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암잡록 下 40~44.
40. 흩어져 가는 선방 요사채 분위기
태정(泰定 : 1324~1327) 초에 선정원에서 가흥(嘉興) 본각사(本覺寺)의 영석 지(靈石芝)스님을 기용하여 정자사(淨慈寺)의 주지로 임명하였는데 스님은 당시 84세였으며 모든 이에게 고불(古佛)과같은 추앙을받았다.
나는 경산사에서 정자사까지 모셔다드리고 전례에 따라 그곳에 방부들일 수 있었다. 당시 그 곳엔 500명에 가까운 대중이 있었으며 태온(台溫)의 향장(鄕長) 충경초(忠景初)라는 자가 본산(경산사)의 수좌로 있었는데 나이와 덕망이 높아 많은 사람이 귀의하였다. 나는 당시 학인의 신분으로 있는 터라 우연히 행랑에서 책장수를 만나 「장자(莊子)」 한 권을 샀다. 장주(藏主)의 요사채로 돌아와 위로실(圍爐室 : 응접실)에 들어가 장자를 읽으면서 참선 공부에 지장이 될까 걱정하던 참이었다. 마침 충 수좌가 외출했다가 돌아와 매우 불쾌한 뜻을 표하며 정좌한 후 나를 그의
앞에 세워놓고 꾸짖었다.
"그대는 처음 대중 속에 들어와 참선은 하지 않고 도리어 잡학(雜學)에 힘쓰는가.
게다가 또한 선원(禪院)의 위로실이란 손님을 맞이하고 불법을 논하는 곳인데, 이곳에서 외서(外書)를 읽어서야 되겠느냐.”
20여 년이 지난 뒤 다시 정자사를 찾아가 보니 요사채 위로실에 나이 어린 승려와 노승이 뒤섞여 거문고를 켜거나 바둑을 두거나 아니면 먹물을 핥으며 산수화를 그릴 뿐, 외서조차 뒤적거리며 읽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하물며 참선공부를 하는 자를 찾아볼 수 있겠는가.
아! 충수좌의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난 날 묘희(妙喜)스님께서 양서암(洋嶼庵)의 대중방에 걸어놓았던 방문(榜文)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뒤에 충수좌는 무주(婺州) 화장사(華藏寺)의 주지가 되었다.
41. 「나호야록」에 실린 염송에 붙이는 소견
「나호야록(羅湖野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오거사(烏巨寺)의 설당(雪堂)스님이 정(淨)스님에게 서신을 보냈다.
"요사이 「선인전(禪人傳)」을 살펴보니 그대의 염송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중에 한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무엇이 불전 안의 일입니까?' 라고 물은 것에 대하여 그대는 이렇게 염송하였다.
하나의 해골 속에
하늘땅을 떠받쳐 주는 사람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須知一个髏裡
而有撐天地人
그런데, 나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는 잘못된 기록이 아닌가 의심이 된다.
양기(楊岐)의 자손들은 결코 어떤 인지[鑑覺]도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만일 인지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음계(陰界)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데 어떻게 선문의 특별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도 게송을 하나 지어 부질없이 그대의 귀를 더럽힐까 한다.
홀로 위태로운 경지에 서지 않고서는 기연이 높지 못한 법
조주 노스님은 흠집없는 하나의 옥
당두노인 불전 속의 일을 곧바로 가리키시니
어른거리는 눈 속에 헛꽃을 모두 없애 주었도다.
不立孤危機未峻 趙州老子玉無瑕
當頭指出殿裡底 剗盡茫茫眼裡花
내 생각으로는 정공이 '인지'를 인정한 것에 대한 오거스님의 비판을, 나호스님이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까지는 잘한 일이다. 그러나 그(나호)가 오거화상의 이 송이 선문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데 대하여서는 반드시 잘한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또한 '조주노자옥무하(趙州老子玉無瑕)'와 '잔진망망안리화(剗盡茫茫眼裡花)'라는 구절도 인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이를 애써 참지 못하고 오거화상의 송에서 네 글자를 바꾸어 송을 하는 바이니 이것도 후학의 비판을 기다린다.
