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애만록 下 33~38.
33. 영은사 주지가 되어 / 석전 법훈(石田法薰)선사
석전 훈(石田法薰)선사가 말하였다.
"내가 영은사 주지가 된 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많아서 여기저기서 부딪치고 선상(禪床) 모서리까지 조여드니 돌아서 피할 길이 없구나. 다만 조사의 문호를 지키기 위하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나왔으니, 이를 일러 '이곳엔 주사(朱砂)는 없고 붉은 흙이 그저 상품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세상을 보니 그 붉은 흙마저도 점차 없어져 앞으로는 진흙이나 먹게 되겠구나. 이야기가 이 지경에 이르르니, 정말 사람의 마음이 서글퍼진다."
아! 도에 뜻을 둔 사람으로서 이 말을 들으면 마음이 어떨까?
34. 돈으로 주지자리 사는 풍조에 대해 부당함을 조정에 알리는 상소 / 쌍삼 중원(雙杉中元)선사
쌍삼 원(雙杉中元)선사가 가희(嘉熙 : 1237~1240) 연간 석전(石田)스님 문하에 제일수좌로 있을 때였다. 재상에게 조정에서 새로 내린 조치 때문에 사호(師號)와 금환(金環)과 상간(象簡)을 금전으로 사는 데 대한 부당함을 서신으로 올려 말하였다.
"정월 13일 경덕 영은선사의 전당수좌(前堂首座)이며, 전 가흥부 천령사 주지 중원(中元)은 삼가 향 연기에 몸을 씻고 추사대승상국공(樞使大丞相國公)께 글을 올립니다.
생각해보건대 부처님과 노자의 가르침은 세상을 구제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유교와 함께 세상에 존재합니다. 인간의 참된 본성을 깨닫게 하고 사견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니 그 공은 쉽사리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태종황제도 '석가모니의 도는 교화에 도움이 된다'고 한 적이 있고 효종황제도 '불교로 마음을 닦고 도교로 몸을 다스리는 유교로 나라를 다스림이 옳다' 하였으며, 장문정공(張文定公)도 '유도는 얕으므로 당대의 성현이 모두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관락(關洛 : 程朱)의 여러 학자 또한 반드시 불교의 서적을 음미한 뒤에야 전할 수 없었던 공 · 맹의 비전을 계승할 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르침에는 반드시 주인이 있어야 하고 스승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국가에서 도첩의 매매를 허락함으로써 모든 승려가 각기 스승을 찾아가 귀의하게 되었습니다. 스승된 자에게 조금치라도 도행이 있다면야 미혹한 자를 깨닫게 하고 막힌 사람을 통하게 할 것이니 세상을 교화하는 데 결코 적지않은 도움이 되겠지만, 요즘에 들어 공공연하게 뇌물 거래가 자행되어 금전으로 주지가 되기를 바라는 자가 있으니 그런 이는 우리 불교의 죄인입니다.
만일 이러한 관례가 성행한다면 천하의 어진 이는 반드시 몸을 숨기고 멀리 은둔할 것이니 그들이 세상에 나와 스승이 되려 하겠습니까? 스승의 도가 없어지면 바른 법이 약해지고 바른 법이 약해지면 사악한 법이 성해져서 청정한 불문이 잇끝과욕심의 아수라장이 될 것이니, 이는 국가의 복이랄 수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집안의 글방이나 고을의 학교엔 반드시 스승이 있어야 하는 일과 같습니다. 도를 전하고 의혹을 풀어줄 수 있는 자를 스승 삼지 않고 오로지 뇌물로 스승을 구한다면 제자들은 어떻게 공자의 가르침을 우러러 볼 수 있겠습니까. 아마 공자의 도는 거의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불교와 도교 또한 이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만일 불교 도교의 무리들이 큰 집에 살면서 날마다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누에를 기르지 않고 옷을 입으며 밭갈이를 하지 않고 밥을 먹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의 미움을 산다고 말한다면, 천하 사람 가운데 세상에 아무 쓸모가 없는데도 편히 앉아 기름진 음식을 먹고 있는 자들은 우리보다도 더욱 많은데 어째서 유독 사찰이나 도관(道觀)을 세우고 거기 사는 사람만을 미워합니까? 