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혜통 단(慧通旦)선사의 송고(頌古)
대위사(大潙寺) 불성(佛性)선사의 법제자 담주(潭州) 혜통 단(慧通旦)선사는 일찍이 각철취(覺鐵嘴)스님의 '스승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다[先師無此語]'라는 화두를 송하였다.
누가 스승께선 이런 말씀 하신 적이 없다고 하였던가
꼬리에 불붙은 호랑이도 호랑이는 호랑이라
말벌은 옛 집을 그리워 하지 않고
맹장은 집에 돌아와 죽지 않는다
급히 착안을 하여 돌아보지 말라
만일 흐름을 끊고 내려갈 줄 알면
온누리에 맑은 바람이 걸음걸음 가득하리라.
誰道先師無此語 焦尾大蟲元是虎
胡蜂不戀舊時窠 猛將不歸家裏死
急著眼勿回顧 若會截流那下行
帀地淸風隨步武
불성스님이 이 게송을 보고서 그에게 일러주었다.
"옛 일들을 송(頌)하고 염(拈)하는 데는 때로는 화려하게 때로는 소박하게, 옛날 그 상황에 문장격식을 맞춰야 한다. 이는 마치 돈쓸 줄 아는 것과 같아서 굳이 많아야 할 필요는 없다."
황벽(黃檗)선사의 '술찌꺼기나 먹어라[噇酒糟]'는 화두를 송하였다.
가시덤불에서 미묘한 뜻을 말하고
찔레나무 속에서 백호광을 놓는다
천언만어를 아무도 아는 사람 없어
또다시 꾀꼬리 소리 따라 낮은 담장을 지나친다.
荆棘林中宣妙義 蒺䔧園裏放毫光
千言萬語無人會 又逐流鶯過短墻
불성스님은 이를 보고서야 인가하였다.
대혜노스님이 형양(衡陽)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단선사가 게송을 보냈다.
뫼뿌리를 벗어난 외로운 구름 어찌 번뇌 있으랴마는
원숭이와 학에게 긴 슬픔을 만드누나
우리 황제께서 어찌 우리의 도를 잊으리까
얼마 후 은총이 땅을 진동하며 찾아오리다.
出岫孤雲豈繫懷 致令猿鶴有餘哀
吾皇詎肯忘吾道 不日恩光動地來
불조가 꺼려온 일 하려들지 않고
도리어 있을 만한 자리가 없다고 말하더라
우습구나 구구이 힘쓰는 자들이
어거지로 허공을 잡아 차례로 묻어 버리네.
佛祖嫌來不肯做 却言無位可安排
笑佗用力區區者 剛把虛空取次埋
중생속에 함께 사니 시기하는 사람 없어
부처해[佛日]를 잠시 구름과 흙비로 가리워 두었다가
중생제도의 자비심 끊임 없기에
문득 남안땅으로 다시 나왔도다.
異類中行世莫猜 故敎佛日暫雲霾
度生悲願曾無間 却作南安再出來
스님의 법명은 청단(淸旦), 자는 명급(明及), 봉주(蓬州) 사람이다.
15. 소식(蘇軾)의 사주상찬(泗洲像讚)
소문충공(蘇文忠公 : 소동파)이 소성(紹聖) 갑술년(1094) 여름 호주(湖州) 마전(麻田)의 오자야(吳子野)를 위하여 사주(泗洲)의 상(像)에 찬을 썼다.
맹인은 눈이 있으나 스스로 알지 못하다가
갑자기 해를 보고 기뻐 춤추니
해와 달이 있고 없고를 말함이 아니라
내게 눈이 있음을 자축함일세
사주대사를 누가 보지 못하였을까마는
자세히 보고서도 보지 못하는 사람 있으니
그 어찌 눈이 없을까마는 업장 때문이지
이로써 볼 수 있는 사람이 드뭄을 알겠네
만일 드믄 봄을 이룰 수 있다면
이로부터 성불하기는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
세상에 전사본(傳寫本) 수많은 초상화는
모두 대사의 법신에서 나온것
마전의 공양과 동파의 찬을
보는 수많은 사람이 모두 성불하리라.
