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암잡록 下 18~25.
18. 주지로 정해지는 인연
송 도종(宋 度宗 : 1265~1274)은 몽고군의 공격이 치열하자 도사에게 명하여 큰 제사를 마련하고 하늘에 글을 올려 국가 중대사를 물었다. 그 당시 고(高)도사가 하늘에 상소를 올렸지만 오랫동안 대답을 듣지 못하였다. 제사를 끝마친 후 그 까닭을 묻자 고도사는, 하늘 문이 열리지 않은 것은 경산사의 48대 주지를 정하는 일로 하늘의 대답이 늦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호암(虎岩)스님이 경산사 주지로 있을 무렵 적조(寂照)스님은 수좌로 있었는데 호암스님은 항상 법좌에서 이 일을 들추어 대중에게 자랑하였다.
"주지라는 이 자리가 어찌 우연으로 48대까지 이르겠는가. 그것은 당연히 하늘에서 이미 정해놓은 것이다.”
적조스님은 그 말을 들었을 때 속으로 아니라고 생각하였는데 막상 자신이 경산사의 주지가 되고보니 그 예정된 48대에 해당하였다.
지난날 운거사(雲居寺)의 즉암(即菴)스님은 토지신이 현몽하여,'다만 죽 한 끼의 인연'이라고 하였는데 결국 현몽대로였다.
여러곳의 주지란 그 과보가 추호의 오차도 없는데 부질없이 남의 자리를 밀쳐내고 빼앗으려다가 갇히는 몸이 된 자 없지 않다. 하늘에서 미리 정해놓은 이름과 토지신의 현몽이라는 이 두 가지 일을 듣는다면 날카로운 기세는 조금이나마 거두어 들이게 될 것이다.
19. 천목사 괴일산(魁一山)의 후신
천목사(天目寺)에 사는 괴일산(魁一山)은 소주(蘇州) 사람으로 박학다재하며 천동사(天童寺)의 평석(平石) 노스님과 절친한 사이였다. 총림의 전성시대를 맞아 모두들 세상에 나아갔지만 괴일산은 깊은 산골짜기에 홀로 살며 속인과 사귀지 않으니 대매사(大梅寺) 나찬(懶瓚)스님의 옛 풍모를 지녔다. 그러나 아랫마을 시주 홍씨 집안의 자제만은 왕래를 허락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홍씨는 괴일산이 작은 가마를 타고 그의 집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고 그 이튿날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응괴(應魁), 자를 사원(士元)이라 하였다. 어려서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부인을 맞아 아이를 기를 때까지는 전생의 기미가 전혀 엿보이지 않다가 30세가 되자 갑자기 반성하여 평소에 하던 일을 모두 바꾸었으며, 승려 명유나(明維那)와 함께 동천목산(東天目山) 꼭대기에 암자를 짓고 선정(禪定)을 익히며 화전을 일구고 걸식을 하는 일까지 모두 몸소 하였다. 고행으로 늙은 스님일지라도 그처럼 독실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정(至正) 정유년(1357) 북쪽 오랑캐에게 경산사가 소각당했을 때 나는 그의 처소를 찾아갔는데, 그의 용모는 숙연하고 예의가 있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대하였다. 나는 까닭을 물어본후에야 그가 괴일산의 후신임을 알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그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전신은 천동사의 평석(平石) 노스님과 둘도 없는 사이였다. 노스님의 나이 아흔이지만 아직도 이목이 밝으니 그대가 게를 지어 보낸다면, 한 꿈에 두 번 깨어났지만 꿈과 깸이 한결같음을 보여줄 수 있지 않겠는가.”
이에 사원(士元)이 게를 지었다.
천동사의 노스님 평석(平石)에게 전하노니
한생각은 이제도 옛날도 아니로다
단풍나무 다리 위에 깊은 밤 종소리를 듣자니
오강은 예전처럼 하늘에 잇닿아 푸르구려.
寄語天童老平石 一念非今亦非昔
欲聽楓橋半夜鍾 吳江依舊連天碧
그러나 이 게송이 전해지기도 전에 노스님은 입적하였다.
20. 인과를 경시한 업보 / 경산사 혜주(惠洲)스님
경산사의 제점(提點)을 맡은 혜주(惠洲)스님은 호암(虎岩)스님의 문도로서 매우 총명하여 일처리를 잘하는 재간을 지녔다. 그는 절 일을 맡아본 30여 년 동안 금전과 양곡을 멋대로 썼다. 누군가 인과응보로 충고하면 그는 “가득히 실려오는 뿔달린 축생 가운데 나는 뿔 한 쌍만 달면 되지!”라고 빈정거렸다.
