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애만록 下 39~43.
39. 눌당 변(訥堂辯)선사가 도반에게 보낸 게송
평강부(平江府) 만수사(萬壽寺)의 눌당 변(訥堂辯)선사가 도반에게 게송을 보냈다.
원숭이와 자라의 우정을 뗄 수 없을 만큼이나
형제처럼 화기애애 모든 생각 다 잊다가
이야기 잘못 되자 언제 그랬냐며
간장도 심장도 없는 놈이라고 욕지거리 하네.
猿與黿交割不開 兄乎弟應似忘懷
及乎話到誵訛處 却道心肝不帶來
그 당시에도 이 게송에 대하여 칭찬이 자자하였다. 그 후 도량에 들어가서도 제창하는 법문이 마치 비탈길에 둥근 탄환이 구르듯 유창하였다. 그는 진실로 암유(巖獃)의 아들이요 악농(岳聾)의 손자로서 선대에 욕을 끼치지 않은 분이다.
40. 별봉 진(別峰珍)화상의 사람됨과 수행 / 개석 붕(介石朋)선사
개석 붕(介石朋)선사가 말하였다.
"별봉 진(別峰珍)화상이 고산사를 떠나 육왕사에 이르러 대혜(大慧)스님을 뵙겠노라고 불전 뒷편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79일 동안 좌선하였다. 마침 진국부인(秦國夫人)의 청으로 대혜스님께서 법좌에 오르자 남몰래 기뻐하며 '오늘에야 스님을 뵈올 수 있으리라'하였는데 과연 그의 뜻대로 스님을 뵙고 주고받은 말들이 서로 일치되었으며 다시 세마디 전어(轉語)를 던지고 떠나가니 대혜스님은 그를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마침내 굉지(宏智)스님과 함께 그를 악림사(岳林寺)의 주지로 추천하였는데 지금도 그 절에는 그의 부도탑이 남아있다. 별봉화상은 온몸에 긴 털이 덮혀 있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를 진사자(珍獅子)라 불렀다."
개석스님이 그의 필적에 글을 썼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별봉스님은 불심 재(佛心才)스님의 법을 전수받은 후 높은 자리에 앉아 그의 도가 유명해졌는데도 다시 묘희스님을 찾아뵈려는 용기를 지녔으니 그의 뜻을 무어라 해야겠는가? 도행이 지지부진했던 도박(道璞) 담의(曇懿)스님 등과 함께 논할 수 없는 자이니 이것이 그가 한시대 종사의 표준이 되는 까닭이다. 아! 이제는 큰스님을 뵈려고 79일을 기다리는 후학을 하나라도 보려하나 역시 힘든 일이다."
41. 불법을 묻든 세상사를 묻든 / 수징암주(守懲庵主)
수징(守懲)암주는 포주(莆州) 사람이다. 성년이 되어 구족계를 받고 낭산(囊山) 아래 바윗골에 살면서 바위 위에 토굴을 마련했으나 겨우 비바람을 가릴 정도였다. 그의 부친은 그 고을 관리였는데 해마다 양식을 공급하여 그의 뒤를 보살펴 주었다. 스님은 찾아오는 손님이 불법을 묻든 세상사를 묻든 언제나 눈을 휘둥그래 뜰 뿐이었다. 한 스님이 그에게 물었다.
"암주의 가풍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문득 대답했다. "바위 위에 움막을 치고 미음을 끓여 먹지."
"누군가 갑자기 달마스님의 서래의(西來意)를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수징암주는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아, 괴롭도다"하며 통곡하였다.
그의 고상한 자취를 살펴보고 그의 깊은 뜻을 탐구하여 보니 그는 계여(契如)스님에 버금가는 인물이라 하겠다.
42. 불해 심월(佛海心月)선사의 법문과 자취
석계(石溪) 불해 월(佛海心月)선사가 말하였다.
