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재헌의 ‘선사, 애물단지를 깨다’]
2. 마조, 본질을 직시하다.
마음이 다른 건 달이 천강에 비친 모습일 뿐
우리가 부처님이 되는 것은
민들레가 튤립되는 것 아님
본질의 세계에 주목하면
민들레와 튤립은 곧 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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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가 되려고 발버둥 치던 마음이 바로 걸림돌이었음을 깨달은 도일에게 스승 회양은 게송 하나를 일러주었다.
마음바탕은 모든 종자를 머금어
촉촉한 비를 만나면 어김없이 싹트네
삼매 속에서 피어나는 꽃들 모양 없나니
무엇이 파괴되고 또 무엇이 생겨나랴.
달마의 가르침을 흔히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 한다. 마음의 바탕은 실로 ‘대지[地]’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봄볕이 돌아오고 때맞춰 봄비가 내리면 온 대지에 새파란 싹들이 돋아난다. 참새부리처럼 뾰족이 주둥이를 내민 그 싹들은 3월엔 그나마 엇비슷한 모습들이다. 하지만 4월이면 잎이고 줄기고 그 모양을 달리하느라 분주하고, 5월이면 제 모습을 갖춰 다양한 빛깔의 화려한 꽃들을 피운다.
이쯤 되면 빨간 튤립과 노란 민들레는 자리를 함께 할 수 없을 만큼 다른 존재로 취급된다. 창가에 화분을 둔다면 대부분 튤립 하나쯤 두기를 원할 것이다. 해서 튤립은 예쁜 화분에 담겨 아침저녁 살뜰한 보살핌을 받는다. 하지만 지천에 흐드러진 민들레는 돌아보는 눈길 하나 없이, 그저 그런 존재로, 어딘가에 머뭇거리다가, 가뭇없이 사라지기 십상이다. 만일 민들레에게 입이 달렸다면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 나도 튤립처럼 동그란 꽃잎에 붉은 빛깔을 가졌다면 얼마나 좋을까….”
튤립은 빳빳하다 못해 뻣뻣하게 고개를 세우고 으스댈 것이다.
“난 너하고 달라. 납작 고개 숙여, 어딜 감히.”
만약 이 모습을 회양선사가 지켜보았다면 이렇게 노래했을 것이다.
드넓은 대지에 온갖 씨앗 뿌려져
촉촉한 봄비 내리면 어김없이 싹트네
봄볕 속에 피어난 튤립과 민들레
한 줌 흙에서 다시 한 줌의 흙으로.
부처가 된다는 것은 민들레가 튤립이 되는 것이 아니다. 회양선사의 가르침으로 이를 깨달은 도일은 비로소 마음이 초연해질 수 있었다. 도일은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고 10년을 시봉하였고, 스승의 훈향을 맡으며 나날이 그 경지가 오묘해질 수 있었다. 이후 도일은 스승의 곁을 떠나 건양(建陽)에서 임천(臨川)으로, 다시 남강(南康)의 공공산(公山)을 떠돌다 종릉(鍾陵)의 개원사(開元寺)에서 법문을 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명성이 사방에 퍼져 강서(江西)의 마조(馬祖)로 불리며 호남(湖南)의 석두(石頭)와 함께 강호의 영웅으로 대접받았고, 천하를 짓밟은 망아지라 칭송받았다. 하지만 기실 그는 말이 많은 사람도, 논변이 유창한 사람도 아니었다.
법회 때면 수천 명이 운집하고 문하에서 139명의 선지식을 배출하였다지만 ‘사가어록’에 수록된 대중법문은 고작 3편이고, ‘조당집’에는 그나마 1편이 실려 있을 뿐이다. ‘조당집’에 수록된 대중법문의 첫마디는 매우 인상적이다.
“스님께서는 대중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조가 늘 대중에게 하셨다는 그 말씀의 핵심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그대들은 지금 자신의 마음이 곧 부처임을 믿어야 한다.
