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천동종용암록
평창 천동종용암록
- 담연거사에게 부치는 편지 -
우리 종문의 설두(雪竇)와 천동(天童)은 공자 문하의 자유(子游)와 자하(子夏)에 비길 만하고, 두 스님의 송고(頌古)는 시단의 이백과 두보에 비길 만합니다. 세상에서는 설두를 한림의 재주[翰林之材 : 문사로서의 재질]를 가졌다고 하나, 그 말은 아마도 '나의 꽃은 땄지만 나의 열매는 줍지 못했다'는 격일 것입니다.
또 만 리의 땅을 가보지 않고 만 권의 책을 읽어보지 않고 공부시(工部詩)를 열람하지 않았어도 그 말이 넓고 풍부하다고들 하니, 그것은 천동노인의 송을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그 말 한 조각 글자 한 획이 모두 불조의 깊은 연원에서 흘러나왔으므로 학인들이 헤아리기엔 어렵습니다. 「백산대은집(栢山大隱集)」에 그의 사적이 나와 있으나 소홀히 다룬 부분도 있고 사실과 같지 않은 점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고칙을 들어 문제를 논의한 부분[拈提]에 있어서는 대충대충하여 그저 형식만 갖췄을 뿐입니다.
나 만송이 지난날 평창(評唱)을 해놓은 적이 있는데 병란이 일어난 후로는 조사의 초고를 보는 일들을 폐하고 있었습니다. 근래에 연경(燕京) 보은사(報恩寺)로 물러나 달팽이 같은 작은 집을 하나 지어놓고 '종용암(從容庵)'이라고 명패를 붙였습니다. 옛일을 다시 해보려고 도모하던 차에 마침 담연거사가 완성을 해달라고 간청해왔습니다.
침침한 노안(老眼)으로 입 속에서 웅얼웅얼거리는 가운데 문도들이 받아 적었으므로 그 속에는 기연과 사적이 번거롭게 실려 있습니다. 이 책은 첫째, 천동노인의 드넓은 학문과 부회(附會)의 기막힌 솜씨를 드러냈고, 둘째, 학인들이 검토하는 수고를 덜어주었으며, 셋째, 나 만송은 옛 것을 서술할 뿐 창작하지 않고 제멋대로 억단하지 않았습니다.
불과(佛果)의 「벽암집(碧巖集)」과 감히 비해 보자면 편편마다 빠짐없이 시중(示衆)을 갖추었고, 원통(圓通)의 「각해록(覺海錄)」에 감히 비해 보자면 구구마다 지리멸렬하지 않게 하여 완비하였습니다. 착어(著語)하고 안목을 드러내며 첨삭한 부분에 있어서도 역시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임오년 말 담연거사가 굳이 염송해내라는 편지를 보내왔으므로 부득이 집안 허물을 들춰내 나에게도 그대에게도 누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계미년 상사일(上巳日) 촌로 만송은 바람결에 편지를 실어 보내며, 할 말 다하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