"내 나이 30에 바야흐로 두번째 남쪽 행각길에 올랐는데 그당시 공수(空叟)스님이 20세의 행각으로 이 일을 쉬었다는 말을 듣고서는 처음에는 마음이 매우 불편하였다. 이성사(二聖寺)를 지나는 길에 좌원(座元)스님의 책상에서 궁곡(窮谷)스님의 어록을 보고 운문화타(雲門話墮)공안을 들다가 광명이 적조(寂照)한 가운데 쉼을 얻게 되었다. 구봉사(甌峯寺)에 올라가 열흘 동안 대중의 뒤를 따라 들어가니 스승께서 '달마는 웅이산(熊耳山)에 장사를 지냈는데 무슨 까닭에 한 쪽 신발을 매고서 천축으로 돌아갔는가?'라는 화두를 들어 말씀하기에 나는 '한 방울의 먹물로 두 마리의 용을 그렸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어느 날 소매자락을 털고 떠나니 본래면목이 활짝 열려 드디어 4년을 발길을 끊은 뒤에야 양자강의 남북과 절강성의 동서를 다니면서 벗과 스승을 가까이 하였고, 단맛 쓴맛을 다 보아 모든 행동이 법에 어긋나는 일이 없게 되었다. 이제 또 30년이 되었으나 아직 비슷하게도 못되었으니 이 일은 정말 쉽지 않음을 알겠다. '쉰다'는 한마디가 진짜 나의 유일한 선지식이다."
이는 수상인(秀上人)에게 설법한 글에 실려 있다. 요즘 학인들은 흔히 이 어록을 보면서 그 뜻을 생각하지 않으니 서글픈 일이다.
불지(佛智) 노스님께서 그의 어록에 발문을 썼다.
"석계스님이 운정사(雲頂寺)를 떠나지 않았을 때는 가보지 않은 곳이 있으면 으레 찾아갔으며, 운거(雲居)스님을 뵙고서는 물어보지 못한 말이 있으면 반드시 물어 보았다. 반년동안 운거스님을 시봉할 때는 마치 활시위의 화살이 과녘을 알면서도 시위를 떠나지 못한 것과 같았으며, 마침내 '소맷자락을 털고 일어섰을 때'에 가서는 마치 과녘에 적중한 화살이 이미 활시위를 떠났는데도 그 스스로 모르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가 초년에 북산 아래에서 송원(松源)스님을 만났을 때 이 어록은 이미 세상에 유행하였다. 만일 그가 입을 벌린 후에야 이 어록이 나왔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뒤통수에 석계스님의 따끔한 침을 맞아야 할 것이다."
아! 불해스님이 불법 깨달은 경지를 이 글에서 볼 수 있다. 비록 몇마디 되지 않지만 깨달음으로 이끌어주는 말이니만큼 이를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43. 두타행을 하다 간 거사 왕공대(王孔大)
왕공대(王孔大)는 복주 경강(徑江) 사람이며 태학박사(太學博士) 종합(宗合)의 조카이다. 나이 20세에 종손이라는 이유로 춘관(春官)에 추천되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해(辛亥 : 1131)년에 의연하게 고탑주(古塔主)의 가풍을 본받아 선비의 관을 찢어버리고 삭발한 후 포주(莆州) 벽지암주(辟支巖主) 입견(立堅)에게 귀의하여 두타행을 하였다. 얼마 후 그의 행적을 아는 사람이 생기자 더욱 가파른 산꼭대기에 올라가 토굴을 짓고 그곳에 살았으며 그의 부모가 애써 만류하였지만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2년이 지났는데 천주 남명사(南明寺) 교충(敎忠 : ~1155)스님의 법도가 훌륭하다는 말을 듣고 그의 토굴을 불사르고 교충스님을 찾아뵌 후 게송을 바쳤다.
산꼭대기 다 부서진 움막을 불사르고
행각할 생각도 않고 법을 묻지도 않다가
스승에게 귀의한 후 별다른 탐착이 없으나
밥짓고 밭가는 일은 알아야 하리.
燒却山頭破草庵 不圖遊歷不咨參
依師別也無貪着 愽*飯裁田也要諳
그 당시 교충스님은 풍정(風亭) 통구사(通衢寺)에서 접대암(接待庵)을 열었다. 왕공대는 대중스님 밑에서 몸을 숨기고 막일을 하였는데 시주가 이 소식을 듣고 교충스님에게 그를 스님으로 만들자고 권유하고 이름을 유옥(惟玉)이라 고쳐 주었다. 교충스님도 게송을 지어 준 적이 있다.
늙은 내가 산에서 살아온 지 그 얼마런가
그저 되는대로 옷입고 밥 먹었네
그대에게 기특하다 말하려 하니
동쪽이웃 어린애가 까르륵 웃겠네.
老我居山已許時 着衣喫飯只隨宜
子來將謂有奇特 笑倒東家小廝兒
그 후에 그는 깨친 바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오래 살지 못하고 입적하였다. 그의 인생은 도인 조린양(祖麟楊)과 비슷하였다. 아!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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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愽'은 '搏'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