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재헌의 ‘선사, 애물단지를 깨다’]
19. 위산, 똥을 치우다.
지혜·깨달음도 ‘내 것’이라 생각하면 집착
흘러가는 구름 잡아두려는 허욕
그것이 어리석고 부질없는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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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앞산에 올랐다. 진달래가 진 숲에서는 향기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더덕이라도 어디 한 뿌리 숨었는지 볕에 달구어진 둔덕에선 쌉싸래한 냄새가 풍기고, 물기가 잔뜩 오른 풀들에선 풋풋한 오이향이 풍겼다. 그 향기를 따라 오솔길을 헤매다 마른 목을 축일 요량으로 샘터로 내려갔을 때였다. 샘가에 졸졸이 늘어선 붓꽃이 속살을 내밀고 있었다. 늘 보던 보라색이 아니라 하얀색이라 더욱 눈길이 당겼다. 문득 목련이 연상되었다.
“어쩌면 저리 폭신폭신한 하얀빛일까?”
중학교 시절, 교정에 핀 목련꽃에 감탄을 하고 점심까지 굶으며 그 그늘에 앉았던 적이 있었다. 그 탐스러운 빛깔을 가지고 싶어 꽃잎을 몰래 훔치고, 작은 수첩에서 학생증을 빼고 그 자리에 꽃잎을 꼭 끼워 넣었다. 오후 수업시간 내내 수첩을 접었다 펼쳤다 하면서 투명한 비닐 속에 가둔 그 하얀빛에 흐뭇했었다. 딴에는 단단히 단속했으니, 제법 오래 가겠다 싶었다.
허나 웬걸, 하루도 못가 갈색으로 얼룩이 지더니 다음날엔 누렇게 바래고, 사흘째 되던 날엔 아예 짓무르기 시작했다. 결국 나흘째 되던 날, 그 꽃잎을 꺼내서 버리려다가 깜짝 놀랐다. 비닐 속에서 썩어버린 꽃잎은 코를 감아쥐게 할 만큼 지독한 악취를 풍겼다. 뜻밖이었다. 그 향긋하고 촉촉하던 속살이 이렇게 냄새나고 더러운 것으로 변하리라곤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생겼다가 인연 따라 사라진다.”
경전에서 이 구절을 처음 읽었을 때, 나의 뇌리를 스친 장면은 중학교 시절 그 목련꽃잎이었다. 빛깔과 소리와 향기, 나를 매혹시키고 나를 행복에 젖게 하는 것이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붙잡아 둘 수 없다. 아무리 두 손으로 꽁꽁 붙잡아도 결국 나의 손에 남는 것은 추한 빛깔로, 탁한 음성으로, 고약한 냄새들로 변해버린 그것들이다. 실망스러운 현실을 피하고 싶어 가만히 눈을 감고 찬란히 빛나던 순간을 떠올려보지만, 추억은 그리 큰 위로가 되질 못한다. 끝내 과거를 현재로 가져올 수도 없고,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 허전함 때문일까? 추억 속 유토피아를 잃은 사람들은 새로운 낙원을 찾아 사방을 헤맨다. 다시 행복해지길 기대하며 더욱 매혹적은 빛깔과 소리와 향기를 찾아 사방을 헤맨다. 그리고 그 순간 스스로 망각해버리고 만다. 다시 찾은 행복한 순간도 슬픈 그림자로 아쉬운 메아리로 남으리란 걸 말이다. 뻔히 경험하고도 잘못을 반복하는 악순환, 이것이 번뇌의 감옥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생겼다가 인연 따라 사라진다.”
엄연한 이 사실을 망각한 채 가뭇없이 사라지는 바람을 더듬고, 덧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붙잡아두려는 이 마음, 이게 붓다께서 평생 말씀하신 어리석음이고 부질없는 욕심인가보다. 그래서 선사들께서는 두고두고 말씀하셨나 보다. 무심(無心)이 도(道)라고 말이다. ‘위산록(山錄)’에서 말씀하셨다.
