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순례

[스크랩] 백련암 -원택스님

쪽빛마루 2010. 1. 6. 12:05
볼륨Greensleeves - Sharon Isbin음악을 들으려면원본보기를 클릭해주세요.

 

 

그곳에 가면

 

 

백련암    원택스님  / 백련암 감원

 


 

백련암은 산내의 원당암처럼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가 없고 서산대사의 제자인 소암선사가 중건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늘 솔잎만 드셔서 온몸이 초록빛이었다고 전해지는 환적스님(1603~1691), 문집이 남아있는 풍계스님, 성봉스님, 시를 잘 지으셨고 방광 하셨다는 방광석이 남아있는 인파스님(?~1846), 그 제자 되는 무애도인 활해(1803~1877), 스님의 친동생 되는 신해스님 등이 19C까지 백련암에서 주석하시며 도풍을 떨치셨던 큰스님들 입니다.

20C 들어와서는 구전은 되어오지만 제대로 정리된 것이 없어서 기록하지 못함을 죄송스럽게 생각하며 다음 기회에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성철 큰스님께서 백련암에 주석하시기는 1966년 가을부터였습니다. 다음해 1967년 가을에 해인총림 방장이 되시고 동안거 기간에 백일법문을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1993년 11월 초에 열반에 드실 때까지 백련암에 머무시면서 하안거, 동안거 결제 중에는 큰절을 오르내리시며 대중스님들에게 “밥값 내놓아라.” “정진 열심히 해라”고 죽비로 경책하셨습니다.

큰스님 시자로 큰절로 모시고 다니던 때, 가파른 희랑대 계단을 휘적휘적 쉽게 오르시는데, 뒤따라가는 나는 오히려 숨을 헉헉대노라면 뒤돌아보시면서 “젊은 놈이 그리도 힘드나” 하시면서 득의연해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러시던 큰스님께서 하루는 “내가 이제 늙었나보다. 옛날에는 큰절 다녀오는 것이 힘도 안 들고 날아갔다 올 것 같더니만 이제는 힘 든다. 나중을 대비해서 큰절에 다닐 수 있는 찻길을 내봐라.” 하셨습니다.

여기저기 관청에 부탁해도 자연훼손이 너무 심하니 불가하다는 답만 돌아왔습니다. 백련암으로 차가 편안히 오르내리려면 많은 나무와 바위들이 상할 수밖에 없는, 자연파괴는 뻔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있는 자연환경의 손실은 최소로 줄이면서 길을 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하루에도 몇 번 국일암 뒷길을 오르내렸습니다.

하루는 다리쉼을 하면서 “길 낼 자리가 없나?”하고 두리번거리는데 희랑대 밑 골짜기에 눈이 멈추며 갑자기 길이 훤히 뚫려 보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숲을 헤치고 내려와 보니 지금의 지족암 가는 갈림길까지 큰 무리 없이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팔뚝만한 잡목들은 있었지만 큰 소나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동차에게는 미안한 길이 되었지만 큰 자연환경의 훼손 없이 백련암으로 찻길이 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1987년경이었습니다.

 

큰스님께서 1981년 1월에 제7대 종정에 추대되셨습니다, 역사적으로는 10.27 법난을 만나 조계종의 위신이 한없이 추락당하고 있을 때 원로 회의에서 “성철스님이야말로 이 위기를 구할 수 있는 종정의 자격이 있으시다.”고 추대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백련암에서는 일 년에 네 번 ‘아비라 기도’라는 법회가 있었습니다. 음력 1월4일~7일, 4월12일~15일, 7월12일~15일, 10월12일~15일, 결제 전후로 해서 신도들이 모여서 기도를 올렸는데 그때까지 평균 4~50여명이 동참했습니다.

큰스님께서 종정으로 추대되시고는 그 기도 동참자들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백련암은 찻길도 없고 버스에서 내려 2km 정도를 길도 없는 길을 올라와야 했었습니다.

