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1. 복주 설봉산 고진각대사어록 서
부록
1. 복주 설봉산 고진각대사어록 서
(福州雪峰山故眞覺大師語錄序)
한림시독학사 중산대부 수상서 예부시랑 동지승진은대 보문하봉박사 판태상사 권판상서부성주호군 낭야군 개국후 식읍 1천 9백 호 식실봉 2백호 사자금어대 왕수 지음(翰林侍讀學士 中散大夫 守尙書 禮部侍郞 同知承進銀臺 普門下封駮事 判太常寺 權判尙書部省主護軍 瑯瑘郡 開國侯 食邑 一千九百戶 食實封二百戶 賜紫金魚袋 王隨 撰)
나는 일찍부터 학문이 트이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는데, 우연히 과거에 급제하여 빛나는 세상을 만나 갑자기 화려한 직책을 역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 속에는 매일 근심 걱정이 쌓여 있고 명리를 위해 밖으로만 내달렸다. 그리하여 객진번뇌[客塵]가 본원(本源)을 가리고 세상 풍파가 이러한 생각을 부추켜 세상의 영화가 영원한 즐거움이라 여기고 선에 관한 법담 듣는 일은 쓸모없는 희론으로 알았다. 그러니 총애와 굴욕이 함께 닥쳐오는 것이며 삶과 죽음이 같다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이렇게 미혹에 빠져 있던 내가 바야흐로 홀연히 깨친 것이 있었다. 얼마 전에 내가 항주(杭州)지방에 나가 그곳을 다스리다가 숭천(崇川)에서 임기를 마치고 공직에서 물러나 녹만 타는 몸이 되었기에 한가한 날이 많았다. 그래서 「전등록(傳燈錄)」에서 설봉스님의 상당법어를 읽었는데, 거기에, "온 누리가 하나의 해탈문(解脫門)이다"라 하셨고, 또 달리 말씀하시기를 "3세 모든 부처님과 12부 경전도 여기에서는 부질없는 헛수고이다. 이 뜻을 치밀히 하면 마치 술에서 깨어나듯 마음이 탁 트여 도를 알게 되니 어찌 멀다고 하겠는가. 진실에 돌아가면 깨닫게 되리니 부처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시며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확연히 부처의 종지를 보고
하늘 땅을 손바닥에서 보네.
廓然見佛旨 天地掌中觀
아! 밝고 묘한 성품을 깨치고 원돈(圓頓)의 이치에 계합하여 번뇌의 고삐와 사슬을 벗고 맑고 깨끗한 경계를 밟게 되는 것이다.
금년 초봄에 민중(閩中)의 이름 높은 선비 강하(江夏)의 황순무군(黃洵武君)이 설봉산의 숭성선원(崇聖禪院)에서 자의(紫衣)가사를 관리하는 일을 맡아보고 있는 수훈(守勛)이란 스님과 함께 나를 찾아왔다.
수훈스님은 돌아가신 설봉 진각대사의 법요 한 두루마리를 받들고 와서 나에게 말하였다.
"대사의 법호는 의존(義存)이며 속성은 증씨(曾氏)이고 천주(泉州) 남안읍(南安邑) 사람입니다.
조상 때부터 대대로 불법을 신봉하였는데, 대사께서는 날 때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왔습니다. 마늘냄새나 고기를 먹지 않았고 어린아이 때도 절의 종소리, 경쇠소리를 듣거나 스님이나 불상을 보면 얼굴에 기쁜빛이 감돌았습니다. 아홉 살 때 집을 버리고 출가하려 하였으나 부모가 몹시 사랑하여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3년째 되는 해에 아버지를 따라 포전(莆田) 옥한사(玉氵+閒寺)에 놀러 갔다가 그 절의 주지인 경원(慶元)스님이 수행이 높고 맑기에 절을 올리면서 '저의 스승이십니다'라고 하고 마침내 그 절에 머물면서 좌우에서 시봉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열 일곱 살 되던 해에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습니다.
그 후 당(唐)의 무종(武宗)황제가 불법을 숭상하지 않아 스님은 부용산에 자취를 숨기고 있었는데, 이윽고 선종(宣宗)황제께서 불도를 회복케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곳 오월(吳越)지방에서 저 북쪽 연진(燕秦)지방까지 행각을 하였고, 유주(幽州)의 보찰사(寶刹寺)에서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그 후 남쪽으로 돌아와 이름난 토굴에 사시면서 묘한 법륜을 굴려 종문의 가르침을 널리 폈습니다. 그런 지 40년에 청정한 대중이 모여들어 늘 1천 5백명을 밑돌지 않았습니다. 또 밀인(密印)을 전해받은 사람으로는 현사(玄沙), 아호(鵝湖), 동암(洞巖), 고산(鼓山), 초경(超慶) 이 다섯 분의 존자가 있어 모두 큰 이름을 지금에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아아, 그러나 스승(설봉)의 법요는 아직 머리말을 써 붙이지 못하였기에 후손들은 부끄러워하고 총림은 탄식만 하고 있습니다. 지금 몇 마디 말씀을 구해서 어록을 빛내 주신다면 어찌 거룩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내가 말하였다.
"전에 나는 돌아가신 진각대사의 기연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깨달음이 열렸는데 지금 그 분께서 하신 말씀을 다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치 겹겹의 그늘에서 반가운 해를 보는 듯하며 오랫동안 목마른 사람이 감로수를 마시는 듯하니 그 다행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물며 서문을 써달라는 부탁까지 받고 보니 내가 어찌 감히 형식적으로 굳게 사양만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변변찮은 글을 책머리에 적어 놓는 바이다.
천성(天聖) 용집(龍集) 임신년(1032) 2월 무술일, 서재(西齋)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