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산방야화山房夜話

수행을 하면 깨달을 수 있읍니까?

쪽빛마루 2014. 11. 30. 17:12

山房夜話  中

 

수행을 하면 깨달을 수 있읍니까?


 객승이 질문하였다.
 "인도땅에서 오신 달마스님의 가풍은 매우 엄격해서 말로 표현하기 이전에 알아버렸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옆길로 빠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수행에(修行)을 해서 되는 일이겠습니까? 더구나 마른 고목처럼 방석에 앉아 참선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또한 어떻게 선을 앉아서 하겠습니까? 이렇게 하는 것은 선대(先代)의 종지(宗旨)에 누를 끼치는 일이 아닐는지요?"
 나는 말했다.
 "누를 끼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대는 말을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료. 용담(龍潭)스님이 스승인 천황(天皇: 748∼807)스님에게 묻기를,'제기 오랫동안 스님 밑에서 공부를 했는데도 제게 심요(心要)를 보여주시지 않았읍니다'라고 하자, 천황스님은, '그대가차를 갖고 오면 나는 차를 받아 마셨고, 그대가 문안을 드리면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이것이 그대에게 심요를 열어 보여준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자, 용담스님이 드디어 깊은 뜻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 공안은 수행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매우 명쾌하고 쉬운것인 듯 하지만 우리 종문(宗門)의 입장에서 보면 옆길로 샌 것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위산(위山)스님이 향엄(香嚴)스님에게, 부모가 그대를 낳아주기 이전의, 그대의 참 모습이 무엇이냐고 묻자 향엄스님은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도리어 위산스님이 설명해주기를 바랬는데, 위산스님이 허락히지 않았읍니다. 그러자 향엄스님은 평소에 공부했던 것을모두 버리고 남양(南陽) 땅으로 들어가 한 암자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얼마를 지내다가 갑자기 기왓장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는 단박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 깨달음이 있기까지는 수행한다는 티를 내지않고 묵묵히 암자
에 기거하면서 그 문제를 생각하고 그 문제 속에서 살았다고할 수 있읍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노력해서 된 것은 아닙니다. 비록 그가 말이 떨어지자마자 깨닫지는 못하고, 많은 세월을 지내고서야 깨달았지만 그가 깨달은 깊은 경지가 달마스님이 전한 경지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읍니까?
 요즈음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몇 가지 어리석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읍니다. 첫째는 고인들처럼 진실하지 못하고, 둘째는 생사(生死)의 덧없음을 뼈저리게 느껴 그것을 일생의 대사(大事)로 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오랜 세월 동안잘못 익힌 수행 방법을 버리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화두를 들기는 하지만, 방석이 따뜻해지기도 전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마음이 어지러워집니다. 이것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심신(心身)이 채 갖추어지지 않은 때문입니다. 참으로 딱한 일이라 하겠읍니다. 설사 미륵(彌勒)부처가 태어난다 하더라도 이런 폐단을 다 없앨 수 있겠옵니까?
 성취하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 자기가 미치지 못하는 것은탓 하지 않고 도리어 불법(佛法)이 쇠퇴하고 총림(叢林)의 운이 다했다고 핑계를 냅니다. 그리하여 현재의 처지는, 훈련을 시켜주는 스승도 없고 일깨워 주는 친구도 없으며, 주거도 불편하고 음식도 먹을 수가 없으며, 법도도 없고 주위도 시끄럽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수행이 안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이 나오고부터는 도(道)를 배운다는 사람치고 이것을 구실로 삼지 않는 자자 없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농부가 땅을 갈고 김매는 일은 하지 않으면서 제 때에 비가오지 않는 것만 탓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렇게 하고서도 가을에 결실이 풍성하기를 바라겠습니까? 나를 배우는 사람이 환경의 좋고 나쁨만을 따지기만 합니다. 그러다 한 생각이 어지러워지면 환경 탓만 할 뿐입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그 사람이 만겁의 생사 굴레에 얽히고 결박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 탓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대는 듣지 못했습니까? 설산(雪山)의 늙은 사문〔석가모니 부처님〕이 만승(萬乘)이나 되는 존귀한 영화를 모두 버리고 6년간이나 얼음위에 누워 고행을 하며 황벽(黃蘗) 나무를 씹으면서 춥고 배고픈 가운데서도 몸을 돌보지 않고 수행하다가 드디어는 샛별을 보고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또한 부처님 이후 서천(西天)땅의 28조사(二十八祖師) 모두가 바위나 동굴 등에 거처하였옵니다. 혹 세상사에 섞여 있어도 진심(眞心)을 잃지 않고 참다운 수행을 어김없이 해서 모두 스스로 깨달아 부처님의 심인(心印)을 전했던 것입니다.
 달마스님이 중국으로 오고 백장(百丈)스님이 탄생하기 이전에 우두(牛頭)스님이 옆으로 한 가지 나와 남북종(南北宗) 양파로 나뉘어졌읍니다. 그 영향으로 수행자들은, 허리에는 낫을 차고 어깨에는 삽을 걸치고는 화전(火田)으로 나가 농사를 지어 직접 밥을 짓고 절구질을 했으며, 너절한 누더기를 걸치고 구걸을 하였읍니다.
철석같은 신심(身心))과 빙상(氷霜)같은 신념으토 불조(佛祖)의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한 어깨에 걸머졌읍니다. 그래도 결코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가야할 곳을 스스로 갔기 때문에 도달한 곳이 언제나 정확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어느곳에 5산10찰(五山十刹) 같이 으리으리한 거처와, 3현(三玄)이니 5위(五位)니 하는 괴이 하고 복잡한 이론과, 방(放).수(收).살(殺).활(活)의 구별 및 염(염).송(頌).판(判).별(別) 같은 복잡한 이론이 있었겠읍니까?
 원래 흠집이 없는옥(玉)은 갈고 닦지 않아도 되는데 무슨연장이 필요하겠습니까?

