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

[스크랩] 성철스님 [신심명 信心銘] : 막축유연(莫逐有緣) ~ 영지일종(寧知一種)

쪽빛마루 2010. 2. 1. 17:25

 

 

  


 

신심명[信心銘] 성철 큰스님 강의 

(三祖 僧璨大師)

 

2. 위순(違順, 거슬림과 따름) - 2

莫逐有緣 勿住空忍

막축유연 물주공인

세간의 인연도 따라가지 말고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말라.

 

'있음의 인연(有緣)'이란 세간법과 같은 말로서 인연으로 이루어진 세상일이라는 뜻입니다. 공의 지혜(空忍)란 곧 출세간법이라는 뜻입니다. 인연이 있는 세상일도 쫓아가지 말고 출세간 법에도 머물지 말라는 것이니 두 가지가 다 병이기 때문입니다.

있음(有)에 머물면 이것도 병이고, 반대로 공(空)함에 머물면 이거도 역시 병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있음을 버리고 공함을 취하거나, 공함을 버리고 있음을 취한다면 이것이 취사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때문에 우리가 무상대도를 성취하려면 세간의 인연도 버리고 출세간법도 버리고, 있음과 없음을 다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一種平懷 泯然自盡

일종평회 민연자진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사라져 저절로 다하리라.


'일종(一種)'이란 중도를 억지로 가리킨 말입니다. 있음과 없음을 다 버리고 양변을 떠나면 바로 중도(中道)가 아니냐 하는 말입니다. 일종이란 중도를 가리키므로 일체 만법이 여기에서 다해 버렸으며, 동시에 일체 만법이 원만구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절로 다한다'고 했다 해서, 무엇이 영영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여기서 '다한다'는 것은 일체 변견이, 일체 허망(妄)이 다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항하사(恒河沙) 같은 진여묘용이 현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 인연을 좇지도 않고 출세간의 법에도 머물지 않으면 중도가 현전하여 일체 변견이 다하고 항사묘용(恒沙妙用)이 원만구족하게 됩니다.

止動歸止 止更彌動

지동귀지 지갱미동

 

움직임을 그쳐 그침에 돌아가면
그침이 다시 큰 움직임이 되나니

"움직임을 그쳐서 그침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로 고요함(靜)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마음을 누르고 고요한 데로 둘아 가려하면, 고요 하려는 마음이 점점 더 크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화두를 열심히 참구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망상이 일어난다고 이 망상을 누르려고 하면 할수록 망상이 자꾸 일어 나는 것과도 같으니, 이는 망상에 망상을 보태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예를 들면 참선을 하는 데 있어서 '화두만 참구하고 일어나는 망상을 덜려고도 하지 말고 피하려고도 하지 말며, 오직 화두만 부지런히 참구하라'고 내가 누누이 일러주었는데도, 어떤 납자는 "자꾸만 일어나는 망상을 덜려고 하는 이것이 참선 공부에서 가장 힘들다"고 더러 나에게 말합니다.

이는 망상을 덜려고 망상을 일으킨 것으로서 망상에 망상 하나를 더 보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망상을 덜려는 생각도 덜지 않으려는 생각도 버려도 화두만 참구하라'고 납자들에게 더러 일러줍니다만, 그것이 쉽게 안 되는 모양입니다.

이것이 그침(止), 곧 고요함을 좋아하여 움직임(動)을 버리고 고요함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점점 더 크게 움직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唯滯兩邊 寧知一種

유체양변 영지일종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거니
어찌 한 가지임을 알 건가.


"양변에 머물러 있으니, 어떻게 중도를 알겠는가"하였습니다. '그침(止), 곧 고요함은 버리고 움직이는(動) 대로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겠지만 이것도 양변이라는 것입니다. 움직임도 고요함도 버리고 자성을 바로 볼 뿐, 양변에 머물러 있으면 일종(一種)인 중도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변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육조스님께서도 유언에서 '언제든지 양변을 버리고 중도에 입각해서 법을 써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출처 : 3000배
글쓴이 : 중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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