盲人有眼不自知 忽然見日喜而舞
非謂日月有存亡 實自慶我眼根在
泗洲大士誰不見 而有熟視不見者
彼豈無眼業障故 以知見者皆希有
若能便作希有見 從此成佛如翻掌
傳摹世間千萬億 皆自大士法身出
麻田供養東坡讚 見者無數悉成佛
소동파가 혜주(惠州)에 자리를 잡은 뒤 정축년(1097)에 어명으로 다시 담이국(儋耳國)으로 귀양길을 떠날 때 혜주 수령 방자용(方子容)이 몸소 직첩을 들고가 명을 전하고 위로의 말을 하였다.
"이것이 모두 전생의 인연이니 한탄할 게 못된다. 나의 아내 심씨가 정성껏 사주대사를 섬기는데 하루 저녁 꿈에 사주대사가 이별을 고하기에 어디로 가시느냐고 묻자, 72일 후에 소동파와 함께 간다고 하였는데 오늘이 바로 72일이 되는 날이다. 이 어찌 정해진 인연이 아니겠는가?"
"세상일이란 어느 것 하나 정해진 인연 아닌 게 없다. 꿈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무엇이라고 사주화상과 동행하는 영광을 얻게 되다니, 이는 전생의 인연이 아니겠는가?"
참요자(參寥子)가 일찍이 게송을 지어 이 사실을 기록하였다.
임회(臨淮)대사 원래 사심이 없어
사물에 응하여 험한 곳에서 은혜 베풀기를 잘하였네
친히 배로 호송하여 남해를 건넜으니
공의 성한 덕이 아주 쇠하지는 않았음을 알겠노라.
臨淮大士本無私 應物長於險處施
親護舟航渡南海 知公盛德未全哀
16. 시 잘 쓰는 원두(園頭) 신 무언(信無言)스님
남창(南昌) 땅 신 무언(信無言)스님은 일찍이 시를 잘 쓴다고 명성이 총림에 자자하였다. 서사천(徐師川)과 홍옥보(洪玉父)가 그의 시를 평하면서 수권(瘦權) 나가(癩可)보다도 운치가 고상하다고 하여 이로 말미암아 두 시인에게 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가 천남(泉南) 소계암(小谿庵)으로 대혜노스님을 찾아가 강(康)도인, 남(南)도인 두 분과 함께 채소 밭 일을 맡아 대중을 공양할 때였다. 한번은 호미로 밭을 매던 차에 남도인이,
"호미를 가지고 한마디 해 보라."
하니, 신선사는 호미 끝을 들어 세웠다. 강도인이 흙덩이를 던져 호미자루를 맞추자 이에 신선사가 갑자기 깨닫고는 시를 읊었다.
소계(小谿)에 새 암자 지으니
준수한 인재 자못 호탕하구나
그들을 따라 불조로 삼고
그들 마음대로 선도를 깨치게 하리
어깨에 호미 메고 동쪽 채소밭에서
채소를 가꾸며 일생을 마치겠노라 맹서하였다
달빛 타고 비로소 항아리같은 달그림자 껴안고
오시가 지나니 풀을 죽이는 무더위도다
푸른 겨자는 벌레가 뜯어 먹고 가을 가지는 가뭄에 메말랐으니
이제 바리때 버려야 할 참이라
무우만이라도 잘 커줬으면……
新菴小谿上 英俊頗浩浩
從渠作佛祖 任渠會禪道
荷鋤向東園 事蔬誓畢老
乘月始抱瓮 破午正殺草
芥藍被蟲食 秋茄亦旱槁
齋盂從此去 但願蔓菁好
사대부들이 소계암에 놀러와 시 이야기 하기를 좋아하면 대혜선사는 으레, 이 암자에도 채소 가꾸는 중 하나가 시를 잘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신선사는 논변에 더욱 뛰어나 그의 말을 조금만 들어도 굴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후로 대혜선사를 모시고 경산사에 갔다가 한동안 형양(衡陽)에서 지냈으며 이어 형악(衡嶽)에서 방랑하며 가장 오랫동안 도오사(道吾寺)에 머물렀다. 나무를 깎아 절 서쪽 구석에 비바람을 가릴 암자를 짓고 이를 '판암(版菴)'이라 이름을 붙이고 선(禪)을 즐기며 스스로를 다스렸다. 우호(于湖)거사 장공(張公)이 담주(潭州) 태수가 되었을 때 신선사의 높은 풍모를 듣고 굳이 상서(湘西) 땅 녹원사(鹿苑寺)의 주지를 맡아 세상에 나오도록 권하며 시를 보냈다.
