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용록 上 제28칙 호국의 세 차례의 웃음거리[護國三懡]
제28칙
호국의 세 차례의 웃음거리[護國三懡]
시중 |
대중에게 보이시다.
한 치의 실도 걸치지 않은 사람은 진짜 벌거벗은 외도[裸形外道]요, 한 톨의 쌀도 씹지 않는 이는 분명 초면귀왕(焦面鬼王)이다. 설사 성스러운 경지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장대 끝에서 험하게 떨어짐을 면치 못할 것이니, 부끄러움을 가리워줄 곳이 있을까?
본칙 |
드노라.
어떤 승이 호국(護國)에게 묻되 "학이 마른 소나무 끝에 섰을 때가 어떻습니까?" 하니,
-걸음걸음 높이 오르기는 쉽다.
호국이 대답하되 "땅에 있는 이에게는 한바탕의 웃음거리[懡㦬]니라" 하였다.
-마음마다 놓아버리기는 어렵다.
승이 다시 묻되 "방울물이 꽁꽁 얼 때가 어떻습니까?" 하니,
-법신은 가리운 것이 없으니 추위를 막지 않는다.
호국이 대답하되 "해 돋은 뒤에 보면 한바탕의 웃음거리니라" 하였다.
-눈이 녹으면 송장이 드러나리라.
승이 다시 묻되 "회창(會昌 : 845) 연간, 불법을 도태할 때에 호법선신들은 어디로 갔었습니까?" 하니,
-점을 찍었으면 오지 않은 것이지요.
호국이 대답하되 "절 문[三門] 어귀에 두 (금강신의) 얼굴이 한바탕의 웃음거리니라" 하였다.
-온 이에게는 점을 찍지 않는다.
평창 |
스승께서 이르시다.
수주(隋州) 수성산(隋城山) 호국원(護國院) 정과(淨果)대사의 휘(諱)는 수징(守澄)이니, 그 제2세인 연화 지원(演化知遠)대사와 함께 호남(湖南)의 보자(報慈)를 섬겼다.
어느날 보자가 법좌에 오르니, 연화대사가 묻되 "어떤 것이 진여 · 불성입니까?" 하였다. 이에 보자가 대답하되 "누구에겐들 없겠는냐?" 하였다.
참퇴(參退) 때에 수좌(首座)가 묻되 "그대가 아까 화상에게 물었던 이야기를 알겠는가?" 하니, 연화대사가 대답하되 "모르겠소" 하였다. 수좌가 말하되 "화상께서 그토록 자비하시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알지 못하는가? 진여 · 불성이 누구에겐들 없겠는가? 나아가서는 4생 · 6도도 모두 구족해 있느니라" 하매 연화가 이르되 "수좌께서 저에게 설명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였다.
정과대사가 곁에 있다가 이[齒]를 악물면서 이르되 "이 늙은 첨지가 자신도 안목이 없으면서 다시 남의 눈까지 멀게 하는도다" 하고는 연화대사를 불러 묻되 "수좌께서 아까 무엇이라 말하던가?" 하였다. 연화가 대답하되 "나는 그때 그의 설명을 알 수가 없었소" 하고 위에 든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정과가 말하되 "상좌(上座)여, 불법은 그런 도리가 아니요, 그대가 만일 믿지 못하겠거든 당두(堂頭)에게 가서 물어보시오" 하니, 연화가 당두에게로 올라가서 앞의 견해를 구족해 설명하니, 보자도 이르되 "불법이 그러한 도리가 아니니라" 하였다. 연화가 다시 사뢰되 "아까 제3좌에게 물었더니 그 또한 긍정치 않고 짐짓 와서 여쭙게 했기에 온 터이니 바라건대 자비로써 저에게 해결해 보여주소서" 하였다.
이에, 보자가 이르되 "그대는 다시 제3좌에게로 가서 물으라" 하니, 연화가 내려와서 절을 하고 물으매, 정과가 이르되 "그대는 걱정 말고 물으라" 하였다. 이에, 연화가 문득 묻되 "어떤 것이 진여 · 불성입니까?" 하니, 정과가 이르되 "누구에게 있는가?" 하매, 연화가 이 말 끝에 깨닫고, 재배하면서 감사하는 말을 하고는 말하되 "수좌께서 대중에 계시거나 출세하시거나 나는 맹세코 스님을 도우리다" 하였는데 나중에 결국 이어 주지가 되었다.
