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나옹록懶翁錄

해제(解題)

쪽빛마루 2015. 7. 8. 04:07

해제(解題)

 

 나옹 혜근(懶翁惠勤)스님의 어록을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이라 한다. 이 어록에 실려있는 스님의 행장과 탑명에 의하면, 스님은 영해부(寧海俯) 사람으로 속성은 아(牙)씨이고, 아버지는 선관령(膳官令 : 궁중의 음식을 관리하는 직책)을 지냈다.

 스님의 나이 스무 살 때(1340년) 친구의 죽음을 보고 생에 의문을 가져서 공덕산(功德山) 요연(了然)스님께 출가하였다. 이후 회암사(檜巖寺)로 가서(1344년) 밤낮으로 수도하던 중 크게 깨치고 1348년 중국으로 가서 대도(大都) 법원사(法源寺)에서 지공화상(指空和尙)을 친견하고 한 해를 머물렀다(다른 기록에 의하면 스님은 8살 때, 당시 고려에 왔던 지공스님에게서 보살계를 받았으며, 그 보살계첩이 지금도 전한다). 그 다음 해에는 휴휴암(休休菴)에서 여름 안거를 지냈다.

 그 후 평산 처림(平山處林 : 임제종 양기파)스님에게서 불법을 이어받고 강남(江南) 등지를 행각하였다. 다시 지공스님을 찾아뵙고서 그에게서 선지(禪旨)를 전해 받았다. 이때 법의(法衣), 불자(拂子), 범어(梵語)로 쓴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이후 광제선사(廣濟禪寺)에서 개당설법을 하였고(1356년), 다시 지공스님을 뵌 후 고려로 돌아왔다(1358년), 10여 년만의 귀국이었다.

 내원당에서 심요법문을 한 후 신광사(神光寺)에 주지로 있었다(1361년). 그 후 구월산(九月山)과 금강산(金剛山)에 계셨으며, 청평사에 계실 때 (1367년) 지공스님이 보낸 가사와 편지를 받았고, 4년 후 회암사에서 지공스님의 사리를 친견했다.

 1370년 스님이 51살 때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서 공부선(功夫選)을 주관하였다. 여기에서는 선과 교를 총망라하여 시험을 보았으나 오직 환암혼수(幻庵混修)만이 스님의 인정을 받았다. 이때 당시의 국사이며 화엄종의 대종사인 설산(雪山 : 千熙)스님을 방석으로 때린 사건이 이 어록에 실려 있다. 이듬해 8월 왕사(王師)로 봉숭되어 금란가사와 법복 및 바루를 하사받았다. 그 후 4년간은 병란에 불타버린 회암사 중창에 전력하였다.

 그동안에 공민왕이 돌아가시고 우왕이 즉위하여 다시 왕사로 추대되었으나 회암사를 낙성한 직후에 중앙 대간(臺諫)들의 압력으로 밀양 영원사(塋源寺)로 그 처소를 옮겨가던중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하시니(1376년 5월 15일) 세수는 57세이고 법랍은 38세이다.

 스님은 자기의 죽음을 스스로 ‘열반불사(涅槃佛事)’라고 하였는데, 스님의 열반 후 10여 년 이내에 신륵사 이외에도 금강산, 치악산, 소백산, 사불산, 용문산, 구룡산, 묘향산 등 7개 소에 이색(李穡)이 찬한 탑비가 세워졌고, 또 원주 영전사(令傳寺)에도 탑비가 세워졌다.

 스님의 어록은 ‘어록(語錄)’과 ‘가송(歌頌)’ 두 권으로 되어 있다. 시자 각련(覺璉)이 수집한 어록에는 상당법어 29칙, 짧은 글 25칙, 이색이 찬한 탑명과 문인 각굉(覺宏)이 쓴 행장이 실려 있다.

 이 상당법문의 형식상 특색은 첫째 특별한 구분의 기준 없이 스님이 중국 광제선사에서 개당한 때의 법문을 시작으로 하여 스님의 행장과 거의 비슷한 순서로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법문에 대해 시기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상당법문에는 공민왕과 그 왕비인 승의공주에 대한 수륙재(水陸齋)에서 행한 법문을 비롯하여 영가를 위한 법문이 특히 많다. 그리고 대어(對語) 6칙, 감변(勘辨) 3칙, 착어(着語) 1칙은 무척 특색있는 법문이다.

 법문의 내용은 주로 간절하게 화두를 참구할 것을 말하였다. 즉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는 먼저 신심과 의지가 견고해야 하며, 하루 종일 화두를 들어서 마침내 저절로 의심이 일어나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마치 물살 급한 여울의 달과 같아서 부딪쳐도 흩어지지 않고 움직여도 없어지지 않는 지경이 되어 크게 깨침에 가까웠다고 한다. 특히 화두공부를 점검하는 10가지를 모아서 ‘공부10절목(工夫十節目)’이라 하였다. 또 법문을 하면서 주장자, 죽비, 불자, 할 등을 사용하였고, 영가에 대한 법문에서는 주장자 대신에 죽비를 사용하였다.

 시자 각뢰(覺雷)가 편집한 가송(歌頌)에는 완주가(翫珠歌) 60구, 백납가(百納歌) 40구, 고루가(枯髏歌) 52구의 노래 세 수[三種偈]를 비롯하여 게송, 찬(讚), 발원문 그리고 ‘노래 세 수’에 대해 이색이 쓴 후기가 함께 실려 있다.

 게송은 단순히 풍경을 읊은 것을 비롯하여 계명(戒銘 : 이름을 지어주면서 그 이름을 풀이하여 지어주는 글), 여러 선인(禪人)을 떠나보내며 당부하는 것, 게송을 청하기에 주는 것, 임금의 덕을 칭송한 것, 옛사람의 송(頌)에 답한 것, 세상을 경계한 것, 제(題)한 것 등 여러 가지를 모은 것이다. 승원가에서는 아미타불을 염불할 것을 말하고 있는데, 누이동생에게 준 글 등에서도 아미타불을 염할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법장(法藏)비구가 스님의 삼종게를 계승하여 보다 장편으로 발전시킨 ‘보제존자 삼종가(普濟尊者三種歌)’는 백납가 200구, 고루가 144구, 영주가 300구이며, 스님이 쓴 ‘승원가(僧元歌)’는 405구의 장편 가사로 이두(吏讀)로 쓰여 있다.

 이렇게 수집된 어록은 환암 혼수가 교정을 하고 문인인 각우(覺玗, 또는 覺玕), 각변(覺卞), 각연(覺然), 유곡(幽谷), 굉각(宏覺) 등이 힘을 모아 간행하였다.

 그런데 이색의 서문에 의하면 "옛 본을 교정하여 출판하려고 내게 서문을 청한다" 고 하였고, 백문보(白文寶)의 서문은 지정(至正) 23년(1363)에 씌어졌다. 이때는 스님께서 신광사에 거주하던 시기이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스님께서 신광사에 거주하던 시기에 누군가에 의해서 스님의 어록이 한 번 편집되었고, 이것이 나중에 이색으로 의해 ‘옛 본’ 이라 한 것인 듯하다. 결국 스님의 어록은 두 번 편집된 것으로 그 처음은 중국에서 돌아온 얼마 후에 있었고, 다음은 열반하신 후의 것으로 지금 전하는 것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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