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지공화상 생일에
스님께서 화상의 진영 앞에 나아가 말씀하셨다.
얼굴을 마주 대고 친히 뵈오니
험준한 그 기봉(機鋒)에 모골(毛骨)이 시리다
여러분, 서천(西天)의 면목을 알려 하거든
한 조각 향 연기 일어나는 곳을 보라.
驀而相逢親見徹 機鋒嶮峻骨毛寒
諸人欲識西天而 一片香烟起處看
향을 꽂고는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말씀하셨다.
"말해 보시오. 서천의 면목과 동토의 면목이 같은가 다른가. 비록 흑백과 동서는 다르다 하나, 뚜렷한 콧구멍은 매한가지니라."
14. 지공화상 돌아가신 날에
1.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왔어도 온 것이 없으니 밝은 달 그림자가 강물마다 나타난 것 같고, 갔어도 간 곳 없으니 맑은 허공의 형상이 모든 세계에 나누어진 것 같다. 말해 보라. 지공은 도대체 어디 있는가."
향을 사른 뒤에 다시 말씀하셨다.
"한 조각 향 연기가 손을 따라 일어나니, 그 소식을 몇 사람이나 아는가."
2.
날 때는 한 가닥 맑은 바람이 일고
죽어가매 맑은 못에 달 그림자 잠겼다
나고 죽고 가고 옴에 걸림이 없어
중생에게 보인 몸에 참마음 있다
참마음이 있으니 묻어버리지 말아라
이때를 놓쳐버리면 또 어디 가서 찾으리.
生時一陣淸風起 滅去澄潭月影沈
生滅去來無罣礙 示衆生體有眞心
有眞心休埋沒 此時蹉過更何尋
3.
스님께서 향을 들고 말씀하셨다.
천검 (千劍)을 모두 들고 언제나 활용하니
황제가 그를 꾸짖어 종[奴]을 만들었다
평소의 기운은 동쪽 노인을 누르더니
오늘은 무심코 한 기틀을 바꾸었다
바꾼 그 기틀은 어디 있는가.
千劍全提常活用 皇王罵動作奴之
平生氣壓東方老 今日等閑轉一機
轉一機何處在
향을 꽂고 말씀하셨다.
"지공이 간 곳을 알고 싶거든 부디 여기를 보고 다시는 의심치 말라."
4.
스님께서 향을 들고 말씀하셨다.
푸른 한 쌍 눈동자에 두 귀가 뚫렸고
수염은 모두 흰데 얼굴은 검다
그저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갔을 뿐
기괴한 모습이나 신통은 나타내지 않았다
혼자서 고향길 떠나겠다 미리 기약하고서
말을 전해 윤제궁(輪帝宮)을 알게 하였다
떠날 때가 되어 법을 보였으나 아는 이 없어
종지를 모른다고 문도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엄연히 돌아가시매 모습은 여전했으나
몸의 온기는 세상과 달랐다
이 불효자는 가진 물건이 없거니
여기 차 한 잔과 향 한 조각 드립니다.
碧雙瞳穿兩耳 髭須胡兮面皮黑
但恁麽來恁麽去 不露奇相及神通
預期獨往家鄕路 傳語令知輪帝宮
臨行垂示無人會 痛罵門徒不解宗
儼然遷化形如古 徧體溫和世不同
不孝子無餘物 獻茶一盌香一片
그리고는 향을 꽂았다.
15. 시 중
스님께서 하루는 대중을 모아 각각에게 매일매일의 공부를 물은 뒤에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그렇다면 반드시 대장부의 마음을 내고 기어코 하겠다는 뜻을 세워 평소에 깨치거나 알려고 한 일체의 불법과 사륙체(四六體)의 문장과 언어삼매를 싹 쓸어 큰 바다 속에 던지고 다시는 들먹이지 말아라. 그리하여 8만 4천 가지 미세한 망념을 가지고 한 번 앉으면 그대로 눌러앉고, 본래 참구하던 화두를 한 번 들면 늘 들되,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든가, '어떤 것이 본래면목인가?'라든가, '어떤 것이 내 본성인가?'라든가 하라.
