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마루 2016. 2. 22. 21:08

12. 원암 회(元菴會) 장주의 게송

 

 원암 회(元菴會)장주(藏主)는 임안(臨安)사람으로 오랫동안 정자사의 몽당(蒙堂)에

살았으며 조문민공(趙文敏公)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문민공은 일찍이 원암스님의

시를 옮겨써서 커다란 시집[詩軸]을 만들고 그 끝에 제(題)를 썼는데 사람들이 모이를 자랑으로 여겼으나 원암스님만은 담담하였다. 그 절의 택장산(澤藏山)이라는 스님이 낸 돈으로 열반당의 침선판(針線板), 세면실, 화장실 등을 수리하자 선승들은 게를 지어 두루마리를 만들어 감사의 뜻을 표했는데 원암스님은 그것을 보고서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에 대중들이 게를 지어달라 부탁하자 마침내 게를 지었다.

 

한가닥 열반길 전부 뒤집혀

부딪히는 곳마다 공부하기 어렵지 않네

얼굴을 씻다가 문득 코가 만져지니

바늘 귀 속에 잘도 산을 감추겠네.

涅槃一路盡掀翻  觸處工夫見不難

洗面驀然摸着鼻  繡針眼裡好藏山

 

 당시 회기(晦機)스님이 주지로 있었는데 법상에 올라 설법할 때 특별히 이 게송을

칭찬하였다. 이 게송으로 나머지 그의 시를 미뤄 보면 그의 시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만하다.

 

 

13. 일계 자여(一溪自如)스님의 행장

 

 중천축사 일계(一溪)스님의 법명은 자여(自如)이며 복건 사람이다. 원나라 병사가 강남을 침략했을 때 스님은 어린나이로 사로잡혔으나 임안(臨安)에 이르러 병사들이 스님을 내버리고 떠나가니, 임안의 부호 호씨(胡氏)가 스님을 거두어 길렀다. 그

의 자제들과 함께 서당에서 독서하도록 하였는데, 스님은 서당의 모퉁이에 서서 정신을 집중하고 조용히 귀기울여 말없이 이해하고 하나도 잊지 않으니 호씨가 매우 좋아하였다. 자제가 장성하자 호씨는 그를 마을 무상사(無相寺)에 보내 승려가 되도록 주선하였다.

 그 후 경산사의 설봉(雪峰) 스님을 찾아 뵙고 종지를 깨쳤으며 계행이 엄정하였고 법복과 우가 몸에서 떠나지 않았으며, 능엄경, 법화경, 유마경, 원각경 등을 암송하였다. 

 맨처음 절강(浙江) 만수사(萬壽寺)에 주지가 되었을때 절 뒤편에 대부호 황씨(黃氏)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스님의 계행을 존경하여 항상 나물밥을 공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집으로 스님을 초청하여 정성껏 공양을 올리고는 그의 금고를 열어 소장하고 있는 금옥보화를 내보이며 스님의 마음을 동요시키려 하였다. 스님은 절로 돌아와 좌우의 스님들에게 말하였다.

 "저 황씨가 금고 속의 보물을 내보인 것은 나의 마음을 현혹하여 죽은 후 그의 아들이 되도록 하려는 마음에서이다. 그러나 금옥 보화를 돌멩이처럼 보는 나의 마음을 조금도 모르고 있다. 이와 같은 전철을 밟은 옛사람들이 매우 많은데 그가운데는 그의 아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소나 말이 된 자까지도 있다. 나는 이제부터 황씨를 멀리할 것이다.”

 천력(天曆) 원년(1329) 중천축사의 주지 소은(笑隱)스님이 관아에 글을 올려 칙명으로 대 용상사(龍翔寺)를 창건하였다. 그 일로 그를 대신할 중천축사의 주지 세 사람을 천거했는데 황제는 어필을 들어 스님을 인준하자 선정원(宣政院)에서 임명장을 가지고 예의를 갖추어 스님을 초청하였다. 그후 얼마되지 않아 입적하였는데 신통한 일이 많았다고 한다.

