학인을 지도하였으나 그 중에 불해(佛海 : 石溪心月)스님 한 사람을 얻어 송원(松源)스님의 도를 크게 빛냈다.

 

 

27. 단오절 대중법문 / 쌍삼 원(雙杉元)선사 

 

 쌍삼 원(雙杉元)선사는 평소 방장실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보은사 방장실에는 백가지가 없어도 한가지는 있으니, 사람을 위해 문 안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이득이 있다." 이어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참선하는 집안에서는 달이 큰지 작은지 윤년인지 아닌지를 전혀 모르다가 세모진 송편을 먹고 나서야 비로소 '오늘이 단오로구나'한다. 그러나 보은사로 올라오게 되어서는 하루만에 그들과 등지고 오로지 반신반의하다가, 오늘 아침도 변함없이 찻잔에 차를 부어 그들과 함께 차를 마시고 창포를 씹으니 몸 속에서 진땀이 나며 '아! 복건성(福建省)에 사는 그 사람이 사람을 골탕먹이는구나' 하는 말을 뱉게 된다. 대중들이여! 이 어찌 신통 묘약이 아니겠는가. 30년 후에도 절대 들먹여서는 안된다."

 한번은 절 문을 들어서며 말하였다.

 "시끄러운 저자거리에도 입구가 있는 것은 다만 사람들을 위해 굳이 드러낸 것이다. 새 장로들이여, 걸음을 걸을 적에 팔을 흔드는 것은 나쁠 게 없다."

 이어 대중스님을 돌아보면서 "나를 따라오너라"하였다.

 쌍삼스님은 목전에 있는 사물을 근거로 하여 자유롭게 설법하였는데, 그것은 모두가 신비스러운 약이며 환골탈태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처방이었다. 무엇때문에 하필 다른 데서 찾으려 하는가?

 

 

28. 화두를 깨닫고 다시 선지식을 찾아뵙다 / 형수 여각(荆叟如珏)선사

 

 형수 각(荆叟如珏)선사가 영암사(靈巖寺)에서 여름 결제를 지낼 때, 치둔스님은 그에게 '개에겐 불성이 없다[狗子無佛性]'는 화두를 들게 하였는데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뜻을 알았다. 이로 인하여 잠 무은(潜無隱)스님에게  깊은 마음을 토로하자, 무은스님은 "옳기는 하지만 아직 미세한 번뇌[命根]는 끊어지지 않았으니 다시 밖으로 나가 선지식을 뵈어야만 할 것이다" 하면서 순암(淳庵)스님을 찾아가 보라고 당부하였다.

 형수스님이 화장사(華藏寺)에 도착하여 반년이 되도록 아무런 소득이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공양시간을 알리는 화판(火板)소리를 듣고 막혔던 의심이 모두 풀렸다. 순암스님에게 말하니 순암스님은 북을 울려 개실(開室)을 알렸다. 형수스님이 종종걸음으로 선실 안으로 들어오니 순암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인가?"

 "들꽃이 길에 가득히 피어 있습니다."

 "무엇이 불법인가?"

 "밀주[私酒]에 취한 사람이 많습니다."

 "무엇이 승려인가?"

 "바리때 아가리가 하늘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아직 멀었다. 나가라."

 후일 형수스님이 치둔(癡鈍)스님의 문하에 머물 때, 선실에서 '무엇이 부처인가'라는 화두를 들어 설법하는 말을 듣고 큰소리로 "얼어터진 겨울 참외다"하고는 이어 게송을 지었다.

 

무엇이 부처냐고. 얼어터진 겨울 참외지

서릿발 서린 얼음을 깨어무니 이가 시리네

꼭지엔 아무런 싹이 없지만

일년에 한 차례씩 꽃이 핀다네.

如何是佛爛冬瓜  咬着氷霜透齒牙

根蔕雖然無窖子  一年一度一開花

 

 형수스님은 대중에 있을 때 무은(無隱)스님과 쌍삼(雙杉)스님의 덕을 많이 입었다.

 

 

29. 반듯한 천성, 민첩한 기용 / 북산 신(北山信)선사

 

 복주 설봉사의 북산 신(北山信)선사는 복주(福州) 사람이다. 천성이 반듯하고 기용이 민첩하여 그를 만나보는 초학들이 그에게 응수할 때 낭패를 보는 일이 많았다. 고산사(鼓山寺)에 있을 때 한 스님을 만나 그에게 물었다.

 "요사이 어디서 왔는가?"

 "서선사(西禪寺)에서 왔습니다."

 "서선스님은 무슨 법문을 하시던가?"

 "말에 떨어졌습니다."

 "그대는 그곳에서 무엇을 배워 왔는가?"

 "오늘 뜻밖에도 스님의 비위를 거스렸습니다."

 이에 북산스님이 주장자를 들어 후려치자 그는 주장자를 빼앗아들고 크게 웃고는 나가버렸다. 북산스님은 차 한잔을 청하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노선(老宣)수좌가 그곳을 지나갔다고 한다.