이 화두는 제방에서 이르기를 "호국의 세 차례 웃음거리[護國三懡㦬]"라 하는데, 보복의 네 차례 사람을 속임[保福四謾人]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 관문을 꿰뚫지 못한 이는 달려들기가 매우 어렵다.
보지 못했는가? 어떤 승이 운거 간(雲居簡)선사에게 묻되 "외로운 봉우리에서 홀로 잘 때가 어떠합니까?" 하니, 운거가 이르되 "아홉 칸 승당에 눕지 않거늘, 누가 너로 하여금 외로운 봉우리에 자라고 했는가?" 하였다. 이 화두는 비록 현묘한 점은 없으나 깨우쳐줌이 매우 많으니, 한 모퉁이를 들매 세 모퉁이를 볼 수 있다.
동산(洞山)의 현중명(玄中銘)에 이르되 "봉우리들이 수려하나, 학이 날개를 멈추지 않고 / 신령한 나무가 끝없으나 봉황이 의지할 곳은 없다" 하였는데, 그 승이 문득 묻되 "학이 외로운 소나무에 앉았을 때는 어떠한가?" 하였으니 그 승은 공부하는 경지에 어리석게 앉아 있기 때문이다.
이미 그렇게 섬세한 본지풍광(本地風光)을 가지고 이마에 붙이고,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내놓는다면 이는 '외롭고 우뚝한데에도 서지 않아야 도가 비로소 원만해진다'는 도리를 전혀 모르는 꼴이니 천태교(天台敎)에서 이르는, 정타(頂墮 : 頂位에서 떨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호국이 이르되 "땅 밑의 것에게는 한바탕의 웃음거리니라" 하였으니, 그 승이 외롭고 위태한 데서 살 계교를 하지는 않게 되었으나 다시 얼음이 꽁꽁 얼고 눈이 굳어진 경지로써 드러내려 했다. 또 말라서 튈 듯하여도 도리어 윤기가 흐르고, 냉기가 싸늘한 곳에 도리어 온화하기를 바라는 도리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르되 "해가 뜬 뒤에는 한바탕의 웃음거리니라" 한 것이다. 그 승이 두 차례나 창칼을 휘두르고 덤볐으나 두 차례 모두 호국의 억누름을 당했다. 이미 어쩔 수 없기에 이르자 다시 교문(敎門)의 흥폐(興廢)에 따른 의문을 들어서 묻되 "회창 사태 때, 호법선신(護法善神)은 어디로 갔었습니까" 한 것이다.
당나라 무종(武宗)은 선도(仙道)를 좋아하여 승니(僧尼) 26만 5백 사람을 도태하였고, 회창(會昌) 5년 8월 하순에 모두 환속하도록 영을 내렸다. 황제는 방사(方士 : 선도의 도사)들의 단약(丹藥)을 먹었기 때문에 성질이 조급해지고, 기쁨과 성냄이 일정치 않더니 6년 3월 초에 이르러 중독된 지 반 년 만에 약기운으로 죽었다. 선종(宣宗)이 즉위하자 불교의 사원이 세 곱으로 늘어났으니, 신도(神道 : 호법선신의 입장)로서 말한다면 무종의 조그마한 폐불이 아니었다면 어찌 선종의 크게 일으킴이 있었으리요? 선신들의 방편은 단연코 범하(凡下)들로서는 가히 헤아릴 바가 아니다.
만일 납자의 견해에 의거한다면 법문은 본래 흥폐(興廢)가 없거니 선신인들 어찌 가고옴이 있으리요? 그러므로 이르기를 "절문 앞의 두 금강신이 한바탕의 웃음거리니라" 하였거니와, 만송이 이렇게 말하는 것도 벌써 사람들에게 잘못 주석을 내린 것이 된다.
또 보지 못했는가? 어떤 승이 묻되 "마음도 법도 모두 잊은 때가 어떠합니까?" 하니, 호국이 이르되 "얼굴을 씻지 않느니라" 하였다. 승이 다시 묻되 "달이 싸늘한 못에 떨어졌을 때가 어떠합니까?" 하니, 호국이 이르되 "얼굴을 씻지 않느니라" 하였다. 승이 다시 묻되 " 빛과 경계를 모두 잊은 때가 어떠합니까? 하니, 호국이 이르되 "얼굴을 씻지 않느니라" 하였으니 처음부터 모조리 주석을 낼 수는 없다. 주석을 낼 수 없을 때엔 어찌해야 되는가? 천동의 송을 보아야 한다.
송고 |
장사(壯士)가 늠름하지만 귀밑머리 희어지지 않았고
-때가 오지 않음을 한하여
남아가 분발하지 않아 봉후에 책봉되지 못했네.
