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나옹록懶翁錄

행장 2.

쪽빛마루 2015. 7. 8. 04:24

행장 2.

 

 

 그 해 3월에 대도를 떠나 통주(通州)에서 배를 타고, 4월 8일에 평강부 (平江府)에 이르러 휴휴암(休休艤)에서 여름 안거를 지냈다. 7월 19일에 떠나려 할 때, 그 암자의 장로가 만류하자 스님은 그에게 게송을 지어 주었다.

 

쇠지팡이를 날려가며 휴휴암에 이르러

쉴 곳을 얻었거니 그대로 쉬어버렸네

이제 이 휴휴암을 버리고 떠나거니와

사해(四海)와 오호(五湖)에서 마음대로 놀리라.

鐵錫橫飛到休休  得休休處便休休

如今捨却休休去  四海五湖任意游

 

 8월에 정자선사(淨慈禪寺)에 이르렀는데, 그 곳의 몽당(蒙堂)노스님이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 나라에도 선법(禪法)이 있는가?"

 스님은 게송으로 대답하였다.

 

부상국(扶桑國)에 해가 오르매

강남의 바다와 산이 붉었다

같고 다름을 묻지 말지니

신령한 빛은 고금에 통하네.

日出扶桑國  江南海嶽紅

莫問同與別  靈光亘古通

 

 그 노스님은 말이 없었다. 스님이 곧 평산처림(平山處林)스님을 뵈러 갔다. 그때 평산스님은 마침 승당에 있었다. 스님이 곧장 승당에 들어가 이리저리 걷고 있으니 평산스님이 물었다.

 "스님은 어디서 오시오?"

 "대도에서 옵니다."

 "어떤 사람을 보고 왔는가?"

 "서천의 지공스님을 보고 왔습니다."

 "지공은 날마다 무슨 일을 하던가?"

 "지공스님은 날마다 천검(千劍)을 씁니다."

 "지공의 천검은 그만두고 그대의 일검(一劍)을 가져 오라."

 스님이 대뜸 좌복으로 평산스님을 후려치니 평산스님은 선상에 거꾸러지면서 크게 외쳤다.

 "이 도적놈이 나를 죽인다!"

 스님은 곧 붙들어 일으켜 주면서 말하였다.

 "내 칼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살리기도 합니다."

 평산스님은 '하하' 크게 웃고는 곧 스님의 손을 잡고 방장실로 돌아가 차를 권했다. 그리하여 몇 달을 묵게 되었다.

 어느 날 평산스님이 손수 글을 적어 주었다.

 "삼한(三韓) 의 혜근 수좌가 이 노승을 찾아왔는데, 그가 하는 말이나 토하는 기운을 보면 불조(佛祖)와 걸맞다. 종안(宗眼)은 분명하고 견처(見處)는 아주 높으며 말 속에는 메아리가 있고 글귀마다 칼날을 감추었다. 여기 설암스님이 전한 급암 스승님[先師]의 법의 한 벌과 불자 하나를 주어 믿음을 표한다."

 뒤이어서 게송을 지어 주었다.

 

법의와 불자를 지금 맡기노니

돌 가운데서 집어낸 티없는 옥일러라

계율의 근(根)이 깨끗해 보리(菩提) 얻었고

선정과 지혜의 광명을 모두 갖추었네.

拂子法衣今付囑  石中取出無瑕玉

戒根永淨得菩提  禪定慧光皆具足

 

 11년(1351) 신묘 2월 2일, 평산스님을 하직할 때 평산스님은 다시 글을 적어 전송하였다.

 "삼한의 혜근 수좌가 멀리 호상(湖上)에 와서 서로 의지하고 있다가, 다시 두루 참학하려고 용맹정진할 법어를 청한다. 토각장(兎角杖)을 들고 천암(千巖)의 대원경(大圓鏡) 속에서 모든 조사의 방편을 한 번 치면, 분부할 것이 없는 곳에서 반드시 분부할 것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게송을 지어 주었다.

 

회암 (檜岩)의 판수(板首)가 운문(雲門)을 꾸짖고

백만의 인천(人天)을 한 입에 삼켰네

다시 밝은 스승을 찾아 참구한 뒤에

집에 돌아가 하는 설법은 성낸 우뢰가 달리듯 하리.

