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伽倻)는 잊혀진 나라다. 가야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한 책을 남기지 못했다. 멸망한 뒤엔 신라사의 일부로 잠깐 다뤄지다 말았다. 그마저 팔할은 두루뭉술하고 미심쩍은 설화 일색이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란 건 상식이다. 승자는 패자에게 일어난 끔찍한 사고와 재해, 불길한 조짐과 예언을 구구절절이 열거하며 패자의 멸망은 하늘의 선택이었음을 강변한다. 겁이 나거나 뒤가 구리면 말이 많아지는 법이다. 결국 패전국의 죽음에 대한 묘사가 자세할수록 그들의 국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시사한다는 생각. 가야가 이러한 악의적인 관심조차 받지 못한 것을 보면 약하긴 약했던 모양이다.
‘인도의 숨결’품은 가락, 평온한 극락 꿈꾸다
가야는 나라이면서 나라가 아니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가야는 서기 42년부터 532년까지 10대에 걸친 왕들이 490년간 김해지역에서 세력을 영위했다. 김해평야를 근거지로 농사와 어로를 통해 생산력을 축적했다.
엄연히 한반도의 일부를 점유한 왕국이었지만 고대 국가로서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학자들로부터 제대로 대접받지도 못하는 형편이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사회경제적 계급의 분화, 관료제의 정착, 특정 세력에 의한 권력 독점이라는 특징을 두루 갖췄다. 곧 반민주적 질서의 확립으로 고대 국가의 반열에 공식적으로 오른 셈이다.
<사진설명> 모은암 석굴 안의 파사석. 뒤쪽으로 아기를 안은 관세음보살상이 보인다.
반면 가야는 금관가야 대가야 소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성산가야 등 6개의 부족이 규합한 연맹체였다. 권력은 각 소국에 적절히 분산되어 있었다. 어설프나마 관등 직제를 도입한 소국은 그나마 대가야 정도였다. 강력한 통치주체의 부재에서 이른바 영(令)이 안 서는 사회였음을 읽을 수 있다. 전쟁 시 군사작전을 수행하는 데에도 애를 먹었을 테고. 관료제가 미약했으니 나라의 일 처리는 허술했을 것이다. 외려 백제와 신라의 틈바구니에서 500년 가까이 버틴 게 용할 따름이다.
모은암(母恩庵)은 가야의 출발과 함께 시작한 절이다. 시조인 김수로왕의 부인 허왕후가 모국의 어머니를 그리며 지은 암자란 이야기가 창건설화로 전한다. 부모 없이 알에서 태어난 수로왕이 어머니 삼아 지은 절이라거나 가야의 제2대 거등왕이 어머니 허왕후를 추모하며 지은 절이라는 이설도 전한다. 무엇보다 모은암은 한국불교의 남방유입설을 보여주는 지표여서 눈길이 간다.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였던 허황옥은 수로왕의 아내로 간택돼 배를 타고 한반도에 발을 디뎠다.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며 배에 같이 싣고 온 파사(婆娑) 석탑은 우리나라 최초의 불적(佛蹟)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서기 372년 중국대륙을 통해 고구려로 불교가 최초 전래됐다는 한국불교사는 첫머리부터 다시 쓰여야 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대 가야인들의 이동과 통신능력 또한 단연 화젯거리로 떠오른다. 무슨 수로 이역만리 외딴 왕족의 신상정보를 파악했으며, 어떤 지도와 선박을 가졌기에 인도양과 태평양을 무사히 횡단할 수 있었는가. 그러나 결정적 증거가 부족해 아직 정사로 등재되기엔 말만 무성한 전설일 뿐이다.
가야와 인도의 엄청난 교류를 보여주는 물증으로 제시되는 것이 수로왕릉 내부 납릉정문(納陵正門)에 새겨진 쌍어문(雙魚文)이다. 쌍어문은 불교가 매우 성행했던 인도 아요디아 시의 문장(紋章)과 동일하다. 허황옥이 소개한 자국의 문물이라는 추측이지만 입소문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게 흠이다. 멀리 갈 것 없이 ‘가야’란 국명 자체가 인도와 직결된다. 같은 명칭의 도시가 인도에 존재한다.
힌두교의 성지인 비하르주(州)의 가야(gaya) 말이다. 물론 ‘그 가야가 이 가야’라고 명쾌하게 일러 줄 문헌은 없다. 문자의 힘 앞에서 문자를 가지지 못한 가야의 역사는 굴욕적이다. 일제는 4세기 후반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주장하며 소위 임나일본부가 설치됐다는 가야를 들먹였다. 이에 맞서 6가야가 본래 경상남도가 아닌 중국의 동남부에 있었다며 가야가 인도와 한반도 사이의 모든 대륙과 해양을 호령하던 제국이었다는 민족주의 사학이 으르렁거린다. 글을 얻지 못한 말들의 가엾은 표류는 지금도 계속된다.
