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고애만록枯崖漫錄

고애만록 中 7~13.

쪽빛마루 2016. 2. 7. 14:37

7. 북간 거간(北磵居簡)선사의 게송

 

 임안부(臨安府) 정자사(淨慈寺)의 북간 간(北磵居簡)선사는 다릉 욱(茶陵郁) 산주를 찬(贊)하였다.

 

백척간두에서 나아가다 다리 밑에 떨어지니

허공에서 볼록한 건 물속에선 움푹하네

고금에 많은 사람 강물에 빠졌겠지만

스님이 빠진 것만이야 하겠는가.

進步竿頭攧斷橋  太虛凸處水天凹

古今喫攧人多少  不似闍梨這一交

 

 영조(靈照 : 방거사의 딸)에 대해 찬하였다.

 

집안에서 번득이는 기연으로 부친에게 응수하고

문 앞에서 손 여미고 단하스님 맞이하네

어머니 낳고 아버지 기른 예쁜 딸

몹시도 버릇없는 아이가 되었구나.

屋裏橫機抗老爺  門前斂手揖丹霞

娘生爺養好兒女  也有許多無賴査

 

 총림에서는 이 시를 많이 애송해 오고 있다.

 순우(淳祐) 병오(1246) 3월 그믐, 스님은 게송을 지었다.

 

일생동안 아무런 기량도 없이

맨발로 수미산을 올라갔네

한발 한발 더 크게 내딛으며

야반 삼경에 철위산을 벗어났네.

平生無伎倆  赤脚走須彌

一步闊步一  三更過鐵圍

 

 그리고는 "내일이면 내 떠나가리라"라고 말하였는데 때가 되자 가부좌로 앉은 채 입적하였다. 중서사인 정공허(中書舍人 程公許)가 제문을 지어 올렸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산 정상에 걸터앉아 기나긴 낚싯줄 드리우니

호수는 잔잔하고 물고기는 낚시를 물지 않네

병든 몸으로 죽음을 예견하니 몸은 수척해도 정신만은 활기차네

훈훈한 춘삼월 늦봄에 참선하는 승려들이 운집하니

스님은 그들을 돌아보고 미소지며

'나는 떠날 날을 받아 놓았다' 하시네

이 네 구절의 그 게송이 마지막 글이 될 줄이야

초여름 4월 초하루에 담담히 입적하셨네

지난날 스님께서 깨달으신 바는 본래 면밀하더니

마지막 한마디에서 스님의 진면목을 드러내셨다.

踞南山頂垂綸千尺

湖水渺彌魚寒不食

示病及期體癯神逸

維莫之春參徒雲集

師願而笑吾歸有日

題四句偈玆爲絶筆

及孟夏朔泊然入寂

師昔所證本自緜密

末後一着乃見眞實

 

 이 제문은 스님에 대한 실록이라 할 수 있다.

 아! 북간스님은 머리가 매우 뛰어나 박학다식하였고, 글 짓기를 좋아하였으며 동암(東庵) 불조(佛照)스님에게 법을 얻었다. 지난 날 감로 멸(甘露滅)과 영 중온(瑩仲溫)스님도 모두 도를 본 경지가 분명하여 그것을 글로 많이 남겼는데, 북간스님은 열반하면서도 이와 같이 더욱 훌륭한 글을 남겼다.

 

 

8. 문충공 진덕수(文忠公眞德秀)의 꿈

 

 참예 문충공 진덕수(參預 文忠公 眞德秀)는 쌍경사(雙徑寺)의 숭소림(菘少林)스님과 같은 마을 사람으로 해마다 서로 도를 논하고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 중 한 서신은 다음과 같다.

 "갑자 · 을축(1204~1205)년 사이에 나는 연평(延平)지방에 있으면서 꿈을 꾸었는데, 어느 한 곳을 찾아가니 16나한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모습이 단정하고 엄하신 분이 갑자기 눈을 뜨더니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하기를 '견고한 큰 힘[大堅固力]을 얻었구나'하였습니다. 이어 하늘에서 풍악이 울려오는데 신비스러운 음악소리는 세간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꿈에서 깨어나, 이제까지 30년 동안 그 일을 잊지 않고 지내왔는데 요사이 몽필봉(夢筆峯)의 한적한 산허리에 자그마한 암자를 마련하고 '대견고력(大堅固力)' 네 글자로 좌우명을 삼으려다가 스님의 게송 한 수를 얻어 어리석음을 깨우칠까 합니다. 등각사(等覺寺) 또한 지난 날 함께 노닐던 곳이니, 어찌 옛 정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이 서첩을 경산사 삼탑암(三塔庵)에서 보았다. 아! 서산 진덕수는 30년 꿈에서 깨어난 이라 하겠다. '대견고력(大堅固力)'으로 좌우명을 삼으려 한다니, 무슨 잠꼬대인가. 무엇때문에 굳이 부처님의 게송이 필요한가.