이 마음이 곧 부처님 마음이다[卽心是佛].
그러므로 ‘능가경’에서는
‘법을 구하는 이는 아무 구할 것이 없어야 한다.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따로 마음이 없다’고 하셨다.
이 뜻을 체득하면 그때그때 옷 입고 밥 먹으며 부처될 씨앗을 기르면서
그저 인연 따라 시절을 보내면 될 뿐이니, 더 이상 무슨 일이 있겠는가.”
우리의 마음은 갈등과 번민의 연속이다. 해서 불교에 입문한 이면 누구나 부처님처럼 모든 번뇌가 사라진 평온한 마음, 모든 것이 명료한 마음이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정작 어떻게 하면 그런 마음이 되는지는 알지 못한다. 결정적인 잘못은, 부처님의 마음이 현재 나의 마음과 판이하게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인지 마조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늘 말씀하셨다.
“그대 마음이 바로 부처님 마음이다.”
부처님처럼 평온한 마음을 밖에서 찾지 말라는 것이다. 밖이 아니면 어디서 찾으란 말인가? 마조는 현상에 집착하지 말고 본질을 직시하라고 가르쳤다.
“본원자리에서는 명칭도 평등하고, 의미도 평등하고,
일체법이 다 평등하며, 순수하여 잡스러움이 없다.”
현상의 세계에서는 민들레와 튤립이 전혀 다른 존재처럼 인식된다. 삐죽삐죽한 잎과 동그스름한 잎, 노란색과 빨간색 사이에는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본질의 세계에서는 민들레나 튤립이 전혀 차이가 없다.
똑같은 대지에서 똑같은 봄비에 똑같은 봄볕으로 자란 것이다. 흙과 물과 햇볕 외에 민들레에게는 없는 특별한 요소를 튤립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철지나 한 줌 흙으로 돌아갔을 때, 민들레에게 없는 튤립만의 성분이 남는 것도 아니다. 본질의 세계에 주목하면 민들레와 튤립은 진정 명칭도 평등하고, 의미도 평등하다.
이런 본질의 평등은 물질의 영역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심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기쁜 마음과 슬픈 마음, 명료한 마음과 복잡한 마음, 들뜬 마음과 평온한 마음, 탁한 마음과 순수한 마음이 하늘과 땅만큼 다른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그 근원을 추궁해 보면 하나의 달이 천개의 강에 비친 것처럼 한 마음의 다양한 작용일 뿐이다. 또한 튤립의 빨간색과 민들레의 노란색을 본질인 흙에서는 찾을 수 없듯이, 마음의 바탕에서는 나도 너도, 기쁨도 슬픔도, 깨달음도 미혹도 찾을 수가 없다. 마조는 이런 마음의 본질, 바탕, 지평을 직시하라고 가르쳤으니, 이것이 세존께서 가섭이 전했다는 ‘열반의 오묘한 마음[涅槃妙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기쁨과 명료함과 평온함이 지속되기를 갈구한다. 허나 이런 바람은 날아가는 화살에게 “거기 서”라고 소리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다. 물리현상이건 심리현상이건 모두가 인연의 화합일 뿐이고, 인연은 찰나찰나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인이 되고 부처가 되기를 갈구하고 슬픔을 기쁨으로, 미혹을 깨달음으로, 불안한 마음을 평온한 마음으로 바꾸려고 기를 쓴다. 허나 이런 노력은 민들레가 튤립을 닮으려고 자신의 잎에 가위질하고 꽃잎에 빨간 페인트를 칠하는 것만큼 안쓰러운 짓이다. 거기엔 아픔과 좌절이 있을 뿐 평안과 열반은 없다.
적어도 마조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렇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마조선사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도(道)는 닦을 것이 없으니 물들지만 말라. 무엇을 물들음이라 하는가? 생사심으로 작위와 지향이 있으면 모두 물들음이다. 그 도를 당장 알려고 하는가. 평상심(平常心)이 도이다.”
[출처 : 법보신문 201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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