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용록 上 제32칙 앙산의 마음과 경계[仰山心境]
제32칙
앙산의 마음과 경계[仰山心境]
시중 |
대중에게 보이시다.
바다는 용의 세계가 되니 숨거나 드러남에 걸림이 없고, 하늘은 학의 고향이 되니 날거나 울거나 자유롭거늘 어찌하여 고단한 고기는 방죽에 멈추어 있고 둔한 새는 갈대밭에 깃들어 있는가? 이해를 따진 틈이 있는가?
본칙 |
드노라.
앙산이 어떤 승에게 묻되 "어디서 온 사람인고?" 하니,
-문을 닫고 모임을 통제하는데…….
승이 대답하되 "유주(幽州) 사람입니다" 하였다.
-신분증이 명백하군!
앙산이 다시 묻되 "그대는 그쪽 일을 생각하는가?" 하니,
-마침 잊으려고 애쓰던 중인데…….
승이 대답하되 "항상 생각합니다" 하였다.
-마침 익어진 버릇을 잊기가 어려웠던가.
앙산이 이르되 "생각하는 자는 마음이요, 생각하는 바는 경계이니,
-고작해야 능(能)과 소(所)를 세울 뿐이로구나!
그곳의 산하대지 · 누대 · 전각 · 인간 · 가축 등의 물건에 대하여 생각하는 놈을 돌이켜 생각해보라. 그 여러 가지가 있는가?" 하니,
-그대가 스스로 분별을 일으킨다.
승이 이르되 "저는 거기에 이르러 전혀 보이는 게 없습니다" 하였다.
-아직도 그런 게 있다니…….
앙산이 이르되 "믿음의 지위는 옳으나 사람(수행)의 지위는 옳지 못하니라" 하였다.
-뜰 앞의 남은 눈은 해가 돋으면 녹겠지만 방 안의 가는 먼지야 누구를 시켜 쓸어버리겠는가?
승이 이르되 "화상께서는 따로 지시해주실 것이 있지 않으십니까?" 하니,
-또 저러는구먼!
앙산이 이르되 "따로 있다거나 따로 없다거나 하면 맞지 않느니라.
-화살 한 발로 두 관문을 꿰뚫었다!
그대의 소견에 의하건대 겨우 하나의 현묘함[一玄]만을 얻었다.
-이미 배 안에 달빛이 가득한데…….
앉을 자리를 얻어 옷을 걸치게 되거든 그 뒤부터 스스로 살펴보라" 하였다.
-다시 돛에 바람을 더하는구나!
평창 |
스승께서 이르시다.
앙산이 일찍이 어떤 승에게 묻되 "어디서 오는가?" 하니, 승이 대답하되 "유주(幽州)에서 옵니다" 하였다. 앙산이 다시 이르되 "내가 마침 유주의 소식을 알고자 했는데 유주의 쌀값이 어떠하던가?" 하니, 승이 대답하되 "제가 올 때, 조심없이 저잣거리를 통과하다가 다리[橋梁]를 부러뜨렸습니다" 하며, 앙산이 그만두었다. 앙산은 작은 석가라 불리는지라 사람을 제접하매 한 가지뿐이 아니었는데 이 공안은 바로 학인이 입문하는 자세이며, 손을 써서 힘을 얻는 경지이다.
앙산이 유주의 승에게 묻되 "그대는 그쪽 일을 가끔 생각하느냐?" 하였는데, 만일 그때 그에게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는 대답을 들었더라면 어찌했을까? 앙산에겐 반드시 또 다른 장기가 있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승이 이르기를 "항상 생각합니다" 하였으니, 진실한 말은 참회에 해당한다.
앙산이 이르되 "생각하는 이는 마음이요, 생각하는 바는 경계라, 경계는 천 · 만 가지 차별이 있거니와 생각하는 주인공인 마음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가?" 하였는데, 운문이 이르기를 "앙산은 자비가 너무 깊어서 낙초(落草 : 잔소리)의 말씀이 있었으나 과연 그 승은 영리하여서, 그 경지에 이르러서는 아무것도 보이는 바가 없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요즘 사람들은 만에 하나도 그 경계에 이르지 못하나니, 만일 이르렀다면 그는 곧 가슴을 두드리는 외통수여서 길거리의 즐거움도 모르면서 끝내 집에도 돌아가지 못하는 자이려니와, 앙산은 일찍이 산 밑의 길을 걸은 적이 있으므로 따로이 한 가닥의 살길[活路]을 제시해준 것이다.
앙산이 지난날, 승당 앞에서 삼매에 들었는데 밤중이 되자 산하대지와 절과 사람들과 물건, 나아가서는 자기까지도 보이지 않고 완전히 허공같이 되었었다. 이튿날 아침에 이 일을 위산에게 고하니, 위산이 이르되 "내가 백장의 회상에 있을 때도 그러한 경계가 나타났으니, 이는 융통망상(融通忘想)이 녹아서 밝아지는 공이다. 그대가 뒷날 설법을 할 때, 그대보다 지나는 이는 결코 없을 것이다" 하였으나, 만송은 이르노니 "앙산이 아니면 증득하지 못했을 것이요, 위산이 아니면 알아보지 못했으리라" 하노라.