 

 

14. 지식에 막혀 깨닫지 못하다가 / 각 종성(覺宗聖)스님

 

 전당(錢塘) 광화사(廣化寺)의 주지 각 종성(覺宗聖)스님은 경산사 본원(本源)스님께서 손수 도첩을 내려주신 제자이다. 여러 제자 가운데 가장 어린 까닭에 항상 다른제자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았으므로 더욱 마음을 가다듬고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마침내 사명사 몽당(夢堂)스님에게 배웠다. 당시 괴석(怪石)스님은 대자사(大慈寺)의 주지로 있으면서 굳이 그를 자시자로 불러들였다. 얼마 후 다시 석실(石室)스님에게 시를 배웠는데 시의 경지가 나날이 심오해져 조자앙(趙昻), 우백생(虞伯生), 장중거(張仲擧)와 같은 이도 모두 그의 시를 칭찬하였다. 더욱이 청하고 신의가 두터워 한 끼라도 남에게 얻어 먹는 일이 없었으며 사람과 약속을 하면 아무리

비바람이 부는 날에도 어기지 않았다.

 중년이 되어 배움이 끊긴 종지를 탐구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중모(仲謀)스님을 찾아갔으나 깨닫지 못하고 마침내, 본각사(本覺寺) 남당(南堂)스님을 찾아가 법을 물으니 남당스님이 말하였다.

 "너는 원래 대사(大事)를 깨친 사람이지만 듣고 본 것이 너무 많아 가슴이 막혀 본지풍광이 나타나지 못하는 것이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새벽에는 죽 먹고 점심 때는 밥 먹는다.”

 "스님께서는 큰 풀무를 열어 놓으시고 성인이나 범인이나 모두 녹여 단련하십니다. 저같은 사람이야 쓸모없는 한덩이 구리나 무쇠같다지만 이속에 들어왔으니 단련하여 아름다운 릇으로 만들어주기를 바랍니다. 만일 할수 없다면 이는 스님 풀무에 열기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남당스님은 그의 정성스럽고 간곡한 마음에 감동되어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나의 이 법문(法門)은 그대로 깨닫는 것을 귀중히 여기지 세속적인 지혜와 총명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매서운 의지를 내서 일도양단한다면 무슨 구리를 단련하고 무슨 그릇을 만들고 할 것이 있겠는가? 이 두가지 길을 버리고 '부모가 낳아주기 전[父母未生以前]'의 소식대하여 한마디 해보아라!”

 이에 종성스님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후 옛사람을 본받아 미륵불상을 머리에 이고 아침 저녁으로 도를 행하며 불호(佛號)를 우고 도솔천 내원궁에 왕생하게 하여 달라 기원하고 시를 지어 그의 뜻을 피력하였다. 62세에 병이 들자 주변에 명하여 평소 지은 시와 문장을 가져오라 하여 모두 불태워 버린 후 열반하였다.

 스님은 황암(黃岩) 사람인데 속성은 채씨(蔡氏)이며 괴석스님의 법을 이었다고 한다.

 

 

15. 강심사(江心寺) 동당(東堂)의 고승들

 

 무언(無言)스님이 강심사(江心寺) 동당(東堂)요사에 머물 때 문에다가 방(榜)을 써붙였다.

 "재를 하기 전까지는 경을 읽고 좌선을 하며 재를 마친 뒤에는 손님을 접대하고 일을 한다.”

 그러나 절의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어쩌다가 스님과 마주하여 당대의 주지를 칭찬하거나 훼담하는 자가 있으면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러나 총림의 전고(典故)와 선문의 강요(綱要)에 대해서는 하루종일 이야기하여도 피곤할 줄을 몰랐다. 그는 근대에 동당(東堂)으로서의 체모를 갖춘 분이었다.

 어느날 목욕을 마치고 대나무 평상에 누워 웃으면서 혼자말로 "늙는다는 건 좋은게 아니로군.”하였는데 흔들어보니 이미 입적한 뒤였다.

 그 당시 무제(無際) 스님도 동당(東堂)에 있었으며 석실 암(石室岩)스님이 주지를 맡아있었다. 암 스님은 학문이야 부족하였지만 매우 진솔한 인물이었다. 절의 노승들은 모두가 스님(무제)의 제자였기에 스님은 주지에게 경솔히 대할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으레 초하루와 보에 설법을 마친후 모두들 스님의 처소에 와서 절을 올릴 때마다 반드시 그들에게 주지의 상법문이 어떻더냐고 말하도록 한 후 정담어린 말씨로 그들에게 말하였다.

 "오늘 장로의 상당법문은 좋은 말씀이다. 그의 법문은 주지직을 맡아보는 데 규모가 있고 문도를 거느림에 법도가 있는 말씀이다.”

