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마루 2016. 2. 22. 20:45

57. 염불공덕을 체험하고 신심을 내다/ 사첨사(史僉事)

 

 사첨사(史僉事)는 단성(鄲城) 사람이며, 이름은 전(銓), 자는 형보(衡甫), 아버지 헌부(憲夫)는 남대장부(南臺丈夫)이다. 나는 지정(至正) 신축(1361)년 은성(鄞城)에서 그를 만났는데 그는 불가의 염불 공덕이 매우 크다고 극찬하였고 이어서 자기가 두번이나 직접 본 일이며 거짓이 아니라고 하였다.

 연경(燕京)에 한 선비가 있었는데 그는 지천주(胝天呪)를 외웠다. 어느 날 저녁 눈썹이 긴 노인이 문을 두드리며 말하기를, "나는 사람이 아니고 용인데 비를 잘못 내린 죄로 상제께서 꾸지람을 받았으니 한 번만 비호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내가 무슨 성인이라고 당신을 비호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대는 항상 지천주를 간직하므로 공덕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하고는 말을 마치자 노인은 없어졌다. 며칠 후 우연히 왼쪽 엄지 손가락 손톱 밑이 따끔따끔 아프기에 살펴보았더니 가느다란 선이 있었는데 그 길이는 3 · 4푼(分) 정도였으며 색깔은 붉고 모양은 용과 같았다. 그 선비는 예전과 같이 주문을 외웠는데 그날 밤 노인이 또다시 나타나 감사를 표하고, "비호해 주신 덕에 상제의 꾸지람을 피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지금 창 밖으로 손을 뻗어 보라고 하였다. 그의 말대로 창 밖으로 손을 뻗자 순식간에 우레와 비가 쏟아지면서 용 한 마리가 하늘에 솟구쳐 날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제령(濟寧) 땅에 신도 한 사람이 있었는데 좌선을 좋아하여 20여 년을 하였다. 하루는 집사람들에게 "나는 간다”하고서 앉은 채 죽었다. 가족들이 그의 몸을 밀쳐 베개 위에 누이자 "이러지 말라, 이러지 말라,”하고서 벌떡 일어나 연못으로 뛰어들어가 죽었다. 그 후 친구가 연못에 찾아오면 그의 이름을 부르고 생시처럼 함께 이야기했으며 어떤 때는 술을 달라고 하기도 하였다. 연못에 술을 부어주면 곧 사례를 표하면서, 되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반 년이 지난 어느 날 한 스님이 걸식차 그의 집에 왔다가 연못에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20년 동안 참선한 공부가 어디에 있느냐?”고 호통을 치니 이때부터 연못이 고요해졌다고 한다.

 사씨가 노년에 부지런히 참선과 염불을 한 것은, 이 두 가지 일로 해서 신심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58. 남편과 맞지 않아 발심수행을 하다 / 유안인(兪安仁)

 

 홍무(洪武) 5년(1372) 내가 상우(上虞)지방을 돌아다니다가 개호(蓋湖) 적경정사(積慶精舍)에서 여름안거를 하였는데 어느 날 아침 백관시(百官市)에서 유안인(兪安仁)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내 앞에 무릎을 꿇고서 하소연하였다.

 "저는 남편과 맞지 않아 발심하여 정토 수행을 닦아온 지 7,8년이 되었습니다. 근래 1,2년 사이에 마음을 맑게 하고서 고요히 앉아 있노라면 공중에서 가냘픈 음악소리와 황새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기에 내 스스로는 훌륭한 경지가 나타났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떤 사람은 이것이 마의 경계[魔境]라 하니 스님께서 결정지어 주십시오.”

 내가 말하였다.

 "이는 그대가 경에서 '백가지 보배의 가로수에 바람이 부니 그 소리는 마치 백천가지 음악과 같고 많은 새소리가 일시에 일어나는 것 같다는 문장을 보고 그 말을 독실히 믿어 그 생각이 팔식(八識)에 뿌리 깊이 내려 제거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고요한 선정 가운데에서 이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만일 뒤에 이러한 경지를 보게 되면 그것이 훌륭한 경지라거나 마의 경계라는 생각을 하지 말고 당장 그 자리에서 끊어버리면 비로소 마음이 정토이며 본성이 미타로서 온통 그대로가 다 볼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십만억 리 머나먼 국토 바깥에 있겠는가?”

 이에 유안인은 자기의 가슴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젠 의심덩이가 풀렸습니다.”