공양은 관청에서 내려준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즐거운 마음으로 보시해 준 것이며, 또한 사찰이나 도관에서 소유한 농토는 세금이 배나 되며 이밖에 때아닌 수요에 충당되는 경비는 큰 부자처럼 많이 드는 실정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도첩을 사서 병역을 면제받는 터인데 또 다시 금전을 요구하는 일은 관청에서 실오라기 만한 혜택을 주기는커녕 막중한 부담만을 한없이 매기는 것으로 불교의 승려나 도교의 도인에게는 불행이라 하겠습니다. 국가에서 훌륭한 인재가 넘치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한다면 어떻게 천하의 백성을 권하고 장려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승려와 도인이 뇌물로써 금환과 상간을 마련하여 여러 곳의 주지가 된다면 이에 따라서 말많고 어리석은 무리들도 모두 뇌물을 바쳐 높은 자리로 나아갈 것이니 어떻게 풍속을 바로잡을 수 있겠습니까. 사찰과 도관이 많기는 하지만 상주하는 인원는 매우 모자라는 형편입니다. 만일 이 법이 시행된다면 어쨌든 큰 사찰과 도관에서 금전을 거두어들일 것이니 규모가 적은 곳에서 그 요구에 어떻게 응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얻는 바란 무엇이겠습니까? 더구나 승려나 도인은 스스로 금전을 낼 만한 재산을 소유한 자도 아니니 주지가 되려면 반드시 사찰이나 도관의 재물을 탈취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스승과 제자가 서로 싸워 상주심(常住心)이 허물어지면 이른바 기름진 곳은 머지않아 황폐되고 큰 집은 터만 남게 되며 따뜻하고 배부른 자들은 추위와 굶주림을 겪게될 것입니다. 결국 관청에 도첩이 있다 해도 어느 누가 청할 것이며 나이가 장년이 되었어도 어느 누가 돈을 바치겠습니까? 오늘날의 군수물자와 양식물건, 갖가지 문서 등은 모두가 벼슬을 팔기 위한 것들이지만 벼슬을 금전으로 산 관리들 중에는 국가에 누를 끼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도첩이 많은 것은 관청에 병폐가 될 것 없다고 안일하게 생각하여 한 때의 무사태평을 따라 천만년의 이익을 끊는 것은 국가 경제를 다루는 장구한 계책이랄 수 없습니다.
생각하옵건대, 요사이 내린 조처는 금전을 더욱 높이 올려 벼슬을 파는 처사이기에 식견있는 인사들은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였고 과연 그 일은 시행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껏 들어왔던 진정서도 이러한 내용이었습니다. 원하오니 재상께서는 이 일의 이해득실을 자세히 헤아려서 황제에게 특별히 이 사실을 아뢰어 그러한 조처를 중지시켜 주신다면 승려와 도인으로서 이보다도 더 큰 행운은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재상은 굽어 살펴주십시오."
당시 강서의 찬 무문(粲無文)스님도 이와 같은 상소를 올렸다. 이보다 앞서 조정에서는 총령(總領) 악가(岳珂)의 주청으로 자색가사와 법호[師號] 등을 주면서 금환 · 상간 및 넉자로 된 선사의 법호를 하사하여 큰 사찰과 도관의 주지가 되게 한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승복과 법호를 내릴 때마다 삼백꾸러미의 돈으로 도첩을 팔되 관원임명의 조례[品官條制]에 준하여 임명하며 관직이 없으면 임명하지 않고 하사한 승복이 없으면 주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 상소를 계기로 그 일이 중지되었으니 이 어찌 불법을 비밀스러이 가호하는 자의 마음 씀씀이가 아니겠는가.
쌍삼스님은 주지로 있을 당시 몹시 고고하고 담박한 생활로 수도에 전일함은 기 간당(機簡堂)스님과 같았으며, 어두운 암실에 혼자 있을 때에도 큰 손님을 마주하듯 함은 증 노납(證老衲)스님과 같았다. 이와 같이 철인(哲人)의 몸가짐은 작은 일에서도 볼 수 있으니 훌륭한 일이다.
35. 고춘 담(枯椿曇)선사의 학인지도
고춘 담(枯椿曇)선사는 청정하고 지조가 있었으며 말씨가 적고 하루종일 반듯이 앉아 지냈다. 월주(越州) 대우사(大禹寺)에서 개법하였지만 그 또한 간동(澗東) 출신이다. 한 스님이 그에게 물었다.
"스님께서는 불심(佛心)을 보지 않을 때 어떻습니까?"
"사람이 가난하면 도에 귀의하는 법이다."
"불심을 본 뒤에는 어떻습니까?"
"모든 색이 다하면 검은 색이 된다."
한번은 "현성공안(現成公案)에 말을 붙여도 몽둥이 서른 대요, 말을 못해도 몽둥이 서른 대다"라는 화두를 들어주니 시자스님이 말하였다.