 기(岐)상좌는 명암 희(明巖熙)스님이 손수 도첩을 내려준 제자이다. 어느날 욱(郁) 산주의 과려도(跨瘻圖 : 당나귀 타고 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를 들고 무제스님을 찾아와 제(題)를 청하자 스님은 서슴없이 붓을 잡고 게를 지었다.

 

절름발이 당나귀 시내 다리 지나다가 발을 헛디였을 때

완두콩을 진주로 잘못 알았지

아이들은 집안추태 감출줄 몰라서

도리어 양기노스님을 웃겨버렸네.

策蹇溪橋蹉脚時  誤將豆作眞珠

兒曹不解藏家醜  笑倒楊岐老古錐

 

 이어 기상좌에게 물었다.

 "말해보아라. 당시 양기스님의 한바탕 웃음이 어느 곳에 떨어졌는가를?”

 기상좌가 말하였다.

 

바람도 없는데 연꽃 잎새 흔들거림은

필시 물고기의 움직임 때문.

無風荷葉動  必定有魚行

 

 무제스님은 손바닥을 탁 치며,

 "돌아가거든 너의 스승에게 이 말을 분명하게 전하라.”

고 하였다. 학인을 가르치는 스님의 방편은 과연 이와 같았다. 기상좌는 바로 대매사(大梅寺)의 중빈(仲邠)스님이다.

 

 

16. 허곡(虛谷)스님의 인연과 수행

 

 허곡(虛谷)스님은 무주(婺州) 사람이다. 정자사 석림(石林)스님 회하에 있으면서

내기(內記) 소임을 맡아보다가 기실(記室)로 승진되었는데, 가난한 가운데서도 어렵게 공부하며 춥거나 덥거나 한결 같았다. 지난 날 태백사(太白寺)에서 여름 안거를 하면서 동정료(東淨寮)의 수건을 훔쳐 속옷을 만들어 입은 적이 있었는데, 후일 세상에 나와 앙산사에서 30년, 경산사에 6년 동안 주지를 지내면서도 동정료의 수건에 관하여 일체 시제(詩題)로 쓰지 않으니 뜻은 그때의 가난한 생활을 되새기기 위함이었다.

 젊은 시절 꿈을 꾸었는데 정자사 나한당(羅漢堂)에 들어가 동남쪽 모퉁이에 이르

니 갑자기 존자 한 분이 나타나 대들보 사이의 시를 가리키면서 스님에게 보여주

다.

 

한 방은 고요한데 절정이 열리어

여러 봉우리는 그려놓은 듯 이끼보다도 푸르러라

한가히 패다엽경 펼쳐본 후에

백군데 기운 가사장삼 마음대로 재단하네.

一室寥寥絶頂開  數峰如畫碧於苔

等閒翻罷貝多葉  百衲袈娑自剪裁

 

 처음에는 그 시에 담겨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으나 앙산 · 경산 두 사찰의 주지

가 된 후에야 알수 있었다. 앙산사에는 패다엽경이 보존되어 있고 경산사에는 양기스님의 법의가 보존되어 있었다.

 아! 스님의 출처는 나한존자가 그의 전생에 이미 정해놓은 것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자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그처럼 될 수 있었겠는가?

 

 

17. 관음기도로 얻은 기쁨 / 절조 휘(絶照輝)스님

 

 온주(溫州) 수창사(壽昌寺)의 절조 휘(絶照輝)스님이 정자사의 동정료(東淨寮)에서

여름 안거를 할 때 신벽(蜃璧)에 관음상 수묵화가 있었다. 스님은 밤마다 절을 올리고 간절히 기도하였는데 갑자기 정병의 물이 벽 틈에서 솟아나오는 것을 보고 온몸에 기쁨이 가득하였다. 그후론 경지가 더욱 깊어지고 지혜[智鑑]가 밝아졌다. 한번은 게송을 지었다.

 

공부해도 방원(方圓)의 경지에 이르지 못해

홀로 난간에 기대 몇번이나 시름하였던가

오늘이 사흘이면 내일은 나흘

머리 위엔 눈서리 쉽사리도 얹혀지네.

工夫未到方圓地  幾度憑闌獨自愁

今日是三明日四  雪霜容易上人頭

 

 공부에 뜻을 둔 자가 이 게송을 들으면 모두 분발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이렇게 정성으사람을 감동시켰으니, 비유하자면 비상이란 그 자체가 독이어서 먹는 사람은 다 죽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