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산 물은 물

46. 이웃마을 보시

쪽빛마루 2010. 1. 19. 19:52

46. 이웃마을 보시

 

 



성철스님의 나들이는 주로 가야산을 오르내리는 것이었는데, 어느날엔가 특별한 행차를 한 적이 있다. 행선지는 백련암에서 바로 보이는 마을이다. 마장(馬場) 이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이다. 마을 이름은 해인사만큼이나 오래된 유래를 지니고 있다.

가야산 자락의 구전에 따르면, 1천2백여년 전 신라 애장왕이 해인사를 창건할 당시 수시로 가야산을 찾았다고 한다. 해인사 큰절에서 가까운 암자인 원당암이 있는 자리에 아예 터를 잡고 그 곳에서 정사를 보며 해인사 창건을 독려했다. 마장이란 당시 말을 키우고 먹이던 곳이라고 전해온다.

"저 동네 사람들은 우째 사는고 내 한번 가봐야겠다. "

성철스님이 어느날 갑자기 바깥 나들이 준비를 지시했다. 나는 다른 일로 가지 못하고 다른 몇분 스님이 큰스님을 따라 나섰다. 백련암에서 마장까지는 6~7㎞나 되는 거리다.

백련암에서 신부락까지 2㎞ 남짓한 거리는 내리막이지만, 거기서부터 마장까지 4~5㎞는 서서히 굽어 도는 오르막길을 올라야 하기에 그렇게 쉽게 다녀올 길은 아니다.

큰스님은 점심공양 후 출발해 저녁 해거름 다되어 돌아왔다. 절에 도착하자마자 목이 타는지 샘물을 한 바가지 떠, 꿀꺽꿀꺽 마셨다. 그리곤 "어, 시원하다" 며 별 말 없이 방에 들어 쉬었다. 저녁 예불을 마치고 나서 큰스님이 제자들이 머무르고 있는 좌선실로 내려왔다.

"내 오늘 마장 갔다온 얘기 할 테니 잘 들어보거래이. "

무슨 말씀인가 싶어 다들 귀를 모았다.

"맨날 건너다 보면서 저곳은 어찌 사는고 참 궁금했는데, 오늘 가보니 지지리도 못살데. 사람 사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싶고, 애새끼들도 올망졸망하고…. 그래 가서 보니 참 딱하데. 뭐 우째 도와줄 수가 있을 낀데…. "

좀처럼 그런 말을 잘 안하던 큰스님이 그 날은 몹시 가슴 아파 하셨다. 결국 다음날 맏상좌인 천제스님이 큰스님께 불려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되겠다. 누구 시주할 사람 없는가 찾아봐라. 개개인에게 돈 줄 수도 없을 끼고 마을 공동으로 재산을 불릴 수 있도록 송아지 몇마리쯤 보시하면 안되겠나?"

시주물을 피하고, 세속과 떨어져 살고자 하는 성철스님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결정이다. 천제스님은 평소 큰스님을 존경하는 몇 신도들을 방문하기 위해 부산으로 갔다. 천일여객이란 버스회사를 운영하던 분께 부탁, 송아지 열마리를 마장에 기증할 수 있었다.

큰스님은 그후 보시한 그 처사를 볼 때마다 "보시처럼 좋은 인연과 공덕을 맺는 것이 어디 있겠노?

아주 훌륭한 불공을 했어" 라며 고마워했다.

그 뿐만 아니다. 큰스님의 마음을 읽은 우리는 명절이 되면 내복을 마장에 갖다 주었다. 승복이야 나눠 입을 수 없었지만 내복이야 승속이 따로 없는 까닭에 우리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남기고 가능한 한 성한 내복을 골랐다.

깨끗하게 빨아 매년 한두번씩 갖다주면 동네 사람들이 여간 고마워하지 않았다. 1970년대 초반까지의 얘기다.

그렇게 열심히 옷을 나눠입기를 몇년, 어느 해엔가 옷을 가져갔더니 마을 대표가 다소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스님,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이제 우리 마을도 살기가 좀 나아져 헌 내복 안 얻어입어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고만 수고하시소. "

'좀 살게 되었다' 는 얘기에 한편으론 기쁘고, 또다른 한편으론 헌 옷가지를 퇴짜맞았다 생각하니 무안한 마음이 들었다. 빨고 다려서 가져온 것을 그냥 들고 갈 수는 없었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테니 이것까지만은 받아주십시오. "

다음해부터는 신도들이 스님들 입으라고 가져오는 내복이 있으면 상표도 뜯지 않고 새 것으로만 차곡차곡 따로 쌓아두었다. 그리고 명절이 되면 마장에 갖다주었다. 그것도 불과 몇년을 계속하지 못했다.

"스님, 큰스님께 가서 말씀 올려주시소. 우리 마을도 이제 좀 살게 되어서 백련암에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입니더. 정말 그동안 백련암 큰스님과 스님들에게 감사드립니더. "

새 내복도 이제 마다하니 우리로서는 더 어쩔 수가 없었다. 고랭지 채소 재배붐이 일면서 마장의 살림이 급속히 풀려갔던 것이다. 그런 사정을 큰스님께 보고했다.

"그래 잘 살면 됐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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