"스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방편을 열어 주십시오."
"너를 마굿간에서 뛰쳐나온 좋은 말이라 여겼더니…."
이에 시자승은 느낀 바 있었다. 고춘스님은 양주(閬州) 사람이며 후일 고소산 호구사(虎丘寺)의 주지로 있었는데 승속이 모두 그를 우러렀다.
36. 운소 암(雲巢巖)선사의 개로일 법문
운소 암(雲巢巖)선사는 후학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자기를 낮추고 사람들을 편하게 대해 주니 뛰어난 인물들이 그에게 귀의하였다.
개로일(開爐日 : 10월 1일)에 설법하였다.
"옳은 구절도 버리고 잘못된 구절도 버려야 한다. 설봉(雪峰)스님은 공을 굴렸고 목주(睦州)스님은 '이 외통수야!'하였으나 오직 조주 노스님만이 화롯가에서 부젓가락을 뽑아들고 이리저리 휘젓다가 생각지 않게 불씨 한 덩이를 얻었다. 이는 마치 요주(饒州)에서 경덕(景德 : 경덕진은 도자기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다)의 어느 집 담모퉁이에서 오래된 도자기 파편을 발견한 것과 같으니 삼세여래도 그저 그렇게 보면 된다."
운암(運庵)스님은 말하였다.
"이 말은 은사 송원(松源)스님의 말씀과 너무나 닮았다"
37. 남옹 명(南翁明)선사의 발심과 수행
남옹 명(南翁明)선사는 처음 대중스님으로 있을 때부터 참선을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한번은 천태산 석교사(石橋寺)에 묵을 때 남다른 승려를 만났는데 그가 불심(佛心) 노스님을 찾아보도록 일러 주었다. 태백산에 가서 성심으로 그의 법석에 참례했으나 선실에서 입을 열었다 하면 꾸지람만 들었다. 곰곰이 혼자 생각하다가 '금생에 깨닫지 못하면 내생이 또 있겠지'라고 여겨지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턱을 적셨다. 그 후 치둔(癡鈍)스님의 문하에 시자로 있었는데 어느 날 만참(晩參)때 스님을 모시고 있던 중 범종소리가 은은히 들렸다. 이에 치둔스님이 그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종소리입니다."
"소리가 귀쪽으로 오는가, 귀가 소리 쪽으로 가는가?"
옹선사는 갑작스런 물음에 당황하여 대답을 못했다. 치둔스님의 꾸지람을 받고 식은땀이 온몸을 적시자 그때서야 비로소 중얼거렸다.
"원래 절옹(浙翁)스님이 평소에 나를 꾸짖고 욕한 것은 모두 골수에 사무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치둔스님은 평상시 그에게 백장스님의 여우화두를 들도록 하였는데, 어느 날 치둔스님이 말하였다.
"(인과에) 떨어지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을 때는 어떤가?"
"떨어지지도 어둡지도 않을 때는 원앙새 한 쌍이 물 위에 떴다 잠겼다 하면서 자유롭게 놉니다."
이에 치둔스님이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 그를 인가하였다. 남옹스님은 천주 황씨(泉州黃氏) 자손이며 융 남산(隆南山)스님과 함께 영남으로 나왔다. 고향으로 돌아가 계상(溪上) 교충사(敎忠寺)의 주지로 있다가 포주(莆州) 낭산사(囊山寺)의 주지가 되어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38. 서산 양(西山亮)선사의 종이이불
서산 양(西山亮)선사는 복주 사람으로 천성이 고고하고 검소하였다. 종이이불 한 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수없이 꿰매어 성한 곳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었으나 추우나 더우나 다른 이불로 바꾼 적이 없었다. 고산사 수좌실에서 운문사 주지로 갔다가 다시 황벽사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다른 이불로 바꾼 적이 없었는데 어느 날 밤 시자가 몰래 명주이불로 바꾸어 놓자 서산스님은 깜짝 놀라 그를 꾸짖었다.
"나는 복이 없는 사람이라. 평생동안 단 한번도 비단 옷을 입어 본 적이 없다. 더구나 나와 30년을 함께 지내온 이 이불을 버릴 수 있겠는가."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가 주지로 있으면서도 옛사람의 기풍이 있다'고 말하였다. 그 후 주지에서 물러나 영양(永陽) 안호산(雁湖山)으로 들어가 어느 도인과 함께 화전을 일구며 살았는데 그가 어떻게 입적했는지는 아는 사람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