지정(至正 : 1341~1367) 초에 고납린(高納麟)이 선정원(宣政院)의 사무를 맡게 되자 그의 아랫사람인 정가(淨珂)스님은 그의 비행을 낱낱이 기록하여 고발하였다. 이에 그의 죄상이 드러나자 곤장을 쳐서 환속시켰다. 그 후 화성원(化城院)에 숨어 살다가 풍증을 앓아 주먹은 마치 고슴도치처럼 부들부들 떨면서 오므라들고, 두 손을 꼭 쥔 채 양 볼을 감싸안고 두 다리는 엉덩이 뒤에 바싹 붙였다. 그의 병을 간호하는 자가 펼치려하면 아픔을 참지 못하였으며 밤낮으로 신음소리만 들려올뿐이었다. 이처럼 3년을 지내다가 드디어 죽었던 것이다.
혜주는 평소 가벼운 마음으로 사무를 처리하고 인과를 경시하여 결국 “수많이 실려오는 뿔달린 축생 가운데 나는 뿔 한 쌍만 달면 되지.”하던 말같이 되었다.
내생각으로는 삼도(三途)의 업보가운데 오랜 세월이 흐르다보면 한마리 짐승으로 태어나 짐승으로 가는 동안 무량겁에 이르도록 줄곧 뿔을 달고 태어날 것이다. 어찌 한 생에 그치겠는가. 모든 사찰의 재물을 관리하는 자들은 혜주의 전례를 거울삼아야 할 것이다.
21. 청렴하고 유능한 제점승* / 지문사 이 정당(彝正堂)
홍무(洪武) 8년(1375) 가을 나는 도반 보복 원(報復元)스님을 찾아 상산(象山) 지문사(智門寺)를 갔는데 그 곳에 이 정당(彝正堂)이라는 제점(提點) 승려가 있었다. 그는 40여 년 동안 절 재물의 출납을 맡아보았는데 청렴하고 유능하여 계획과 결단에 규모가 있었으며 대중을 잘 무마하여 여섯 명의 주지를 겪으면서도 시종여일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그해 7월 24일 밤 꿈에, 두 동자가 책상 앞에 나란히 서 있기에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느냐고 묻자 동자는 제점에게 금전출납부를 계산해 보려고 왔다는 것이다. 이에 나에게는 계산할 수 있는 장부가 없다고 말하다가 깨었는데,다시 잠이 들어 같은 꿈을 꾸게 되었다. 그 이튿날 방장실을 찾아가 어젯밤 꿈이야기를 한 후 방장스님에게 말씀올렸다.
“간밤에 이와 같은 꿈을 꾼 것은 올해 고사(庫司)를 맡아보는 자가 게을러서 상주재산의 장부를 만들어놓지 않았기 때문일것이니, 스님께서는 그를 독촉하심이 좋겠습니다.”
그가 말하는 태도를 보니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빛이 없었다. 얼마 후 들어보니 이 정당이 그의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미끄러져 술 취한 사람처럼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밤중이 되어서야 다시 깨어나 황급하게 뒷일을 정리한 후 눈을 감았다고 한다.
이 정당은 지문사에 공로가 있는 사람이라 하겠으니, 임종때까지도 자기일에 충실하였다. 그러나 요즈음 절 일을 맡아보는 많은 사람들은 상주물을 보면 마치 소리개가 먹이 낚아채듯, 제비가 벌레 잡아먹듯 하며 인과의 죄보를 개의치 않는데, 이
이야기를 들으면 반드시 행동을 고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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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점(提點) : 상주물 관리소임.
22. 중년에야 뉘우쳐 계행을 닦다 / 청차 일계(淸泚一溪)스님
경산사(徑山寺) 한 노스님의 법명은 청차(淸泚)이며, 법호는 일계(一溪)이다. 젊은 시절에 계율을 지키지 않고 음식을 가리지 않다가 중년이 되어서야 스스로 반성하게 되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면 얼마나 살 수 있을까? 어느 날 아침 덧없는 저승사자가 밀어닥치면 어떻게 쫓아버릴 수 있겠는가?”
마침내 모아두었던 의복과 재물을 모두 거두어 보경사(普慶寺) 동편에 관음당(觀音堂)을 짓고 청정한 계행을 닦으면서 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였다. 그 뒤 몇년이 지나 손수 금강반야경을 쓰다가 '3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는 구절에서 붓을 쥔 채로 반듯이 앉아 입적하였다.
지정(至正) 정유(1357)에 북쪽오랑캐가 보경사와 부근의 민가를 불태웠으나 관음당만은 그대로 있었다. 부처님 말씀에 선악의 응보는 마치 그림자나 산울림같다고 하셨는데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23. 다른 말씀 없으시고 / 백운사(白雲寺) 도(度)스님
처주(處州) 여수현(麗水縣) 백운산(白雲山) 백운사(白雲寺) 도(度)스님은 화정사(華頂寺) 무견(無見)스님의 문하에서 오랫동안 공부하였으며 일평생 굳건히 정진하여 언제 어디서나 뛰어났다. 그는 말 일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구차스럽게 법어를 청하는 학인이 있으면 그저 몸소 대사(大事)에 진력하라는 한마디 뿐 다른 말이 없었다.
