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용록 中 제50칙 설봉의 무엇?[雪峰甚麽]
제50칙
설봉의 무엇?[雪峰甚麽]
시중 |
대중에게 보이시다.
마지막 한 구절[末後一句]라야 비로소 굳은 관문에 이른다. 암두은 위로는 스승을 긍정치 않고 아래로는 사제에게 양보치 않을 것을 자부했으니, 이는 억지로 가닥을 내는 것인가? 아니면 별다른 고동[機關]이 있는가?
본칙 |
드노라.
설봉(雪峰)이 암자에 머물 때 두 승이 와서 절을 했다.
-향취를 찾고 냄새를 좇는구나.
설봉이 보고 손으로 암자의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면서 이르되 "무엇이냐[是甚麽]?" 하였다.
-이것은 여전히 몸을 던지는 시늉이다. 어떤 것이 몸을 숨기는 시늉일까?
승도 이르되 "무엇입니까?" 하니,
-과연 알지 못하는구나!
설봉이 고개를 떨구고 암자로 돌아왔다.
-말이 없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승이 나중에 암두(岩頭)에게 가니,
-소식을 전하러 갔겠지.
암두가 묻되 "어디서 오는가?" 하니,
-뚫지 않으니 구멍이 나지 않는다.
승이 대답하되 "영남에서 옵니다" 하였다.
-여기는 영북이던가?
암두가 이르되 "설봉에도 다녀왔는가?" 하니,
-익은 버릇은 버리기 어렵다.
승이 이르되 "다녀왔습니다" 하였다.
-더 숨길 수는 없다.
암두가 이르되 "설봉이 무어라 하더냐?" 하니,
-초(醋)가 되지 않고는 멈추지 않는구나.
승이 앞의 이야기를 하매,
-한 글자가 관가로 들어간 뒤에는 여덟 소가 끌어도 나오지 않는다.
암두가 다시 묻되 "그가 무엇이라 하더냐?" 하니,
-고개를 숙이고 그냥 나오는 것이 더 좋을 뻔했다.
승이 이르되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암자로 돌아갔습니다" 하였다.
-그렇다면 일찍이 설봉에 갔던 것이 되지 못한다.
암두가 이르되 "아뿔사! 그때에 마지막 구절을 일러주지 못했구나!
-지금엔 일러주었는지 일러주지 않았는지.
만일 그때에 제대로 일러주었더라면 천하 사람들이 설로(雪老 : 설봉)를 어찌하지 못했을 터인데……" 하였는데,
-어째서 내가 곧 설로입니다라고 하지 않았을까?
승이 해제 날 다시 전의 화두를 들어 물으니,
-좋은 술은 사람들을 더디 깨어나게 한다.
암두가 이르되 "어째서 진작 묻지 않았는가?" 하였다.
-낮잠을 탐내느라 그랬지요.
승이 이르되 "감히 경솔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니,
-가히 총림에 내세울 일이로군.
암두가 이르되 "설봉은 비록 나와 같은 가지에서 태어났지만 나와 같은 가지에서 죽지는 않을 것이다.
-제금나기를 보채는 이는 먼저 궁해진다.
마지막 구절을 알려고 한다면 단지 이것뿐이니라" 하였다.
-찌는 기운을 돌려서 열심히 판다.
평창 |
스승께서 이르시다.
운암은 도오(道吾)에게 방참(傍參)했고, 설봉은 암두에게 방참했으니, 군자는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는 탓이리라. 이제 운암과 설봉의 도가 크게 시행되는 까닭도 역시 자기는 물러서서 남에게 양보한 음덕이겠으나 암두는 천품이 영특하여 덕산의 도를 낮췄다 높였다 하면서 천하를 누벼도 아무도 맞설 이가 없었다. 그 까닭은 그의 식견이 활짝 트였고 정신을 쌓고 길러서 성취했기 때문이다.
그 두 승을 살펴보건대 설봉의 문하에서는 화살과 활촉이 서로 만난 것 같거니와 역시 행각하는 첨지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찌하여 여름이 끝나도록 아직도 마지막 구절을 의심했던고? 다만 안목이 둔하고 머리가 아찔하여 뻔히 보면서도 지나쳤기 때문이다.
암두가 그에게 허다한 도리를 말하되 "설봉이 나와 같은 가지에서 태어났지만 같은 가지에서 죽지는 않겠다" 하였으니, 같은 법임에는 차이가 없지만 세 사람의 견해에는 차이가 있다.