檜巖板首罵雲門  百萬人天一口呑

更向明師參透了  廻家說法怒雷奔

 

 스님은 절하고 하직한 뒤에 명주(明州)의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으로 가서 관음을 친히 뵈옵고, 육왕사(育王寺)로 돌아와서는 석가상(繹迦像)에 예배하였다. 그 절의 장로 오광(悟光)스님은 다음 게송을 지어 스님을 칭찬하였다.

 

분명히 눈썹 사이에 칼을 들고

때를 따라 죽이고 살리고 모두 자유로워

마치 소양(昭陽)에서 신령스런 나무 보고

즐겨 큰 법을 상류(常流)에 붙이는 것 같구나.

當陽挂起眉間劍  殺活臨機總自由

恰似昭陽見靈樹  肯將大法付常流

 

 스님은 또 설창(雪窓) 스님을 찾아보고 명주에 가서 무상(無相) 스님을 찾아보았다.*

 또 고목 영(故木榮) 스님을 찾아가서는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았는데 고목스님이 물었다.

 "수좌는 좌선할 때 어떻게 마음을 쓰는가?"

 "쓸 마음이 없소."

 "쓸 마음이 없다면 평소에 무엇이 그대를 데리고 왔다갔다하는가?"

 스님이 눈을 치켜뜨고 바라보니 고목스님이 말하였다.

 "그것은 부모가 낳아준 그 눈이다. 부모가 낳아주기 전에는 무엇으로 보는가?"

 스님은 악! 하고 할(喝)을 한 번 하고는 "어떤 것을 낳아준 뒤다 낳아주기 전이다 하는가?" 하니 고목스님은 곧 스님의 손을잡고, "고려가 바다 건너 있다고 누가 말했던가" 하였다. 스님은 소매를 떨치고 나와버렸다.

 

 임진년(1352) 4월 2일에 무주(婺州) 복룡산(伏龍山)에 이르러 천암 원장(千巖元長)스님을 찾았다. 마침 그 날은 천여 명의 스님네를 모아 입실할 사람을 시험해 뽑는 날이었다. 스님은 다음의 게송을 지어 올렸다.

 

울리고 울려 우뢰소리 떨치니

뭇 귀머거리 모두 귀가 열리네

어찌 영산(靈山)의 법회뿐이었겠는가

구담(曇)은 가지도 오지도 않네.

擊擊雷首振  群聾盡豁開

豈限靈山會  瞿曇無去來

 

 그리고 절차에 따라 입실하였다.

 천암스님은 물었다.

 "스님은 어디서 오는가?"

 "정자선사에서 옵니다."

 "부모가 낳아주기 전에는 어디서 왔는가?"

 "오늘은 4월 2일입니다."

 천암스님은 "눈 밝은 사람은 속이기 어렵구나" 하고 곧 입실을 허락하였다. 스님은 거기 머물게 되어 여름을 지내고 안거가 끝나자 하직을 고했다. 천암스님은 손수 글을 적어 주며 전송하였다.  

 "석가 늙은이가 일대장교를 말했지만 그것은 모두 쓸데없는 말이다. 마지막에 가섭이 미소했을 때 백만 인천이 모두 어쩔 줄을 몰랐고, 달마가 벽을 향해 앉았을 때 이조는 눈 속에 서 있었다. 육조는 방아를 찧었고, 남악(南嶽)은 기왓장을 갈았으며, 마조(馬祖)의 할(喝) 한 번에 백장(百丈)은 귀가 먹었고, 그 말을 듣고 황벽(黃岫)은 혀를 내둘렀었다. 그러나 일찍이 장로 수좌를 만들지는 못하였다.

 진실로 이것은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형상으로 그릴 수도 없으며, 칭찬할 수도 없고 비방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만 저 허공처럼 텅 비어 부처나 조사도 볼 수 없고 범부나 성인도 볼 수 없으며, 남과 죽음도 볼 수 없고 너나 나도 볼 수 없다. 그 지경[分際 : 테두리, 범위]이르게 되어도 그 지경이라는 테두리도 없고, 또 허공의 모양도 없으며 갖가지 이름도 없다. 그러므로 형상도 이름도 떠났기에 사람이 받을 수 없나니, 취모검(吹毛劍)을 다 썼으면 빨리 갈아두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취모검은 쓰고 싶으면 곧 쓸 수 있는데 다시 갈아두어서 무엇하겠는가. 만일 그대가 그것을 쓸 수 있으면 노승의 목숨이 그대 손에 있을 것이요, 그대가 그것을 쓸 수 없으면 그대 목숨이 내 손안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할을 한 번 하였다.