근래 절에서 주지하는 이들은 옛사람의 말을 긁어모아 자기 말인양 떠들어대며 후학의 정신을 뽑아놓는다. 그러다가 눈 밝은 사람이 따지고 들면 흡사 도적놈이 주인집 물건을 훔쳐 다시 주인집에 팔려다가 훔친 물건이라는 증거가 분명해져 다시는 변명하지 못하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몸둘 바를 모르는 꼴과 같다. 이런 류의 사람과 도스님의 기용(機用)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차이는 하늘과 땅 사이다. 내 듣기로 그의 선실로 들어간 사람은 매우 많다고 하는데 그의 종지를 깨달은 자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24. 일생동안 참선하여 / 해회사 옹(翁)스님
해회사(海會寺) 옹(翁)스님은 임해(臨海) 사람으로 30세에 집을 버리고 불도에 들어와 경산사 호암(虎岩)스님 문하에서 삭발하고 승복을 입었다. 처음 전단나무 숲에 갔다가 법당으로 돌아오면서 순찰하는데 누군가 그의 행동이 촌스러운 것을 보고서 뒷전에서 수군대자 스님은 분발하여 그 이튿날 바로 천목사(天目寺) 중봉(中峰)스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였다. 침식을 잃고 힘을 다해 참구하였으며, 밤이 이슥하여 잠이 몰려와 물리치기 어려우면 어두운 바닥에 염주를 뿌려놓고 몇번이고 발로 더듬어 찾아내곤 하였다.그러나 오랫동안 정진하였지만 깨친 바 없었다.
당시 동주(東州) 스님은 호구사(虎丘寺)에, 고림(古林) 스님은 개선사(開先寺)에, 동서(東嶼)스님은 풍교사(楓橋寺)에 주지로 계셨는데, 스님은 소주(蘇州)를 찾아가 세 노스님의 문하를 두루 출입하여 점차 깨달음의 경지에 다가갔다. 그후 용화사(龍華寺)의 주지가 되어 고림 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93세에 육왕사(育王寺)에 가서 횡천(橫川)스님의 부도를 지켰다. 그러던 어느 날 평지에서 넘어져 왼쪽 발목을 삐어 걷지 못하게 되자 항상 평상에 앉아 달밝은 밤이면 낭랑히 옛분들의 게송을 읊었는데 제자 환(渙)스님이 물었다.
"일생 동안 참선하다가 이제와서는 그것을 쓰지 못하고 도리어 게송을 읊어 마음을 달래십니까?”
“듣지도 못하였느냐? 대혜(大慧) 스님이 병환으로 신음할 때 곁에 있던 사람들이 '일생 동안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하더니만 이제 이처럼 되었습니다' 하자 스님께서는 '어리석은 자의 신음은 이렇지 않더냐?' 하신 말씀을.”
환스님은 절을 올렸다. 스님이 입적하여 다비를 하자 남다른 향취가 사람의 코를 찔렀다.
25. 사재를 용납치 않은 주지 / 동산사 노산(魯山)스님
동로산(東魯山)은 사명(四明)의 사람으로 인품이 강직하고 탐욕스럽지 않아 사람들은 그를 남달리 공경하였다.
세간에 나와 동산사(東山寺)의 주지가 되자 공부할 때 모아둔 자기 재물을 모조리 쓸어다가 동산사 토목공사에 써서 얼마 후 집들이 새로워졌는데, 어느 날 갑자기 등창이 생겼다. 곁에 있던 승려들이 훌륭한 의원을 불러 들여 치료하자고 권하였지만 말을 듣지 않고 오직 편안히 앉아 절의 많은 일들을 처리하였다. 그는 또한 자신이 죽으면 장례에 필요한 옷과 물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절 재산에 넣으라고 하니 그 절 승려들은, 스님께서 새로 받아들인 제자가 십여 명이나 되는데 만에 하나라도 스님께서 돌아가신다면 상복 하나 마련할 길이 없다고 하였으나 스님은 듣지 않
았다. 또다시 간청하자 그제서야 한 사람마다 곡식 한 섬을 나누어주도록 하였다.
스님이 열반하자 대중들은 슬픈 마음을 금하지 못하였다.
곰곰히 살펴보니, 요즘 스승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대개가 새로 주지를 맡게 되면 소작인을 모두 모아놓고 소작문서를 뒤바꾸면서 돈을 받아 절 비용에 충당하고 또한 날짜를 정해 놓고 이자를 거둬들이며 죽을때 가서는 온갖 물건을 자기 측근에게 나누어 주므로 장례를 치른 후엔 으레껏 절 재산에 손해를 끼친다. 아! 노산스님과는 큰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