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원오심요圜悟心要

원오심요 下 42.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쪽빛마루 2016. 3. 12. 20:33

42.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일반적으로 생사의 흐름을 끊고 무위의 언덕을 건너는 데에는 다른 특별한 것이 없다. 그저 당사자가 맹렬한 근기로써 자기의 흉금을 내걸고 일체의 유위(有爲) · 유루(有漏)는 헛꽃과 같아 원래 참다운 성품이 없는 줄 확실히 아는 것만을 귀하게 여길 뿐이다. 확실하게 비춰보는 마음으로 스스로 돌이켜 관찰하고 확 뒤집어보아서 붙잡고 자세히 살펴서 오래하다 보면, 분명히 깨달아 들어갈 곳이 있으리라.

 이것은 결코 다른 물건이 아니며, 다른 사람이 힘을 들여 나를 깨닫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는 마치 천 근의 짐을 걸머지는 사람에게는 그만한 역량이 있어야만 감당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약 기력이 약하면 그 짐에 깔려버린다. 그 때문에 큰 사람이 큰 견해를 갖추고 큰 지혜를 가진 자가 큰 작용을 얻는다고 하였던 것이다.

 대장부라면 정신을 차려야지 어찌 산(山) 귀신의 굴 속에서 살 궁리를 하겠는가. 언제 나와서 깨달을 기약이 있으랴. 헤아릴수도 없는 큰 일을 걸머지고 망정과 견해를 초월하여 높고 뛰어난 뜻을 발현해야 한다면, 단박에 투철히 벗어나 시작없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망상 · 윤회 · 피아 · 득실 · 시비 · 영욕 · 더럽고 탁함 등등의 마음을 떨쳐버려야 한다. 그리하여 더럽고 깨끗한 두 쪽을 모두 의지하지 말게 해야 한다. 단박에 오롯이 벗어나면 한 물건에도 의지하지 않으니, 모든 성인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때, 중생과 부처 또는 세간과 출세간이 드러난 적이 없는 곳에서 한 생각도 나지 않고 앞뒤가 끊기게 된다.

 본지풍광을 밟고 본래면목을 분명하게 보아 깨치니, 단박에 견고해져서 털끝 만큼도 견해의 가시가 없고 안팎이 융통하여 호호탕탕하게 큰 편안함을 얻는다. 여기에서 몸을 돌려 숨을 토하고 이쪽편으로 오면, 자연히 일상생활 속에서 모든 행위를 할 때 낱낱이 근본으로 돌아가니, 어찌 이것이 분수 밖의 일이겠느냐.

 밥 먹고 옷 입으면서 세간법을 닦는다 해도 여여하지 않음이 없고, 확연하게 꿰뚫지 못함이 없으며 깨달은 그 당체와 상응하지 않음이 없다. 그런데 다시 무슨 고저와 향배를 따지겠느냐. 잠깐이라도 견해의 가시가 생기면 바로 목숨[命根]을 찔린다.

 조사와 옛날 큰 스님들이 방 · 할을 행하는 등 백 천억 가지 작용이 딴 뜻에서가 아니었다. 다만 사람들에게 완전히 죽은 사람처럼 스스로 투철히 벗어나 스스로 쉬게 하고자 하였을 뿐이다. 어찌 자기만 깨닫고 세상을 제도하는 것은 전혀 쉬어버렸는가. 애쓰는 가운데 여가가 있으면 비원(悲願)을 잊지말 것이니, 이것을 밀어서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을 일깨워주고, 인간 세상에 살되 매이지 않은 배처럼 떠다니면 무심한 도인이라 부른다.

 지금 아직 단박에 깨닫고 단박에 밝히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우선 몸과 마음을 놓아버려 텅 비게 해야 한다. 오래도록 텅 비어 고요하다 보면 갑자기 칠통을 타파하고 통 밑이 빠진 듯한 곳에 이르는 것도 어려울 것 없다. 그러니 더구나 스스로 몹시 영리한 근성을 갖추고 불사(佛事)를 걸머져 수승하고 기특한 인연을 짓는 일임에랴. 이것이 어찌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서 되는 것이겠느냐.

 그러므로 옛분이 말하기를 “도를 배우려면 반드시 무쇠로 된 높이어야 하니, 착수하는 마음에서 결판내라”고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