 

 

9. 백암 응(栢巖凝)선사의 대중법문

 

 경원부(慶元府) 소영은사(小靈隱寺)의 백암 응(栢巖凝)선사는 성품이 강직하여 사람들과 사귀지 않았으며 식암(息庵達觀)스님의 법제자이다. 금문사(金文寺)에 주지할 때, 하루는 핵심이 되는 법문[提綱]을 설하였다.

 "온누리가 머물 곳이니 억지로 자리 잡을 것 없고, 온누리가 자기 자신이니 굳이 그림자를 쫓을 필요가 없다. 동쪽에 살면 동쪽 노스님이라 부르고 서쪽에 살면 서쪽 노스님이라 부를 뿐이거늘, 엎치락뒤치락 이랬다저랬다 한 달 내내 어지간히 못난 짓을 하는구나. 그렇지만 그대들이 나를 만나보려 한다면 나는 한참 저쪽에 있겠지만 그대들이 나를 만나보려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대들 눈썹 위에 내가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머물고 이와 같이 말하니 하나의 혓바닥이 두 동강이 났구나. 말해 보아라. 무엇이 혓바닥이냐?"

 좌우 대중을 돌아보고 설법을 마쳤다.

 그는 걸음새가 민첩하여 마치 거침없이 달리는 천리마와 같다.

 

 

10. 수암 서(秀巖瑞)선사와 목암(木庵)선사의 만남 

 

 수암 서(秀巖瑞)선사가 무용 송원(無用松源)스님과 함께 민(閩)에 들어가 건원사(乾元寺) 목암(木庵)스님을 찾아뵈니, 목암스님이 그들에게 물었다.

 "어디서 떠나왔는가?"

 "고산(鼓山)에서 왔습니다."

 "그렇다면 고산의 소식을 가지고 왔는가?"

 수암스님이 양 손을 벌리자 목암스님이 말하였다.

 "참당(參堂)이나 하여라."

 그리고는 수암스님에게 창고직을 맡기자, 수고를 마다 않고 일을 하니 목암스님이 마음 속으로 기특히 생각하였다. 그가 옷을 빨고 있는데 목암스님이 물었다.

 "무엇을 하느냐?"

 그가 옷가지를 들어 보이자 목암스님이 다시 말하였다.

 "대답할 줄도 모르느냐?"

 그가 말을 하려는 찰나에 목암스님이 뺨따귀를 후려치니 홀연히 느낀 바 있었다.

 훗날 명주(明州) 육왕사(育王寺)의 주지가 되어 불조(佛照)스님의 법을 이었다는 소식을 듣고 목암스님이 게송을 지어 보냈다.

 

요사이 우리 어머니 머리도 이빨도 다 빠졌으나

그래도 마음만은 딸자식 생각이라

번씨 문중으로 시집 가버린 그 딸은

빗질하고 씻겨주던 옛 정을 기억이나 하는지.

媽媽年來齒髮疎  心心只是念奴奴

一從嫁與潘郞後  記得從前梳洗無

 

 나는 구봉사(九峰寺) 석문 회(石門會)화상의 법회에 참석하였다가 이 이야기를 몸소 들었다.

 

 

11. 쌍삼(雙杉)선사를 인가하다 / 철편 소(鐵鞭韶)선사

 

 철편 소(鐵鞭韶)선사는 성품이 강직하고 고고하였다. 불법을 전하는 것으로 사명을 삼아 오문(吳門) 승천사(承天寺)에 주지하면서 승당을 넓히고 사방의 납자를 받아들였다. 방장실에서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들어 설법하였으나 깨달은 이가 적었다. 때마침 원 쌍삼(元雙杉)스님이 그 법회에 참석하여 게송을 지어 올렸다.