한 스님이 위산 영우(山靈祐 : 771~853)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도입니까?”
“무심(無心)이 도이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그 주인공을 알아야 하리라.”
“무엇이 그 모르는 주인공입니까?”
“그저 그대일 뿐,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위산 스님께서는 대중들에게 친절하게 말씀해 주셨다.
“지금 모르고 있는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참 마음입니다. 이 마음 이대로가 그대로 부처님의 마음임을 체득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지 않고 만약 밖을 향해서 이것저것 찾아다니고 이것저것 배워 하나하나 알음알이를 쌓고는 그것을 선(禪)의 길(道)이라고 한다면, 그건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똥을 퍼다 붓는 짓이지, 결코 똥을 퍼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짓은 여러분의 마음 밭을 오염시킬 뿐입니다. 그러므로 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알음알이 쌓아 선이라 하면 잘못
이는 똥 퍼내는 것 아닌 붓는 짓
아름다운 여인만 덧없는 것일까? 부와 명예만 덧없는 것일까? 여색과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것만 어리석음이고 욕심일까? 한때 나에겐 붓다와 도인이란 단어가 부자와 대통령보다 더 빛나던 시절이 있었다. 돈과 명예보다 깨달음과 해탈이 더 가지고 싶어 안달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건 어리석음이 아니고 욕심이 아닐까?
천하에 둘도 없는 지혜와 깨달음이라 해도 그것을 ‘나의 것’으로 가지려하고 붙잡아두려 한다면, 그건 부질없는 어리석음이고 욕심이다. 아름다운 목련꽃잎 한 장을 수첩에 끼워두면, 그 꽃잎 한 장만큼 악취를 맛보아야만 한다. 허니 그 잘난 ‘나의 깨달음’이 스스로를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냄새나는 똥을 치우듯 깨달음과 해탈을 추구하던 욕심을 흔쾌히 버려야 하리라. 굳이 깨달음을 말하고, 수행을 말하라면 아마 이게 깨달음이고 수행일 게다. 위산 스님도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도인의 마음은 솔직하고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무언가를 등지지도 말고 추구하지도 말고, 부질없는 이런 저런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루 종일 듣고 보는 일상생활에서 왜곡됨이 없어야 하며, 또한 눈을 감거나 귀를 막지도 않아야 합니다.
그저 사물에 좋다 싫다 하는 갖가지 정(情)을 붙여두지만 않으면 됩니다. 위로부터 모든 성인께서는 우리의 마음에서 어지럽고 탁한 쪽의 허물과 걱정을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만약 사실 그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잘못된 지각, 좋고 싫음에 집착하는 견해, 기억을 바탕으로 고정된 모습으로 파악하려는 생각의 습관이 없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가을 강물처럼 맑고 깨끗할 것입니다. 욕망에 이끌려 이것저것 하려들지 않고, 담박하여 어떤 장애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바로 도인(道人)이라 하고, 일 없는 사람이라 합니다.”
불법을 배운다는 것, 숲길을 걷는 것이나 비슷하지 싶다. 절로 마음이 한가해지고, 절로 걸음이 가뿐해지니 말이다. 부처님을 따라 걷는 숲길, 선사들을 따라 걷는 그 호젓한 오솔길에서는 보물을 발견해도 날름 줍지 말아야 하리라. 정신 차리고 보면 붓다가 뱉은 가래침이나 선사가 먹다버린 과자부스러기일 뿐이니 말이다.
붓다의 숲, 조사의 숲을 나올 땐 빈손으로 나와야 하리라. 냄새나는 똥을 퍼내듯, 온갖 망상과 갖가지 감정과 기억들을 고쟁이에 속에 꼭꼭 숨겨두었던 것까지 탈탈 털어버리고 나와야 하리라. 그 숲에서 폴폴 잘 썩어 거름이 되도록 내버려두고, 상큼한 가슴과 시원한 머리로 숲을 나서야 하리라.
[출처 : 법보신문 2012.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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