-앞길 탐하기를 너무 빨리 했네.
돌이켜 생각컨대 청백(淸白)을 가보처럼 전하던 나그네는
-이미 너무 많아졌다.
귀 씻은 개울물을 소에게도 안 먹였네.
-꼴찌가 너무 앞섰구나.
평창 |
스승께서 이르시다.
3조께서 이르시되 "대도(大道)는 바탕이 너그러워서 쉬움도 어려움도 없건만 조그마한 소견으로 의심을 일으키면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더욱 더뎌진다" 하셨다.
옛날에 두 승이 함께 길을 걸었는데 성정이 급한 자가 앞에 가면서 뒤에 오는 자에게 소리쳐 이르되 "세월이 급하니 빨리 달려오라" 하니, 뒤에 오던 승이 이르되 "대도는 넓고도 크거늘 서둘러 무엇하리요?" 하였다.
만송이 일찍이 원통 선(圓通善)국사가 쓴 두 게송을 보니, 이르되 "세월이 급하니 빨리 달려오라 함이여, 길을 가다가 우담발화 피어난 것을 밟아버릴 것이요 / 대도는 넓고도 크거니 서둘러 무엇하리요 함이여, 밥통[肚皮] 활짝 열어 몽땅 싸버리도다"고 되어 있었다. 이 원통 선국사의 두 게송은 저 승이 그렇게 물었는데 호국이 그렇게 대답한 것과 같아서 각각 한 쪽 눈만을 갖추고 있거니와 천동의 게송에서 앞의 두 구는 마치 예리한 기상으로 영화를 탐내는 것 같고, 나중의 두 구는 마치 일신이 물러서서 벼슬을 그만두는 것 같다.
후한(後漢)의 반초(班超)는 집안이 가난하여 항상 글씨 쓰는 품을 팔다가 어느날 붓을 꺾으면서 이르되 "대장부가 마땅히 장건(張騫)이나 부개자(傅介子)를 본받아, 이역(異域)에서 공을 세워 만 리 밖에서 제후에 책봉됨이 옳을 것이어늘 어찌 오랫동안 붓과 벼루 사이에만 종사하겠는가?" 하더니, 나중에 서국(西國)을 쳐서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으니, 이는 그 승의 세 차례의 물음이 탐색이 지나쳤음을 송한 것이다.
후한(後漢)의 양진(楊震)은 형주(荊州) 태수의 소임을 맡았는데 성품이 공평 · 청렴하여 사사로운 알현을 받지 않았다. 자손들이 나물 밥을 먹고 도보로 걸어다니게 되매 집안의 어른들과 장정들이 산업(産業)을 벌리려 했으나 양진은 승락치 않고 말하되 "후인들로 하여금 청백리(淸白吏)의 자손이라 부르게 하고, 이것을 자손들께 물려준다면 후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사기(史記)」에 이르되 허유(許由)는 기산(箕山)에 숨어서 산에 의지해 먹고 개울에 가서 마시더니, 요(堯)가 왕위를 이양하겠다는 말을 듣고는 개울에 가서 귀를 씻고 있었다. 때마침 소부(巢父)가 소에게 물을 먹이러 왔다가 보고 묻되 "세상 사람들은 얼굴을 씻는데 공만은 어째서 귀를 씻는가?" 하니, 허유가 대답하되 "요가 나에게 구주(九州)의 어른이 되라는 말을 하기에 그것을 듣고 더렵혀진 귀를 씻는 것이외다" 하였다. 소부가 이르되 "예장(豫章)의 나무는 높은 산에 나서 공인(工人)들이 찾지 못하거늘 그대가 세상을 피하고자 한다면 어찌하여 깊이 숨지 않는가? 이제 인간에 나다니는 것은 구차스레 명예를 구하는 것이니, 그대를 대접해서 아래쪽에서 마시게 해야 할 것이나 우리 소의 입을 더럽힐까 걱정이다" 하고는 끌고 상류로 올라가서 마시게 했다고 하였다.
천동이 양진(楊震)과 허유와 소부, 세 사람의 일을 들어 세 차례의 웃음거리[三懡㦬]를 송하였으나 도리어 동안(同安)이 이르기를 "흐린 것은 흐린 대로 맑은 것은 맑은 대로 / 보리와 번뇌가 허공과 같이 평등하다!" 하여 그 승과 호국을 똑같이 눌러버렸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관계된 것은 아니니, 제각기 편할 대로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