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空)·가(假)·중(中) 3제(三諦)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이면서 셋이니, 이것은 마치 물·파도·얼음이 습성(濕性)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셋이면서 하나이니,이것은 마치 금화·소반·비녀는 모두 금으로 만든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것은 쓰임새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본체는 다를바가 없다.
본체의 측면에서 사물의 작용을 관찰하기는 쉽지만 각각의 작용을 모두 합쳐 본체로 귀납하기는 어렵다. 모름지기 알아야 할것은 본체는 작용하는 속에 있고 작용하는 속에서 본체를 찾을 수 있다. 만일 오묘하게 깨닫지 않고 알음알이로만 이해한다면 서로 맞아떨어지질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한 '셋'은 무슨 뜻이겠는가?
진제(眞諦)·속제(俗諦)·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이다. 그렇다면 '하나'는 무엇인가? 바로 그 사람 본래 마음이다. '하나이면서 셋이다'고 말하는 것은 이 마음이 곧 진제이기도 하고, 속제이기도 하고, 중도제일의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셋이면서 하나이다'고 한 말은 진제·속제·중도제일의제가 모두 자기 마음의 현량(現量)이 밖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의미이다. 형계(荊溪 : 711~ 782)스님께서는, "진제는 모든 법을 부정하고, 속제는 모든 법을 긍정하고, 중도제일의제는 모든 법을 회통한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옛 가르침에도 "이치로는 본래 진제와 속제 둘이지만, 깨닫고 보면 본래는 항상 하나이다."고 했던 것이다.
현수(賢首 643 ~ 712)스님이 말한 4구(四句)의 게송에도, "진제를 의지하여 속제로 들어감이 1구이고, 속제를 따라 진제에 회합하는 것이 1구이며, 진제이니 속제이니 하는 구별을 버리고 중도제일의제에 들어가는 것이 1구이고, 중도제일의제에 상즉하여 진제·속제를 모두 수용하는 것이 1구이다."라고 한 것이다. 천태(天台 : 538 ~ 597)스님도 말하기를, "진제는 독립적으로 진제가 아니라, 속제에 대한 상대 개념으로서 진제이다. 속제 또한 독립적으로 속제가 아니라, 진제에 대한 상대 개념으로서 속제인 것이다. 중도제일의제 역시 독립적으로 중도제일의제가 아니다. 말하자면 진·속 2제(二諦)는 하나이면서 단독자가 아니고, 둘이면서도 개별적인 둘이 아니다. 서로를 드러내면서도 서로를 부정하여, 상즉상융(相卽相融)하여 중도제일의제가 되는 것이다"고 하였다. 또한 "공(空)이 절대 공(斷空)이라면 색 (色)과 융합하지 못하고, 색이 절대 색(實色)이라면 공과 혼합하지 못한다. 절대라면 진정한 공이 될 수 없고, 절대라면 참된 색이 될 수 없다. 서로 두 극단에 서 있으나 완전한 중도이다. 이러한 심체(心體)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진제를 마주하면 단견(斷見)에 집착하고, 속제로 들어가면 상견(常見)에 미혹된다. 두 견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면 중도에서 어긋난다" 하였다.
이 말은 경학(經學)을 강론하는 자들이 일찍부터 주장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주장은 했으면서도 실제 이치는 깨닫지 못했다. 그 까닭은 알음알이로 문자에 의지해 이해했을 뿐 오묘하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묘하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주관·객관의 자취가 뚜렷해졌고, 알음알이가 많아질수록 미혹의 정은 더욱 무거워진다. 이른바 '깨달음'이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이겠는가? 그것은 이 한마음의 지극한 본체를 직접 보았다는 것이다. 그럼 '알음알이'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3제(三諦)의 헛된 자취만을 마냥 연구한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알음알이와 다르고, 알음알이는 깨달음과 다르다. 깨달음의 본지는 마음으로는 통하지만, 말로 의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진실하게 참구한 사람은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학문으로 이해한 것이 설사 현묘하고 현묘하다 할지라도 신묘한 깨달음과는 견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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