그 승과 설봉은 동시에 "무엇인가?" 했지만 마지막 구절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말을 해주어도 전혀 알지 못했으니, 그 어찌 털끝만치 어긋나면 천 리를 빗나간다는 도리가 아니겠는가? 일러보라. 그 승이 실제로 알지 못해서 그런 말을 했겠는가?
위산 철(潙山喆)이 이르되 "가엾은 설봉과 암두가 도리어 그 승의 감정을 받았다" 하였거니와, 만송은 이르노니, "냉정한 눈으로 보면 암두와 설봉을 용서할 수도 있을 법 하거니와 나중에 다시 덕산을 점검할 때도 마지막 구절을 알지 못한다 한 것은 참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노라.
그러므로 천동이 두 차례 송했다.
송고 |
끊고, 닦고, 쪼고, 갈음[切磋琢磨]이여,
-한 가지 일을 경험하지 않으면
변화하는 자태가 수수께끼 같도다.
-한 가지 지혜가 늘지 못한다.
갈파(葛陂)에서 용으로 변한 지팡이요,
-바다를 지나고 구름을 꿰뚫었다는 소식 이미 듣고 있노라.
도가(陶家)에서 움츠리고 있는 북[梭]이로다.
-아직도 벽에 기대고 담에 붙은 것을 본다.
같은 가지에 태어난 이는, 얼마든지 있으나
-세상으로는 서로 가까우나
같은 가지에 죽는 이는 많지 않도다.
-습관으로는 서로 멀다.
마지막 구절이여, 다만 그것일 뿐이니,
-우선 반쯤 믿어볼 것이나
바람맞은 배에 달을 싣고 가을 강에 떴도다.
-절대로 뿌리를 박지는 말라.
평창 |
스승께서 이르시다.
「모시(毛詩)」 기오편(淇奧篇)은 무공(武公)의 덕을 찬미한 것이다. 그가 문장능력이 있고 또 법다운 간언(諫言)을 받아들였으며 예절로써 스스로를 방어한 까닭에 주(周)의 재상으로 들어간 것을 찬미하여 이 시를 지었으니, "저 기오를 보건대 / 푸른 대[緑竹]가 우거졌도다 / 풍도 있는[有匪] 군자여 / 끊은 것 같고, 닦은 것 같고, 쫀 것 같고, 간 것 같도다" 하였는데, 주(註)에 이르되 "뼈를 다듬는 것을 끊는다 하고, 상아를 다듬는 것을 닦는다 하고, 옥을 다듬는 것을 쫀다 하고, 돌을 다듬는 것을 간다" 하였다. 덕산의 설봉이 암두를 만나서 마지막 구절을 깨달은 뒤로부터 지금까지 이 화두가 널리 퍼지는 까닭은 끊고 갈아서 변화의 이치에 통달한 힘 때문이다.
설봉은 마치 용으로 변화한 지팡이 같고 그 승은 마치 제자리에 웅크리고 있는 북[梭]과 같다고 암두가 점검해내었지만 아직껏 같은 가지에 죽는 이가 많지 않은 까닭은 알려지지 않았다. 혹자는 이르되 "암두는 마치 용으로 변화한 지팡이 같고 설봉은 마치 제자리에 웅크리고 있는 북과 같다" 하기도 하는데 그런 이들은 앞의 화두를 자세히 살펴보기 바란다. 설두와 불과(佛果)는 쌍으로 밝고, 쌍으로 어둡다는 입장에서 이 화두를 송한 적이 있으니, 푸근히 참구한 이가 아니면 알지 못한다.
「동한방술전(東漢方術傳)」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비장방(費長房)은 여남(汝南) 사람으로서 일찍이 저자의 아전[市掾]을 하였는데 호공(壺公)이 푸른 대막대기를 끊어 거짓으로 비장방을 만들고 그것이 집에서 목매어 죽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비장방은 그것을 보고 그와 함께 깊은 산으로 들어가서 도를 배웠으나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려 하직하니, 호공이 대지팡이를 주면서 '이것을 타고 집까지 가서는 갈파에가 버리라' 했다. 비장방이 갈파에다 버렸더니, 용으로 변해서 가버렸다고 한다. 또 진(晋)의 도간(陶侃)이 젊었을 때, 뇌택(雷澤)에서 고기를 잡다가 그물 끝에 북[梭] 하나가 걸렸기에 갖다가 벽에 걸어두었는데 나중에 우레와 번개가 치는 어느날 용으로 변해서 가버렸다" 한다.
설봉은 지팡이 같고 그 승은 북 같은데 암두는 바람 받은 배에 달빛을 싣고 가는 것 같다 하거니와, 만송은 무엇 같은고? 공현의 찻병[鞏縣茶甁 : 말 많은 사람]이라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