 스님은 천암스님을 하직하고 떠나 송강(松江)에 이르러 요당(了堂)스님과 박암(泊艤) 스님을 찾아보았으나 그들은 감히 스님을 붙잡아 두지 못하였다.

 그 해 3월에 대도 법원사로 돌아와 다시 지공스님을 뵈었다. 지공스님은 스님을 방장실로 맞아들여 차를 권하고, 드디어 법의 한 벌과 불자 하나와 범어로 쓴 편지 한 통을 주었다.

 

백양(百陽)에서 차 마시고 정안(正安)*에서 과자 먹으니 

해마다 어둡지 않은 한결같은 약이네

동서를 바라보면 남북도 그렇거니

종지 밝힌 법왕에게 천검(千劍)을 준다.

百陽喫茶正安果  年年不昧一通藥

東西看見南北然  明宗法王給千劍

 

 스님은 답하였다.

 

스승님 차를 받들어 마시고

일어나 세 번 절하니

다만 이 참다운 소식은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다.

奉喫師茶了  起來卽禮三

只這眞消息  從古至于今

 

 그리고는 거기서 한 달을 머물다가 하직하고, 여러 해 동안 연대(燕代)의 산천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 도행(道行)이 황제에게 들려, 을미년(1355) 가을에 성지(聖旨)를 받고 대도의 광제선사(廣濟禪寺)에 머물다가, 병신년(1356) 10월 15일에 개당법회를 열었다. 황제는 먼저 원사 야선첩목아(院使 也先帖木兒)를 보내 금란가사와 폐백을 내리시고 황태자도 금란가사와 상아불자를 내렸다. 이 날에는 많은 장상(將相)과 그들 관리, 선비들, 여러 산의 장로들과 강호의 승려들이 모두 모였다. 스님은 가사를 받아들고 중사(中使)*에게 물었다.

 "산하대지와 초목총림이 하나의 법왕신인데 이 가사를 어디다 입혀야 하겠는가?"

 중사는 모르겠다 하였다. 스님은 자기 왼쪽 어깨를 기리키며 "여기다 입혀야 하오" 하고는 다시 대중에 물었다.

 "맑게 비고 고요하여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찬란한 이것은 어디서 나왔는가?"

 대중은 대답이 없었다. 스님은 "구중 궁궐의 금구(金口)에서 나왔다" 하고는 가사를 입고 황제를 위해 축원한 뒤에 다시 향을 사르고 말하였다. "이 하나의 향은 서천의 108대 조사 지공대화상과 평산화상에게 받들어 올려 법유(法乳)의 은혜를 갚습니다."

 17년(1357)정유년에 광제사를 떠나 연계(燕薊)의 명산에 두루 다니다가 다시 법원사로 돌아와 지공스님에게 물었다.

 "이제 제자는 어디로 가야 하리까?"

 지공스님이 말하였다.

 "그대는 본국으로 돌아가 '삼산양수(三山兩水)' 사이를 택해 살면 불법이 저절로 흥할 것이다."

 무술년 (1358) 3월 23일에 지공스님을 하직하고 요양(遼陽)으로돌아와 평양과 동해 등 여러 곳에서 인연을 따라 설법하고, 경자년(1360) 가을에 오대산에 들어가 상두암(象頭艤)에 있었다. 그때 강남지방의 고담(古潭)스님이 용문산을 오가면서* 서신을 통했는데, 스님은 게송으로 그에게 답하였다.

 

임제의 한 종지가 땅에 떨어지려 할 때에

공중에서 고담 노인네가 불쑥 튀어나왔나니

삼척의 취모검을 높이 쳐들고

정령(精靈)들 모두 베어 자취 없앴네.

臨濟一宗當落地  空中突出古潭翁

把將三尺吹毛劍  斬盡精靈永沒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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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두 곳에 있었던 이야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원문 주】

* 정안(正安) : 지공스님의 방장실【원문 주】

* 중사(中使) : 왕명을 전하는 내시.

* 당시 용문산에는 태고스님이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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