안목이 처음부터 올바랐던 것입니다.
 백장(百丈)스님이 총림(叢林)을 건립한 이래로 광대한 전답과 큰 집은 많아졌지만, 수행하는 자세는 퇴보하여 잘못과 허망이 도리어 늘어났읍니다. 그 결과 쓸데없는 기강만 날로 번거로와졌고, 실제로 예의는 나날이 사라져 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이미 수백년 전에 선풍(禪風)의 진면목을 제창하신 임제(臨濟).덕산(德山).운문(雲門).진정(眞淨:1025∼1102) 같은 스님은 분하고도 분한 기상으로 노하여 마치 음란한 여인을 보듯이 꾸짖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도의 근본은 체득하지 못하고, 쓸데없이 입으로만 깨달으려 애써 결국은 서로률 속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읍니다. 그 사이에 또 삿된 스승이있어 제방(諸方)을 깨우치고 선(禪)을 말한다는 것이 마치 섭공(葉公)이 용(龍)을 좋아하듯 하고, 조창(趙昌)이 화조(花鳥)를 그리듯 사이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섭공과 조창 자신이 잘못되었는데, 더우기 그들의 흉내 따위나 내는 자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비슷한 것을 진실인 양하는 잘못이 오늘날엔들 없다 하겠읍니까?
 이렇게 보건대, 참답게 구하고 실제로 깨달은 인재를 만나는 것이 오늘날에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지난날에도 힘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고 생사의 정망(情妄)과 무명(無明)의 결습(結習)이 끊임없이 일어나 조금도 쉴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골수에 사무치도록 열심히 생사를 끊는 듯한 정념(正念)으로, 원수와 적을 만난 듯이 화두(話頭)에 몰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생(生) 두 생(生)을끊임없이 눈을 부릅뜨고 화두를 들어 깨닫기를 기다리지 않는다면 섭공과 조창같은 부류에게 미혹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3조(三祖) 승찬대사(僧璨大師)가, '증오와 사랑만 없다면 깨달음이 뚜렷이 명백해질 것이다'라고 한 것과,영가대사(永嘉大師)가,'망상도 제거하지 말고 진실도 구하지말라'라고 한 것을 인용하여 증거로 대면서 '이것이 바로 깨닫는 이치인데, 무엇 때문에 한 생(生) 두 생(生)씩 육체를 수고롭게 하고 마음을 괴롭혀가면서 도를 얻으려 하는가?'라고 합니다. 이런 말들이 유행하면서 섭공, 조창같은 어리석은 마음이 일어났고, 끌내는 이 마음을 그칠 수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영가스님이, '범재(法財)를 손상시키고 공턱을 소멸하는 것은 바로 사량분별〔心意識〕때문이다'라고 했읍니다. 시람들이 올바른 깨달음은 구하지 않고 헛되게 사량분별도 따져 이해한 그럴듯한 말들을 영가스님이 통렬하게 비판한것입니다. 한 사람이 잘못 전한것을 만 사람이 진실인 양 전하였으나, 사이비는 어디까지나 사이비지 진실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저 탄식만 나올 뿐입니다. 그 때문에 옛 사람들이 말하기를, '참선은 성실하게 해야하고 깨달음은 진실하게 깨달아야하니, 염라대왕은 말 많은 것을 개의치 않는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참으로 옳은 것입니다.
 저는 정말이지 진실하게 깨달은 사람은 되지 못하지만, 결코 경솔하게 섭공과조창의 전철을 밟지는 않습니다. 평소 다른 사람에게 이러쿵저러쿵[〔東語西話〕참선에 대해 비평한 것은 내 스스로 깨달은 법문(法門)일 뿐이지, 아는 것을 가장해 다른 사람의 칭찬을 들으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러니 남들이 혹 믿어준다 하더라도 기뻐하지 않고, 또 믿어주지 않는다교 해서 어찌 노하겠습니까? 또한 믿고 안 믿고는 모두 그 자신의 마음에 달려있으니, 어찌 제가 기뻐하거나 노하겠습니까? 오직 같은 길을 가는 사람만이 알아줄뿐입니다. 혹 허망히 속인다고 나무란다 해도 어찌 싫어하겠읍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