「능엄경」에 이르되 "만일 흔들리던 생각이 다하고 들뜬 망상이 소멸되어 각(覺)의 밝은 마음이 마치 티끌을 제거한 듯하면 외가닥 생사의 처음과 끝을 뚜렷이 비추리니, 이를 일러 상음(想陰)이 다한 것이라 이름한다. 이 사람은 능히 번뇌탁을 초월하리니, 그 까닭을 관찰하건대 융통망상으로 근본을 삼기 때문이라" 하였으니, 여기에서 또 위산 · 앙산 부자가 묘하게 불심에 계합했음을 볼 수 있다.
앙산이 어느날, 견해를 진술하되 "만일 저로 하여금 스스로 찾아보라 하신다면 그 경지에 이르러서는 원만한 지위도 없고, 끊을 것도 없습니다" 하니, 위산이 이르되 "그대의 견해에 의하건대 아직도 법의 경지에 있고, 마음과 경계를 여의지는 못했도다" 하였다. 앙산이 다시 이르되 "이미 원만한 지위도 없거니, 어디에 다시 마음과 경계가 있겠습니까?" 하니, 위산이 대답하되 "아까부터 그대가 그러한 견해를 지은 것이 사실이지?" 하매, 앙산이 "그렇습니다" 하였다. 위산이 다시 이르되 "만일 그렇게 구족하다면 그것이 마음과 경계와 법이거늘 어찌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앙산은 그 승에게 아직도 이런 것이 있음을 보고, 사리에 맞추어 판단하되 "믿음의 지위는 옳으나 사람의 지위는 옳지 못하다" 하였다. 이것을 다른 책에서는 "믿음의 지위는 옳으나 수행의 지위는 아직이다" 하였는데, 흔히들 「금강삼매경」에서 말한 "믿음의 지위[信位], 생각의 지위[思位], 닦음의 지위[修位], 행의 지위[行位], 버림의 지위[捨位]"를 들거니와 여기서 말한 믿음의 지위와 수행의 지위는 꼭같지는 않다.
죽암 규(竹庵珪) 화상이 이르되 "입을 닫았거나 연 곳에 이쪽과 저쪽을 나누고, 말 있는 곳과 말 없는 곳에 믿음의 지위와 수행의 지위를 나눈다" 하였으니, 이 또한 별다른 한 견해이다.
위산이 앙산에게 묻되 "적자(寂子 : 앙산)야, 속히 일러라. 오음이나 18계에 드는 것이 아니냐?" 하니, 앙산이 이르되 "혜적은 아직 믿음도 서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위산이 다시 묻되 "그대는 믿은 뒤이지만 서지 못하는가? 믿기 전이어서 서지 못하는가?" 하니, 앙산이 이르되 "다만 혜적일 뿐, 다시 무엇을 믿겠습니까?" 하였다. 위산이 다시 이르되 "만일 그렇다면 정성성문(定性聲聞)이로구나!" 하니, 앙산이 이르되 "혜적은 부처도 보지 않나이다" 하였다.
청거 호승(淸居皓昇) 선사는 목우도(牧牛圖)에서 제6장에 이르되 "믿음의 지위[信位]가 차츰 익어져서 삿된 경계를 멀리 할 줄 안다. 비록 더러움과 깨끗함을 가림이 마치 칼날로 코에 붙은 진흙을 떼내는 것 같더라도* 아직은 흔적이 남아 있어서 믿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흑과 백이 반반이라 한다. 송하노라. 놓아 먹인 지가 비록 오래되어 고삐를 손에서 차츰 놓을 수 있고 / 행지(行持)가 어둡지 않아서 전진과 관습에 남을 따르지 않는다 / 맑은 들에서 만족스레 즐기나 / 긴 채찍은 항상 놓지 않는다 / 푸른 산에 향그러운 풀 조밀할 때 / 일미(一味)로 날마다 주림을 채운다" 하였다. 제12장에 이르되 "수행의 지위[人位]가 본래 공하다. 몸도 마음도 집착할 것이 없고, 얻음고 잃음이 깨끗이 다하니, 현묘한 도는 아득하여 분별할 수 없고 위로 향한 한 구절은 입을 열려고 하면 곧 떨어진다. 송하노라. 망령되이 번뇌를 일으켜 소를 지키노라니 / 소도 그르고 사람 또한 그르다 / 바른 가운데 상상(想像)을 잊으니 / 위로 향한 길에 현미(玄微)함이 있다 / 큰 바다에서 가느다란 먼지가 일고 / 이글거리는 화로 위에 눈발이 나부낀다 / 서로 만나 알기를 구한다면 / 그대 마음요동[心機]에 떨어지지 않으리" 하였다. 이에 대해 만송은 이르노니, "앙산은 '믿음도 서지 못했다' 했고, 청거도인은 '수행의 지위가 본래 공하다' 했는데 이 두 스승의 말씀 가운데서 가려낼 수 있다면 믿음의 지위와 수행의 지위를 뚜렷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니, 이른바 걸음을 물려 자기에게로 나아가면 만에 하나도 잃을 것이 없다는 도리다" 하노라.
