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설봉숭성선사비기문
5. 설봉숭성선사비기문
(雪峰崇聖禪寺碑記文)
자선대부 행재예부상서(資善大夫行在禮部尙書) 비릉(毘陵)의 호형(胡濙)이 글을 짓고, 봉정대부 한림원학사 겸 좌춘방대학사(奉政大夫翰林院學士兼左春坊大學士) 여릉(廬陵)의 호광(胡廣)이 전액(篆額 : 제목 글씨를 씀)하고, 사진사징사랑행재형과급사중(賜進士徵事郞行在刑科給事中) 삼산요선(三山姚銑)이 서단(書丹 : 뒷면에 글씨를 씀)하다.
영락(永樂) 17년(1479) 겨울에 나는 왕명을 받들고 민(閩)지방에 가서 설봉산에 올라 그 아름다운 경관을 보았다.
때마침 주지 원지(遠芷, 호는 秋崖)스님이 우물가의 벽돌을 헐고 산길을 열어 외지고 좁던 곳을 넓고 깊게 하였다. 또 만공지(萬工池)를 지나 절문 앞에 이르기까지 못을 파고 다리를 놓아 옛것을 철거하여 새것으로 바꾸어 놓았는데, 그 규모가 장관이었다.
이 공사를 시작하던 날, 내가 마침 절에 도착하니 대중들이 뛸듯이 기뻐하며 바로 복받을 조짐이라 하였고, 나도 역시 맑게 우거진 산림이 기뻤다. 그래서 이틀밤을 이곳에서 잤는데, 원지스님이 조용히 나에게 말하였다.
"이 산은 무이산(武夷山)에서 뻗어온 산맥이 수백리나 이어져 이곳에 이르러 마침내 높은 하늘 속에 우뚝이 솟아 있습니다.
이곳 민지방은 겨울이 따뜻하여 서리나 눈이 내리는 일은 거의 없는데도 오직 이곳의 산세는 강풍과 접해 있어 기후가 중부지방과 비슷하고 겨울이면 늘 눈이 쌓이는 까닭에 '설봉산(雪峯山)'이라고 합니다. 또한 당나라 때 진각(眞覺)조사께서 이곳에 머물며 절을 창건하여 오랜 세월을 지내는 동안 흥망을 거듭하였습니다.
지금 천자께서 불교를 숭상하고 일으키시어 명산의 고찰에 지붕을 이어 새로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이곳 설봉산은 이름난 명찰이라서 승록(僧錄)은 계행이 있고 덕있는 사람이 아니면 이 절을 부흥하는 임무를 감당할 수 없다고 하여 영락 2년에 여러 사람과 상의하여 전에 황제께서 천주(泉州)의 큰절 개원사(開元寺)에 주지로 임명했던 결암 영(潔菴映)선사를 이곳의 주지자리로 오게 하였습니다.
스님은 속성은 홍씨(洪氏), 법명은 정영(正映)이며 호는 결암(潔菴)입니다. 대대로 강 오른쪽 금계(金谿)에 살았는데, 어릴 때부터 자취를 불교문중에 맡겨 마늘과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항주(杭州) 소경사(昭慶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영곡사(靈谷寺)의 손중도겸(巽中道謙)스님으로부터 법을 얻었습니다.
저 역시 강 오른쪽 임천(臨川) 출신이라 결암스님을 따라 모시면서 법을 잇고 현사사(玄沙寺) 중건하는 일을 나눠 맡게 되었습니다.
스님이 산에 오르던 날, 이 절은 법당이며 집채며 문, 회랑 모두가 기와조각과 돌자갈, 가시덩굴, 막대기 등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이에 스님은 탄식하고 뜻을 세워 이 절을 다시 일으킬 때까지는 맹세코 산을 내려가지 않겠다 하시고,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누더기만 걸치고 겨드랑이를 자리에 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민 땅 사람들이 존경하고 사부대중이 귀의하게 되었습니다. 창고에는 곡식이 쌓이고 산에서 나무를 해오고 기와나 벽돌을 굽고 그릇과 도구를 저장하였습니다. 5년이 지나자 불전(佛殿)이 세워졌고, 그 다음해에는 법당(法堂)과 절문을 같은 날 세우니 크고 웅장한 위용이 옛날보다도 더했습니다. 단엄한 불상이며 휘황찬란한 금벽 단청은 위로 황제의 명을 빌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복을 빌게 되었으니 스님의 큰 공덕은 참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스님이 제게 이르시기를, '그대가 현사사를 다시 일으키는 일은 이제 다 끝났고, 이 산문을 창건하는 일도 대체적으로 짜임새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회랑과 승당은 다 완성하지 못했다. 나는 이미 늙고 쇠약해져 영곡사로 돌아가고자 하는데 그대가 아니면 나의 뜻을 이을 수가 없다'고 하시고는 승록(僧錄)에게 급히 편지를 보내서 영락 16년(1418)에 이 원지를 승격시켜 스님의 임무를 대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후 밤낮으로 부지런히 노력해도 그 분의 부촉을 감히 잊을 수가 없다가 미비된 일을 모조리 다 이루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이 절이 창건된 유래를 고찰해 보니, 진각대사께서 입적하실 때 미리 예언을 남겨 주셨습니다.