 처음 북산스님이 월굴(月窟)스님과 함께 절강을 지나는 길에 화장사에서 둔암(遯庵)스님을 찾아 뵙고 공부하였는데 월굴스님이 먼저 깨쳤다. 이에 북산스님은 둔암스님의 허락을 받은 후 고향으로 돌아와 명 회실(明晦室)스님을 찾아뵙고 고산사에서 설법좌를 나눠 맡았다. 장주(漳州) 태수 조이부(趙以夫)가 그의 명성을 듣고 그를 남사(南寺)로 청하였으나 스님은 공이 헛소문을 들었다고 하면서 겸손하게 사양하였다. 이에 세 차례나 사람이 다녀간 후에야 마침내 개당을 하게 되었는데, 동행 월굴스님을 위해 염향(拈香)을 하니 그 당시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였다.

 

 

30. 말 많은 요즘 납자들 / 고선 자경(枯禪自鏡)선사

 

 고선 경(枯禪自鏡)선사는 타고난 성품이 담박하여 아무것도 좋아하는 것이 없고 오직 납자들을 이끌어주고 일깨워 주는 일만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 스님이 그에게 물었다.

 "달마스님께서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이에 고선스님이 선상을 내려치고 말하였다.

 "요즘 사람들은, 말은 다 하지만 모두 옛 선배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그 이해득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가?"

 

 

31. 항우의 초상화에 붙인 글 / 치절 충(癡絶冲)선사

 

 치절 충(癡絶冲)선사는 일찍이 복주 설봉사에 주지해달라는 청을 받고 갔다. 상서 진화(尙書陳韡)와는 평소 교분이 있었는데 진상서는 스님을 그의 집으로 초빙하여 공양을 한 후 항우(項羽)의 초상화에 글을 써주기를 청하니, 스님은 그 자리에서 곧장 붓을 들어 써 내려갔다.

 

산을 뽑는 것은 힘이 아니고

세상을 뒤덮는 것은 기운이 아니다

팔천 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모의하여 강물을 건넜는데

사람들은 모두 '천하라는 큰그릇은

힘으로 다투어 얻어지는 게 아니고

반드시 인의를 앞세워야 한다'고 했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으니

하늘이 그의 손을 빌려

포악스런 진나라를 베고

그 후 너그러운 자[劉邦]로 하여금

제왕이 되도록 하였다는 사실을

아! 그렇지만 그는 이 세상에 도움을 준 인물이었다.

拔山非力  蓋世非氣

八千子弟  同謀共濟

人皆謂天下大器

不可以力爭  必先仁義

殊不知  天假其手  以誅暴秦

然後使寬仁愛人者之爲帝  吁其亦有補於斯世

 

 진화는 스님을 매우 특별하게 여겼다. 치절스님은 지혜로운 말솜씨와 트인 눈을 갖추었는데 이는 그 중 한토막에 불과하다.

 

 

32. 개석 지붕(介石智朋)선사의 하안거 해제 야참법문

 

 개석 붕(介石智朋)선사는 진계(秦溪) 사람으로 성품이 고매하고 간결하였다. 한 스님이 물었다.

 "보검이 칼집에서 나오기 전엔 어떻습니까?"

 "소쩍새 우는 곳에 꽃망울 널려있다."

 "칼집에서 나온 뒤엔 어떻습니까?"

 "사람으로 하여금 길이 이광(李廣) 장군을 생각케 한다."

 "칼집에서 나왔을 때와 나오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

 "보검은 손에서 떠난 지 오래 되었는데 너는 이제서야 뱃전에다 잃은 곳을 새기는구나."

 여름 결제가 끝나는 날 야참(夜參)법문을 하였다.

 

 "90일 동안 꼼짝하지 않으니 그물 속 둥지에 잠든 새요, 석달 동안의 안거는 무덤을 지키는 여우로다. 삶과 죽음이 이르지 않는 곳에서 머리 셋에 팔뚝 여섯개인 귀신이 원각의 가람을 뒤엎은 일을 본다해도 그것은 말뚝을 안고 헤엄치는 격이다.

 운황산 앞, 두 그루 나무 아래 90일 동안에 알맞게 바람 불고 알맞게 비내려, 하루 스물네 시간 적어도 더할 수 없고 많아도 뺄 수 없는 일년 365일을 날마다 안거하고 때때로 자자(自恣)하여, 둥근 건 둥글고 네모난 건 네모나며 긴 것은 길고 짧은 것은 짧다. 그렇다해도 깨끗한 땅에 먼지를 일으킴을 면치 못하리니 결국 어찌해야 하겠는가?

 붕조가 나래를 펴니 하늘이 아득하고 큰 자라가 몸을 돌리니 바다가 비좁도다."

 

 대중법문은 대개 이와 같았다. 노년엔 항주 냉천사(冷泉寺)에 머물면서 그의 암자에 '청산외인(靑山外人)'이라는 편액을 걸었으며, 경정(景定 : 1260~1264) 연간엔 승상 추학 가공(秋壑賈公)이 더욱 불법을 숭상하여 스님을 정자사(淨慈寺)의 주지에 임명하도록 주선하였고, 그 후 회해(淮海原肇)스님이 법석을 이었다. 두 분 모두 간동(澗東)에서 일어난 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