홀로 위태로운 경지에 서지 않아야 비로소 기연이 높아지는 법
조주 노스님은 옥에 흠집이 생겼네
당두노인 불전 속의 일을 곧바로 가리키시니
어른거리는 눈 속에 헛꽃이 덧붙는구나.
不立孤危機始峻 趙州老子玉生瑕
當頭指出殿裡底 添得茫茫眼裡花
42. 대혜스님의 후예로 지조를 지키다 / 서소담(瑞少曇)스님
서소담(瑞少曇)은 민현(閩縣)의 사람이다. 강직과 절개로 자신을 지키며 명리를 하찮게 여겨 절의 살림을 모두 집사에게 맡겼다. 그가 거처하는 방은 언제나 조용했으며 혼자서 선송(禪誦)을 즐겼는데 그의 문에 오르는 사람은 모두 노련한 선승들이었다.
지순(至順 : 1331~1332) 연간에 의연히 절을 떠나 금릉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용상사(龍翔寺)의 소(訴)스님을 방문하자 소스님은 그를 수좌로 맞이하였다. 때마침 이충사(移忠寺)에 주지자리가 비어 소스님이 적극 추천하였으나 스님은 굳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스님께선 생각지 못하시는군요. 그곳은 송나라의 간신 진회(秦檜)*의 제사가 맡겨진 절입니다. 진회는 개인 감정때문에 권력을 빙자하여 대혜(大慧)스님을 매양(梅陽)과 형양(衡陽)으로 귀양 보냈던 자입니다. 내 비록 변변치 않으나 대혜스님의 후예로서 어떻게 차마 진회의 제사를 이어 받들 수 있겠소? 스님께선 참으로 생각지 못하십니다.”
당시 큰 선비나 덕망높은 선승들은 이 말을 전해듣고 극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후일 그는 귀종사(歸宗寺)의 주지로 갔다가 세상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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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회(秦檜) : 남송 고종 때의 재상으로 충신 악비(岳飛)를 무고로 죽이고 주전파(主戰派)를 탄압하여 금(金)나라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었다. 당시 대혜스님 등의 승려들은 주전파의 입장을 동조하여 귀양보내졌다.
43. 생사는 무상한 것
형경남(亨景南)이라는 자는 남창(南昌) 만씨(萬氏)집안 자손으로, 어려서 내복산(來福山) 단(端)스님에게 귀의하여 백장사(百丈寺) 여암 우(如菴愚)스님과 용상사(龍翔寺) 소(訴)스님의 회하에서 공부하였으며 선정원의 추천으로 향성사(香城寺)에서 개법(開法)하였다. 그 사찰은 오랫동안 폐사閉寺로 묵어오다가 일신되었으며, 스님은 그 후 상람사(上藍寺)로 옮겨갔는데 도풍이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78세가 되던 어느 날 곁에 있는 승려에게 명하여 물을 끓여 목욕한 후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편히 앉아 게를 쓰고는 주장자에 기대 입적하였다. 다비를 하니 단단한 사리가 매우 많이 나왔는데, 그의 법손 제성(濟盛)이라는 스님이 주장자와 승복과 사리를 거둬 내복산에 부도탑을 세워 갈무리하였다.
상법 시대 이후 행각승들이 어느 곳에 가서 자리를 잡으려할 때는 반드시 생사의 일이란 몹시 무상하고 신속한 것이라고 한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구도 정신이 간절한 듯하지만 승적(僧籍)을 얻은 후엔 지난날 스스로 노력하겠다던 말을 실천하지 않고 명리만을 분주히 좇을뿐이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오늘날 경남스님은 임종 때에도 이와 같았으니 평소의 수행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44. 적조(寂照)스님의 문장
스승 적조(寂照)스님은 젊었을 때 허곡(虛谷)스님과 함께 소주(蘇州) 승천사(承天寺)의 각암 진(覺菴眞)스님에게서 공부하였다. 그런데 그곳을 떠나온 후에야 깨침을 얻게되어 동정호(洞庭湖)를 생각하면서 부(賦) 한 수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었다. 그 시는 실제로는 향상사(向上事)를 드러낸 것으로서 특별히 남다른 문장을 구사하고 있다.