기도 동참자들이 자꾸 늘어나니 지금 있는 방사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게 되고 마당에 야전텐트를 치게까지 되었습니다.

하루는 큰 스님을 찾아뵙고 “아비라 기도 신도들이 늘어나니 새 법당을 지어야겠다.”고 말씀드리니 “신도들과 잘 의논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마침내 1988년 5월17일에 적광전 상량을 하고 불사를 마치니 기도공간의 숨통이 튀었습니다.

 

 

 

 

 

큰스님께서 하루는 “나도 이제 장경각 문을 열 힘도 없고, 더구나 책을 보관하고 있는 책장문도 열 힘이 더구나 없다. 그러니 저 뒤를 정리해서 내가 언제든지 찾아서 내 마음대로 책을 볼 수 있게 장서각을 하나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지금의 고심원입니다.

큰스님 말씀 따라 그 지역을 고르려하니 겉으로는 흙이 덮여 있었지만 ‘돌너들’이었습니다. 흙속에 묻혀있던 수많은 돌들을 깨고 보니 그 뒤처리가 까마득했습니다. 그 돌들이 간 곳이 첫째는 마당을 넓히려고 축대를 덧씌워 축담을 쌓았고, 둘째는 지금의 제1주차장과 제2주차장이 된 그곳을 메웠습니다.

한창 집을 짓고 있는데 불일암에 계시는 법정스님께서 오셔서 큰스님을 문안하시고 조용히 나를 부르셨습니다. “원택스님, 큰스님을 이렇게 모시는 것이 아니에요. 깬 돌을 가지고 이렇게 살벌하게 담을 쌓아놓으니 얼마나 볼썽사납소. 누가 원택스님을 나무라겠소. 다 큰스님께 누가 되는 일이니 큰스님을 잘 모시시오.” 법정스님 나무람이 아니라도 늘 마음에 켕기는 것이었는데 막상 스님의 지적을 받고 나니 더욱 좌불안석이 되어 “어떻게 이 살벌함을 면해야 할까?”를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렇다! 기와 담장을 올려보자”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기와 담장을 하고나니 모두가 또 찬사일색이었습니다. 살벌하던 담 분위기가 일시에 가시고 “백련암 기와 담이 그렇게 어울릴 수 없다”는 말이 돌며 그 후 해인사 암자마다 기와담 이는 것이 유행이 되었습니다. 고심원의 상량은 1993년 5월에 상량을 올렸으나 큰스님께서는 고심원의 완성을 보지 못하시고 열반에 드시게 되고 몇 달 후 정념당과 고심원이 완성되게 되어서 아쉬움이 크게 남았습니다. 그런 연유로 해서 오늘의 백련암 모습이 갖추어졌습니다.

 

성철 큰스님께서는 “자기 기도는 자기가 해야 한다”고 하시며, 스스로 절하고, 스스로 능엄주 암송하고, 스스로 아비라 기도를 하도록 했습니다. 스님들은 일체 기도에 참여치 못하게 하시고 개인 축원은 절대 못하게 했습니다. 자기가 자기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이 참 기도이지 스님들을 삯꾼 대듯이 축원이나 하는 것은 개인 공덕이 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너거들 곰 새끼들 같은 놈 들! 내 없으면 다 굶어 죽을 놈들이다.”고 야단야단 치셨습니다.

백련암은 큰스님께서 “자기 기도는 자기가 해야 한다”는 그 법력으로, 계신 때 보다는 못하지만 아비라기도가 이어지고 주말마다 삼천 배 동참자들이 찾아옵니다.

아비라 카페, 수미산 카페 회원들에게 감사한 인사를 전합니다.

 

 

 

 

 

 

                                        월간  海印  2009년 2월호 중에서 p22.                            

                  

                                      www.haeinji.org                               

 

 

 

                                                   

 

 

출처 : 삼천배 (성철스님 재가불자회)
글쓴이 : 심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