 

 

59. 추강 담(秋江湛)선사의 산 제사

 

 태주(台州) 광효사(廣孝寺)의 추강 담(秋江湛)선사는 황암 단강(黃岩 斷江) 사람이다. 어려서 고향 화성사(化城寺)에서 잡역을 하다가 삭발하였다. 절의 오른쪽에 송암(松岩)이라는 높은 암벽이 있는데 그 꼭대기에 법륜사(法輪寺)터가 있었다. 이는 오대(五代)시대에 근(勤)스님이 창건한 절인데 오랫동안 황폐하여 유적이 잡초 속에 파혀 있었다. 어느 날 스님은 그곳에 이르러 구경을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처량한 감회에 젖어 마오랫동안 객지생활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듯한 마음에 차마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이에 에 있는 큰 바위 아래에서 선정(禪定)을 하였는데 고을 사람들이 소식을 전해 듣고 서로 음식을 내오고 재물을 내서 공사를 시작하여 사원을 일으키니 몇 해가 되지 않아 총을 이루게 되었고, 또한 사원의 뒤 언덕에 부도를 세워 사후 일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의 문도를 재촉하여 부도가 완성되었는지를 묻고 사람을 보내 그 절다니던 사람들을 두루 초빙하여, 약정한 날에 모두 산사에 와서 결별을 나누자고 하였다. 약속한 날이 되어 승속이 모두 모여 들자, 스님은 법륜사 주지 신도원(信道原) 등에게 음식을 마련하여 살아 있는 사람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니 많은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노인이 노망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스님은 더욱 재촉하였다. 하는 수 없이 조촐한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올리니 스님은 당상에 앉아 음식을 받고 나머지 음식은 신도와 대중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신도원 스님 등이 제문을 읽으면서 통곡을 하자 스님도 눈물을 흘리면서 일어나 관 속으로 들어가 편안히 하였다. 이때 시주 주형지(周衡之)가 관음상을 들고와 찬(讚)을 써달라 청하고 대중들이 열반게를 청하니, 스님은 거침없는 필치로 써준 후 조금 있다가 입적하였다. 이 날은 4월 23일이었다. 스님은 육신이 차갑게 식기 전에 흙을 얹으라고 유언하였지만 대중은 차마 그러지 못하고 그 이튿날에야 관을 덮고 그 위에 부도를 세웠다. 스님의 속성과 사법관계 주지살이 등은 모두 용장준(用章悛)스님이 쓴 그의 전기에 나온다고 한다.

 

 

60. 무고를 당한 독실한 수행자 / 급암 종신(及菴宗信)선사

 

 도량사(道場寺) 급암 신(及菴宗信)선사는 무주(婺州) 사람이다. 앙산사(仰山寺) 설암(雪巖)스님의 법제자이며 독실한 수행이 있었으므로 생사 도리를 규명하려는 천하의 선승들이 기꺼이 그를 따랐다. 그 중에는 몇 명의 비구니가 있었는데 그들 또한 그 앞에 나아가 제자 명단에 끼어 대중을 따라 설법을 들었다.

 그런데 무뢰한들이 스님에게 소임을 요구하였다가 거절당하자, 스님이 비구니를 가까이하여 사사로이 난행을 범하였다고 무고하였다. 스님은 항주로 추방되어 오백가(五家)에 구금되었는데 어느 날 저녁 아무런 병도 없이 입적하였다. 이에 다비를 하니 정교하고 아름다운 사리가 빛났으며, 무고한 자는 도리어 처벌을 받았다. 영은사(靈隱寺)의 평산(平山)스님은 그의 법을 이었다.

 

 

61. 젊은 패기에 휘둘린 시자, 너그럽게 봐주지 않은 스승 / 설암(雪巖)스님과 무준(無準)스님

 

 앙산사 설암(雪巖)스님은 무주(婺州) 사람이다. 마음가짐이 남달리 뛰어나 상대할 만한 사람이 아니면 사귀지 않았다. 젊은 시절 경산사 무준(無準)스님을 찾아뵈었는데 때마침 범종을 주조하여 그에게 소(疏)를 청하자 스님은 게송을 지어주었다.

 

온 몸통이 오직 하나의 입인데

백번 달군 풀무 속에 물흐르듯 흘러나온다

범종소리 농울져 석양을 돌려보낸 뒤에

또다시 밝은 달을 누대 위로 오르라 재촉하네.