승이 이르되 "화상께서는 이밖에 달리 지시할 것이 있지 않습니까?" 하였으니, 진흙 속에 가시가 있는 격이요, 앙산이 이르되 "따로 있다거나 따로 없다거나 하면 맞지 않ㄷ" 하였으니, 있다면 눈 위에 서리를 더하는 격이요, 없다면 말구(末句) 속에 죽어 있는 격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현묘함[一玄]을 지시하여 그로 하여금 스스로 살피게 하였다.
경[湧泉]에서는 공함으로 자리를 삼고 만행(萬行)으로 옷을 삼으라 하였고, 어떤 이는 이르되 "앉는다 함은 선정에 안정하여 생각을 고요히 하는 것이요, 옷이라 함은 누더기를 입고 머리를 덮는 것이라" 하였고, 어떤 이는 이르되 "앉느다 함은 개당(開堂)하고 법좌에 오른다는 뜻이요, 옷이라 함은 법복으로 몸을 장엄한다는
뜻이다" 하였다. 모두 이치가 있기는 하지마는, 또 일러보라, 뒷날 스스로 살펴보라 하였으니, 살피란 것이 무엇인가? 천동에게 물어보자!
송고 |
내침[外]이 없이 용납하고
-아무리 커도 포용치 못함이 없고
걸림이 없이 어울린다.
-아무리 미세해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 없다.
문과 담이 첩첩이 있고
-더듬지 않는 게 좋겠다.
관문과 자물쇠가 겹겹이라.
-손가락 하나 튕길 필요가 없다.
항상 술에 취해서 나그네가 누워 있고
-깨우려거든 와서 때리라.
밥은 배불리 먹었으나 농사는 황폐했다.
-한 구덩이에 묻어버리리라.
허공에 불쑥 내밀면, 바람이 가루라[妙翅]를 덮치듯 하고,
-푸른 하늘 활짝 쳐 여는도다.
푸른 바다를 밟아 뒤집으면, 우레가 달리는 용을 앞지르듯 하도다.
-경칩은 2월의 절기다.
평창 |
스승께서 이르시다.
천동은 먼저 "생각하는 주체를 생각해보라. 어찌 여러 가지가 있겠가?" 한 것을 송했다. 운문이 이르되 "알았다 해도 눈앞에서 싸버리고, 알지 못했다 해도 눈앞에서 싸버린다" 하였는데, 이것이 내침이 없이 용납하는 것이다.
산하 · 누각 · 사람 · 가축 등 물건은 하나와 많음이 걸림이 없고, 사람과 경계가 뒤섞이니 이것이 "걸림 없이 어울린다"는 것이다.
소(韶) 국사가 이르되 "통현봉정(通玄峰頂)은 인간세계가 아니다. 마음 밖에는 법이 없으니 눈앞에 가득한 그대로가 푸른 산뿐이로다" 하였다. 통현봉정은 생각할 바의 경계요, 인간세계가 아니라 함은 생각하는 마음이요, 마음 밖에는 법이 없다 한 것은 전혀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고 한 대목이요, 눈 앞에 가득한 그대로가 푸른 산이란 이 한 구절만은 그 승과 소국사가 믿음의 지위, 수행의 지위, 하나의 현묘함[一玄] 등으로 서로 막혀 그대로 문과 담장이 첩첩이 있게 하고, 관문과 자물쇠가 겹겹이게 되어서 끝내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또 그 승이 본 경지는 취한 나그네와 황폐한 농가 같고, 앙산이 지적해준 것은 가루라와 다리는 용 같다고 송하였으니, 「법화경」에 이르되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친구의 집에 가서 술에 취해 누웠다. 이때 친구는 관가의 일 때문에 떠나야 되겠기에 값진 보물을 그 사람의 품 안에다 넣어주고 떠나갔건만 그 사람은 술에 취해서 전혀 깨닫지 못했다" 하였다. 또 합당히 인간과 하늘 무리의 묘한 공양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 승은 배부르자 농사를 망쳤으니, 한 방울 물도 녹이기 어려울 것이다. 눈밝은 사람은 가려내보라.
범어 가루라(迦樓羅)는 번역하면 묘시조(妙翅鳥)니, 바람을 움켜쥐고 바다를 가르면서 곧장 용을 잡아 삼킨다. 공자가 노담(老聃)에게 예법을 묻고, 이르기를 "노자를 보니 마치 용과 같더라" 하였다. 달리는 용[遊龍]이란 구름이나 연기 속으로 드나드는 것이니, 잠겨 있는 개구리와는 같지 않다.
이는 아직 수행의 지위는 아니고 겨우 하나의 현묘함만을 얻었으나, "뒷날 스스로 살피라" 하여 그로 하여금 몸을 옮기고, 걸음을 내딛게 한 대목을 읊은 것이니, 어째서 그런가? 다만 위로 향할 길이 있기만 하면 다시 높이 갈 사람은 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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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칙 송고 · 평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