시구 뭉치를 몸에 지닌 지도 어언 40년
바쁜 속에 죽비화두를 참구했네
이젠 상서사에 여생을 보내며
하늘에 부딪치는 상강의 물소리를 누워 들으소서
싯구에 눈 있으니 비로소 깨침을 알고
깨달은 곳에 도리어 뼈아픈 송곳을 찔렸네
하나의 심신에 두개의 작용없으니
조과선사 실오라기를 뽑아 들고 불어 보였네*
詩卷隨身四十年 忙中參得竹蓖禪
而今投老湘西寺 臥看湘江水拍天
句中有眼悟方知 悟處還應痛著錐
一箇身心無兩用 鳥窠拈起布毛吹
신선사가 화답 시를 보냈는데 지금은 한 수만을 기록한다.
죽비 화두는 당시에 뛰어난 화두라
당장에 사사로움이 없어진다 해도 선(禪)이 아니다
이미 장원의 참 면목을 만나고 보니
감히 가라앉은 물을 들어 인천에 뿌리노라.
竹蓖子話選當年 直下無私不是禪
旣遇狀元眞眼目 敢拈沈水向人天
그가 평소에 지은 작품을 「남창원부집(南昌園夫集)」이라 했는데 시랑(侍郞) 호명중(胡明仲)이 이를 「기파집(奇葩集)」으로 바꾸고 앞머리에 서(序)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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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과 도림선사의 시자 회통(會通)이 하루는 갑자기 하직을 고했다. 도림선사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회통이 대답했다. "저는 불법을 배우려고 출가했는데 스님께서 아무 것도 가르쳐주시지 않으니 제방을 다니면서 불법을 배워볼까 합니다." "불법이라면 내게도 얼마쯤은 있지." "무엇이 스님의 불법입니까?" 도림선사는 실오라기를 하나 뽑아서 훅 불어보였고 시자는 깊은 뜻을 깨달았다.
17. 베옷만 입던 옥천 호(玉泉皓)선사의 탑명 / 무진(無盡)거사
무진거사 장상영이 옥천 호(玉泉皓)선사의 탑에 비문을 지었는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그가 부엌에 들어가 저녁 상 차리는 것을 보고는 그것이 손님상인지 대중상인지를 물었다. 주방승이 사실대로 대답하자 스님은 소임자를 불러다가 몽둥이로 때리면서 다그쳤다. '내가 예전에 참선할 때는 사람들을 위해 물도 긷고 쌀도 찧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밥을 짓거나 국수를 삶거나 하는 일이 불보살을 공양하는 것과 다를 바 없구나. 배불리 먹고 도무지 참구에는 마음을 두지 않으며 온갖 망상과 다섯 가지 음식 맛을 즐겨 당나귀 창자, 자라 생피, 양 뼈다귀, 자라 꼬리를 빌려 8만 4천마리의 벌레를 기르는구나. 눈을 뜨면 보이는 경계에 끄달리고 눈감으면 꿈을 따라 굴러다닌다. 주록(注綠)판관*이나 납잉(拉剩)대부*가 너희들 하는대로 차자(箚子)를 초록해서 녹부(祿簿)를 없애 고통을 주지 않을지 모르겠다.'
그 후 대중들이 메마른 생활을 견디지 못하여 고을 현감에게, 우리 노스님은 대중을 편안케 하지 못하고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작은 일까지 간섭한다며 일러 바쳤다. 이에 호선사를 소환하여 그곳에 이르자 현감이 말하였다.
"큰 선지식께서 방장실에 단정히 앉아 있지 않고 양쪽 회랑과 절 문을 오르내리면서 많은 것을 얻었는가?"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이 십겁을 도량에 앉아 있었는데 장관께서는 앉아 있으라고 하니 나더러 부처나 되라는 말씀입니까? 앉아 있으면 부처를 죽이고 말 것입니다."
현감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아! 호포곤(皓布裩 : 호스님이 베옷만 입고 지내서 붙여진 별명)의 평소 생활은 범인인지 성인인지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무진거사가 이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고자 했던 것은 옛 일을 빌어 지금 사람들을 일깨우고자 함이 아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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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록판관(注綠判官) : 관리의 녹을 공급하는 판관.
* 납잉대부(拉剩大夫) : 남는 식량을 빼앗아 가는 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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