通身只是一張口  百煉鍊中袞出來

斷送夕陽歸去後  又催明月上樓臺

 

 이에 무준스님은 그에게 시자의 소임을 맡겼다. 소임이 만기가 되자 무준스님은 그 직책을 대신할 사람을 청해왔는데 설암스님은, 이 사람에게 넘겨주지 않으려 했다. 스님은 무준스님이 보낸 사람이 문으로 들어서는 것을 멀리서 보고, 창문에 엎드려 심한 구토 소리를 냈다. 무준스님은 그의 마음을 알고 일부러 손가락질을 하면서,

 "저 아이는 복이 없는 놈이다. 시자직을 그만두자 피 토하는 병까지 걸렸구나!”

하고 크게 성을 냈으나 설암스님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주지로 세상에 나왔을 때, 여러차례 법을 잇는 향불을 올렸지만 어느 분을 위한 것이라고는 밝히지 않고 이런 말을 했다.

 "낡은 좌복 위에서 땅이 찢어지고 하늘이 무너졌으니, 남에게서 얻은 것이 아니라…”

 그리고는 다시 향을 품 속에 넣고 법좌에 앉았다. 그가 앙산사의 주지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무준스님을 위하여 향을 올렸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무준스님이 스승이니 아니니 하는 말이 있다. 나의 생각으로는 설암스님은 당시 젊은 나이에 패기에 휘둘린 것이며 무준스님은 당대 큰스님으로서 너그럽게 참지 못하여 부자간의 정리가 이처럼 어긋나게 된 것이리라 여겨진다. 큰 사찰을 맡아 불자를 잡는 주지들은 이 일을 거울 삼아야 할 것이다.

 

 

62. 중봉(中峰)스님의 수행과 깨침

 

 중봉(中峰)스님은 항주 사람이다. 스승에게 귀의하여 머리를 깎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후, 참구해서 고인이 이룩한 깊은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으리라고 결심하였다. 당시 고봉(高峰)화상이 앙산사 설암스님의 허가를 얻어 천목산(天目山) 사자암(師子岩)에 주석하면서 사관(死關)을 세워 결코 선승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중봉스님을 한 차례 본 후 크게 기뻐하여 화두를 내려주었고 중봉스님도 힘써 정진하며 의문나는 점을 물었다.금강경」의 "여래의 무상정각을 짊어지고[荷擔如來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는 구절에서 환히 깨치고 이때부터 막힘없는 지혜변재를 지녀, 위로는 군왕 · 재상, 아래로는 삼교(三敎)의 준수한 인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성을 다해 도를 물었다. 그가 저술한 책과 어록 몇 권은 제자 칙천여(則天如)스님이 두루 수집하여 조정에 올려 대장경에 수록하였고 보응국사(普應國師)라는 법호를 추증(追贈)받았다.

 스님의 풍채는 거룩하였고 조금이라도 머리를 숙이면 호흡이 고르지 못하여 항상 바로 보고 편안히 앉아있었다. 법어를 청하면 두사람의 스님에게 종이를 마주들게 한후 붓가는대로 글을 써주었다.

 

 

63. 포납(布衲)선사의 원숙한 문장력

 

 포납(布衲)선사는 명주(明州) 정해(定海) 사람이며, 고봉스님의 법을 이었다. 일찍이 영명(永明)스님의 「산거시(山居詩)」에 화운(和韻)을 하였는데 그 의미야 우열을 가릴 수 없지만 문장력은 원숙하여 때로는 원운(原韻)보다도 훌륭한 부분이 있었다. 임종 때 게송을 써놓고 중천축사(中天竺寺) 계자당(桂子堂)에서가부좌한 채 서거하였는데 다비를 하자 많은 사리가 나왔다.

 

 

64. 탁발승 성지암(誠止岩)스님

 

 성지암(誠止岩)스님은 항주 호포사(虎跑寺)의 주지이다. 처음엔 포납(布衲)스님을 모시다가 뒤이어 천지사(天池寺) 원옹 신(元翁信)스님을 찾아뵙고 깨우친 바 있어 그의 법통을 계승하였다. 호포사는 원래부터 살림살이가 가난했는데도 수십 명의 승려가 살았으므로 스님은 매일 탁을 하여 절 살림을 꾸리면서 혹한과 무더위 속에서도 전혀 게을리하지 않았다. 노년에 병으로 가부좌한 채 열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