 

개에게 불성이 없다 하는 건

하나가 바르면 일체법이 바르게 되는 것

나라안에선 천자의 칙명이요

변방에서는 장수의 명령이다.

狗子無佛性  一正一切正

寰中天子勅  塞外將軍令

 

 철편스님은 이 게송을 보고 수긍하였다.

 

 

12. 도반의 마음씨 / 소암 요오(笑庵了悟)선사와 송원 무용(松源無用)선사

 

 소암 오(笑庵了悟)스님은 주(周)씨다. 소주(蘇州) 상숙사(常熟寺)에 살며 오랫동안 재 무등(才無等)스님을 시봉한 후 다시 송원(松源)스님과 함께 밀암(密庵)스님의 문을 두드리니, 밀암스님이 물었다.

 "네 평소의 견처(見處)를 내게 말해 보아라. 네 경지에 따라 틔워주겠다."

 "아직은 없습니다."

 "참당이나 하여라."

 소암스님은 그 후 승당에서 등잔의 불똥 없애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방장실로 들어가 꺼리낌없이 자유분방한 기봉을 썼다. 그리고는 찾아가기만 하면 몽둥이질을 하는 덕산(德山)스님의 인연에 대하여 게송을 하였다.

 

산악을 뒤엎고 폭포수를 흔들며 찾아온 저 길손

작은 악마 탈을 쓴 채 부질없이 시기하네

신기한 말로 삼천대천세계를 한번에 뛰어넘으니

괜스레 문앞의 하마대(下馬臺 : 말내리는 곳)를 말하네.

倒嶽傾湫與麼來  小根魔子謾疑猜

神駒一躍三千界  空說門前下馬臺

 

 밀암스님은 이 게송을 듣고 기뻐하였다.

 지난 날 송원스님이 대중스님으로 있을 때, 세상 일에 너무 어두웠으므로 그를 대신하여 소암스님이 자질구레한 일까지 모두 책임졌었다. 송원스님이 영은사(靈隱寺)의 주지가 되었을 때 소암스님은 고향 마을 영암사(靈岩寺)에 있었는데 배를 마련하여 항주(杭州)에 가서 송원스님을 방문하였다. 절에 도착한 지 사흘만에야 겨우 만나게 되었는데에도 송원스님은 전혀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 후 송원스님이 법화사(法華寺)에 주지해달라는 청을 받고 떠나가면서 영은사는 그를 대신하여 소암스님이 맡도록 힘써 추천하였다. 이러한 선배들의 경계는 말 한마디만 잘못 해도 일생 동안 한을 품는 요즘 사람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기에 이를 기록하여 후세 사람에게 귀감이 되고자 하는 바이다.

 

 

13. 율종을 진작하다 / 소옹 묘감(笑翁妙堪)선사

 

 소옹 감(笑翁妙堪)선사는 도풍이 준엄하고 기개가 사방을 덮었다. 처음 태주(台州) 보은사(報恩寺)에 주지할 때, 태주에는 옛부터 율종(律宗)이 없었는데 스님이 군수 제석(齊碩)과 상의하여 열개의 사찰을 하나로 합하고 단(壇)을 쌓아 남산(南山 : 律宗) 개차지범(開遮持犯)의 법풍(法風)을 제창하여 후학을 격려하였다. 그 뒤 평강(平江) 호구사(虎丘寺)로 옮겨가서는 민주자사 왕거안(閩州刺史 王居安)이 다시 설봉사(雪峰寺)로 그를 청하고 조정에 상소하였다.

 "남부지방에는 불법이 흥성하지 못하니 소옹스님의 힘을 빌어 불법을 진작시켜야 할 것입니다."

 이에 칙명을 따라 부임하였고, 얼마 후 항주 영은사에 주지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스님이 갑자기 석가세존께서 산에서 나오시는 모습을 그린 그림 한 폭을 내밀며 찬(贊)을 청하자 서슴지 않고 써 주었다.

 

한 밤중에 왕성을 도망쳐 나올 적에는

모든 것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고

6년 세월 단정히 앉았더니

오랜 고요함 속에 움직일 것을 생각했네

소맷자락 눈날리며 설산에서 내려왔으나

무슨 낯으로 사람들과 마주하리.

半夜逾城  全無肯重

端坐六年  久靜思動

衲卷寒雲下雪山  與人相見又何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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