혹은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조주스님은, '없다[無]' 하였다. 그 스님이 '꼬물거리는 곤충까지도 다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하십니까?'라고 한 화두를 들어라.
이 중에서도 마지막 한 구절을 힘을 다해 들어야 한다. 이렇게 계속 들다 보면 공안이 앞에 나타나 들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들린다. 고요한 데서나 시끄러운 데서나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는 것이다. 그 경지에 이르거든 의심을 일으키되 다니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옷을 입거나 밥을 먹거나 대변을 보거나 소변을 보거나 어디서나 온몸을 하나의 의심덩이로 만들어야 한다. 계속 의심해 가고 계속 부딪쳐 들어가 몸과 마음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 그것을 분명히 캐들어가되, 공안을 놓고 그것을 헤아리거나 어록이나 경전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모름지기 단박 탁 터뜨려야 비로소 집에 이르게 될 것이다.
만일 화두를 들어도 잘 들리지 않아 담담하고 밋밋하여 아무 재미도 없거든, 낮은 소리로 연거푸 세 번 외워 보라. 문득 화두에 힘이 생기는 것을 느낄 것이니, 그런 경우에 이르거든 더욱 힘을 내어 놓치지 않도록 하라.
여러분이 각기 뜻을 세웠거든 정신을 차리고 눈을 비비면서, 용맹정진하는 중에도 더욱 더 용맹정진을 하라. 그러면 갑자기 탁 터져 백천 가지 일을 다 알게 될 것이다. 그런 경지에 이르면 사람을 만나보아야 좋을 것이다. 그리고는 20년이고 30년이고 물가나 나무 밑에서 부처의 씨앗[聖胎]을 길러야 한다. 그러면 천룡(天龍)이 그를 밀어내 누구 앞에서나 용감하게 큰 입을 열어 큰 말을 할 수 있고 금강권을 마음대로 삼켰다 토했다 하며, 가시덤불 속도 팔을 저으며 지나갈 것이며, 한 생각 사이에 시방세계를 삼키고 3세의 부처를 토해낼 것이다.
그런 경지에 가야 비로소 그대들은 노사나불(盧舍那佛)의 갓을 머리 위에 쓸 수 있고, 보신불 · 화신불의 머리에 앉을 수 있을 것이다. 혹 그렇지 못하거든 낮에 세 번, 밤에 세 번을 좌복에 우뚝이 앉아 절박하게 착안하여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참구하여라."
그리고는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16. 장상국(張相國)의 청으로 영가에게 소참법문을 하다
"변숭(邊崇)의 영혼이여, 밝고 신령한 그 한 점은 끝없는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어야 할 번뇌도 없고 구해야 할 보리도 없다. 가고 옴도 없고 진실도 거짓도 없으며 남도 죽음도 없다. 4대에 있을 때도 그러했고, 4대를 떠난 때도 그러하다.
지금 을묘년 12월 14일 밤에 천보산(天寶山) 회암선사(檜岩禪寺)에서 분명히 내 말을 들으라. 말해 보라. 법을 듣는 그것은 번뇌에 속한 것인가, 보리에 속한 것인가, 옴에 속한 것인가 감에 속한 것인가, 진실에 속한 것인가, 허망에 속한 것인가, 남에 속한 것인가 죽음에 속한 것인가. 앗(咄)!.
전혀 어떻다 할 수 없다면 그것은 무엇이며, 결국 어디서 안신입명(安身立命)하는가."
죽비로 향대(香臺)를 한 번 내리치고 말씀하셨다.
"알겠는가. 만일 모르겠으면 마지막 한마디를 더 들어라. 영혼이 간 바로 그 곳을 알려 하는가. 수레바퀴 같은 외로운 달이 중천에 떴구나."
다시 향대를 치고는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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