맑은 연기 푸르고
파도는 망망한데
동정호는 아득하여 하늘과 하나되었네
위로는 일흔두 송이 푸른 연꽃 피어 있고
아래엔 삼만육천이랑 은빛 물결
그 가운데에 한 사람
원앙새 수놓인 황금옷 입고
천리마 수레에다 명월주 귀걸이라
그대로 우주 조화와 함께 날으노라
옛일을 생각하니, 하늘바람 나를 실어 그 집 위에 올려놓고
황금줄기에 내린 8월의 맑은 이슬 나에게 마시게 하고
곤륜산의 영롱한 오색 구슬 나에게 요기하라네
내 골수 바뀌어지고
내 간장도 말끔히 씻기워
깨끗한 마음자리 항시 청량쿠나
사방 팔방 이 우주가 적기도 하려니와
만고세월 3광(三光 : 日月星辰)도 시들시들 늙는구나
오랫동안 볼 수 없으니 속절없이 슬픈 이 내 마음
오랫동안 볼 수 없으니 속절없이 슬픈 이 내 마음
烟蒼蒼 濤茫茫
洞庭遙遙天一
上有七十二朶之靑芙蓉
下有三萬六千頃之白銀漿
中有人兮 體服金鴛鴦
游龍車 明月璫
直與造化參翶翔
憶昔天風吹我登其堂
飮我以金莖八月之瀣沆
食我以崑丘五色之琳琅
換爾精髓
滌爾肝腸
灑然心地常淸凉
非獨可以眇四極輕八荒
抑且可以老萬古淍三光
久不見兮空慨慷
久不見兮空慨慷
또한 유학자를 위해 「십현영매시도(十賢詠梅詩圖)」에 붙인 글[題]은 다음과 같다.
시경의 소남편, 서경의 열명편을
옛날 공자께서 정리하셨을 때는
모두가 열매만을 말하였을 뿐
꽃은 말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양나라 하손에서
당송의 십군자까지는
소남을 읽고 열명편을 외우고
공자의 학문을 익혔는데도
그들의 시가며 문장에 표현된 바는
모두가 꽃만 이야기하였을 뿐
열매는 말하지 않았다.
아!
세상의 도가 옛날 같지 않고
인심이 더욱 야박하고 거짓된 것은
근본을 두텁게 하지 않는 까닭으로
모든 게 으레 이와 같으니,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감회에 젖어든다.
詩之召南 書之說命
孔子昔所刪定也
皆言其實 而不及其花
由梁何遜 至唐宋十君子者
讀召南 誦說命 習孔子之業者也
形之詠歌述諸章句
皆言其花 而不及其實
噫 世道不古 人心益薄且僞
其不敦本也 例皆如是
余觀是圖 竊有惑焉
조송설(趙松雪), 우소암(虞菴) 등도 이 글을 보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원수(元叟 : 적조스님)스님은 식견과 경지가 매우 높아서 붓가는 대로 말을 내뱉아도 자연히 고금에 뛰어난 문장이 되니, 우리가 애를 써 말해 보아도 스님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적조스님은 임제의 정통 종지를 전해받은 분이다. 그가 장난삼아 문장을 가지고 놀며 선문의 뜻을 엮어내는 일은 그저 심심풀이일 뿐이었는데도 큰 선비들이 그를 이처럼 존경하였다. 무문찬(無文粲)스님은 "요즘 총림에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자들이 궁할 때는 선승의 면모를 잃지 않다가, 사정이 피고 나면 '진짜 선지식'이 되버린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통절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