금과 돌을 구분하지 않는 사람들이 간직한 불교는 왕권을 위한 불교,
체제를 위한 불교와는 분명 달랐을 것이란 믿음. 전쟁만 일삼던 족속들이
미처 꿈꾸지 못하던 색다른 풍속과 평화가 있진 않았을는지.
그러니 잊기엔 너무도 아까운 나라다.
무척산 기슭에 자리한 모은암은 아담하고 궁벽하다. 공허한 수다의 재료 혹은 패권주의의 제물로 전락한 가야의 오늘이 물화된 것 같다. 지난해 이맘때 주지로 부임한 혜수스님이 대웅전의 기와를 갈고 새 요사채를 세우며 중창에 나섰다. 취재 당일에도 망치소리가 경내를 울렸다. 암자의 입구는 꼬불꼬불한 돌길이 일품이다. 거친 화강암덩어리가 바닥과 주변에 흥건하다. 자연석이 마음 가는 대로 저질러놓은 ‘S라인’은 관능적이지 않은 대신 정겹다.
길 위에 서면 김해시 생림면의 민가와 논밭이 한눈에 들어온다. 혜수스님은 “조만간 돌길을 참배객들이 맨발로 걸을 수 있도록 새롭게 단장할 것이라고 했다. 지장전 옆 자연석굴 안에는 아기를 안은 관세음보살상을 조성했다. 여느 사찰에서나 있는 예배의 대상이자 출산에 목마른 아낙들을 위한 배려다. 구겨지고 숨겨져 있던 절을 하나둘 꺼내놓는 스님의 노력이 미덥다.
관세음보살상은 석굴에 차려진 돌 제단의 정점에 봉안됐다. 제단의 앞쪽엔 파사석이 놓였다. 파사석탑을 제작했던 바로 그 돌이다. 두 개로 이른바 숫돌과 암돌인데 하나는 수로왕을 다른 하나는 허왕후를 상징한다.
아주 오래 전, 어쩌면 허왕후가 가져다놨을 지도 모르는 돌이다. 파사석이 중요한 까닭은 돌의 성분과 재질, 색깔로 볼 때 인도에서만 산출되는 암석이기 때문이다. 1978년 인도학자들의 현지답사로 확인되었단다. 표면을 뒤덮은 이끼는 어눌한 말투로 가파르게 무너져버린 공동체의 찬란했던 실재를 항변하는 듯하다.
<사진설명> 모은암으로 올라가는 돌길.
혜수스님은 “무척산의 무척(无尺)은 불교용어인 무착(無着)의 변이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멸망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가야는 명실상부한 불교국가로 자리 잡는다. 고령 대가야의 성문은 ‘전단문’이라고 했는데 경전에 자주 나오는 향나무의 일종, 전단이다. 고령 고아동 벽화고분의 천정에 그려진 연화문(蓮花文)은 부여 능산리 벽화고분과 양식이 상통한다. 대가야의 시조인 이진아시왕의 어머니 이름은 팔정도(八正道)의 한 항목인 ‘정견(正見)’이었다.
대가야의 마지막 임금 도설지왕(道設智王)의 별명은 ‘월광태자(月光太子)’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 가운데 하나로 온 세상을 덕치로 빛낸다는 월광보살을 본뜬 이름이다. 이 때는 이미 삼국 모두 불교의 수입과 보급으로 전제왕권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완료한 시대다. ‘임금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王卽佛)의 이데올로기로 국민총화를 달성한 것이다. 국운을 되살리기에 불교는 차별화된 전략이 될 수 없었다는 말이다.
가야의 고분유적에서 구슬 목걸이는 다량 발견되지만 금이나 은으로 만든 장신구는 출토되지 않는다. 당시 지배층이 금은을 사치품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다. 구슬마저 치장이 아니라 주술적인 호신의 용도였으리란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역사가도 있다. 외세와의 비굴한 야합, 민족에 대한 배신으로 신라는 삼국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16강전보다 8강전이, 8강전보다 4강전이 더 격렬하다.
최후의 승자는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가장 잔혹하고 비열한 자다. 어쩌면 가야 국민들의 순박한 심성이 국가발전에 결정적 장애가 되었을 것이다. 금과 돌을 구분하지 않는 사람들이 간직한 불교는 왕권을 위한 불교, 체제를 위한 불교와는 분명 달랐을 것이란 믿음. 전쟁만 일삼던 족속들이 미처 꿈꾸지 못하던 색다른 풍속과 평화가 있진 않았을는지. 그러니 잊기엔 너무도 아까운 나라다.
김해=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09호/ 3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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