'석탑의 난탑(卵塔)이 부숴지고 삼나무 가지가 땅을 쓸며 장물단지에 죽순이 돋아나면 그때가 5백년 뒤이니 내가 다시 이 절에 올 것이다.'
그런데 결암스님이 이 산에 오르신 것이 마침 진각대사가 입적하신 지 502년째 되는 해였으니, 모든 예언이 마치 부절(符節)이 맞듯 하였습니다. 하물며 결암스님은 얼굴모습마저 진각대사와 다르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진각대사가 다시 온 것이라고들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당연히 기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한 말씀 내려 주셔서 이를 아름다운 돌에 새겨 영원토록 전하게 해 주십시오."
"내 생각으로는 불교가 일어나면서 그 기록은 이미 먼 옛날에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계율 지키는 것을 첫단계[初地]로 하고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는 일을 진리[實際]로 삼는다. 그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심신을 고달프게 하고 산속에서 여위어 가면서 말없이 앉아 좌선을 한다. 그래서 항상 즐겁고[常樂], 항상 머물며[常住], 불생불멸하는 경지를 찾는 것인데, 이 사람들이 어느 겨를에 절집을 수리하고 치장하는 일에 간여하겠는가.
그러나 상교(像敎)가 마련됨에 대중이 우러러보게 되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먼저 눈에 보이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라서 우뚝한 전각과 엄숙한 불상을 보면 존경심이 경건하게 우러나고, 존경심이 나면 모든 착한 일도 이로 말미암아 쌓이는 것이다.
한(漢)나라 이래 불교가 나날이 번성하고 사원이 날마다 융성하다가 당 · 송대에 와서 그 교세가 꺾이고 앞길이 막히며 배척되기도 하였다.
또한 불교를 없애려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달이 차고 기울고 만물이 생겨나고 사라짐이 모두가 하늘의 운수에 달려 있다. 형체가 있는 것은 모두 그 운수가 있는데 오직 법만이 형체가 없어서 운수의 테두리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스님이나 절은 형체가 있으니 어찌 운수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라고.
그러나 우선 이 설봉사를 두고 말하더라도 진각대사에서 정영스님에 이르기까지 겨우 5백년에 지나지 않는데, 그간의 흥폐만해도 부지기수다. 이번에 이 절이 과연 진각대사의 예언대로 크게 흥한 것이라면 진각대사야말로 하늘의 운수를 알고 미리 기반을 마련한 것이 아니겠는가?
소천세계에서 삼천대천세계, 나아가 무량무수한 티끌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생성[生]에서 시작하여 공(空)에서 끝나고 끝나면 다시 시작하여 계속 돌면서 끝날 때가 없다. 모든 유위법(有爲法)도 이와 같으니 생성되어 지속되다가 파괴되어 흩어지고[成住壞空] 하지 않는 것이 있는가. 이 절만 보아도 오늘 이렇게 이루어졌고[成] 그대가 이 안에 살고 있다[住]. 그러나 뒷날 이것이 허물어지고[壞] 또 공[空]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는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대가 참으로 이루어놓고 지속시키는 오늘의 책임만이라도 다할 수 있다면, 이 절은 반드시 탄탄해서 쉽사리 허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대를 위해 이 글을 기록하여 그대의 법제자와 그 법손들이 내 말을 듣고 그대의 뜻을 이어 계속해서 이 절집을 손질했으면 한다. 그러면 여러번 허물어지고 여러번 공으로 돌아가게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또한 그대와 그대의 스승이 이 절안에 상주하는 길이기도 하다."
위와 같은 말을 하였더니 원지스님은 녜, 녜, 하고 수긍하였다. 그리고는 써서 기록으로 삼았다.
선덕(宣德) 8년(1533) 계축 2월 일
전주지 원지(遠芷)와 현주지 양침(良琛)이 함께 비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