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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음신(中陰身) 제도법(濟度法)

쪽빛마루 2010. 1. 6. 12:14

출처 : 우리출판사 발행

죽음을 준비 합시다 (현장스님 역)


중음신(中陰身) 제도법(濟度法)


[불법을 알게 되면 태어남과 죽음을 저절로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죽지 않는 오직 한 방법은 태어나지 않는 길이다. 죽지 않으려면 반드시 무생(無生;나지 않음)의 경지를 깨달아야 한다. 무생만이 죽지 않는 길이니 영생을 구하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죽음과 환생사이의 영혼을 제도하는 밀교와 정토의 가르침

      - [중음신(中陰身)제도법(濟度法)]



"중음신제도법"은 본디 밀종(密宗)에서 전하는 해탈 법 가운데 하나다.


정토종의 제도법과 밀종의 제도법은 그 뿌리가 같다. 다만 밀종에서는 중유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고 현교인 정토종에서는 중유의 세계는 말하지 않고 제도법만 다루고 있음이 다르다 하겠다.


그렇다면 두 가지 제도법 가운데 어떤 제도법이 이 말법시대에 적합한 제도법이 될 것인가? 밀법수행자는 지혜로운 근기가 있어야하고, 특별한 인연으로 깨우침을 얻은 금강상사(金剛上師)를 만나야 한다.


상사란 밀주(密呪)를 전하는 이를 말하는데 밀종에 귀의한 수행자는 상사가 전해준 이 주문을 날마다 염송해야 한다. 그러면 죽음을 맞을 때 밀주의 가지력(지켜주는힘)으로 중유에 빠지지 않는다. 혹 중유에 빠진다 해도 밀법의 힘으로 그 중유에서 빠져나와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참으로 깨우침을 얻은 금강상사는 봉황의 털보다 더 드물고 더구나 그런  금강상사를 만나는 일은 더 어렵다. 물론 상사 없이도 한 가지 밀주를 정해놓고 수행할 수는 있겠지만 말법시대에 홀로 밀주 수행을 이루기란 참으로 어렵다 하겠다. 거의 대다수의 중생이 죽을때 중유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이시대에 밀주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매우 적기에 그 가지력 또한 약하다는 말이다.


 말법시대에 밀주를 수행하는 일이란 마치 도둑을 보고 입으로만 경찰을 부르는 것과 같다. 입으로만 경찰을 불러서는 도둑을 물리칠 수 없다. 도둑을 물리치려면 전화로 경찰을 불러야 한다.


지혜 있는 이가 밀주를 수행함이란 이와 같다.  정토종의 염불문에는 조건이 없다.  어떤 사람일지라도 바르게 염불만 하면 반드시 부처님의 가지력으로 정토에 갈 수 있다. 이것이 가장 간편하고 정확한 해탈법이다.


 이 염불문 속에서는 지혜로운 이, 어리석은 이, 죄가 있는 이, 죄가 없는 이, 업이 가벼운 이, 업이 무거운 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부처님의 가지력으로 중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염불하면 왕생하는데 어찌하여 이 책에서는 중유의 세계를 설명하는가?  염불수행을 하지 않는 불교인과 종교가 다른 사람에게 중유의 세계를 알려주고 그 세계에서 벗어나는 길을 일러주기 위함이다.

 

제1장 : 불교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구제법의 다른점

1. 다른 종교의 구제법


다른  종교란 불교 밖의 종교로, 신(神)을 섬기는 종교를 말한다.

신을 섬기는 종교에는 오직 하나의 신만 섬기는 일신교(一神敎)와 여러 신을 섬긴다는 다신교(多神敎)가 있다. 신을 섬기는 종교의 공통점은 자신이 섬기는 신이 아니면 모두   부정해 버린다는 점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믿는 신과 교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가르친다. 역사상 일어났던 수많은 종교 간의 분쟁과 전쟁이 이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자신의 종교만 옳고 다른 종교는 사악 하다는,신을 섬기는 종교의 가르침은 중생을 구제하기에 앞서 파멸에 빠뜨리기 일쑤다.


이와 같이 신을 섬기는 종교는 그 가르침이 가진 한계 때문에 사람을 구하고 돕는다는 생각이 넓지 못하고 구제할 대상도 신을 맞는 이들로 한정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저들은 이러한 구제법이 "신의 뜻"이라 믿기에 "따르는 이는 살 것이요 따르지 않는 이는 죽을 것 이다"는 그릇된 가르침을 불멸의 진리라고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종교의 생명은 자비심이다. 자비심은 중생을 섬기고 보살피는 정신이다. 자신이 믿는 신을 섬기는 이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정신은 바로 그 종교가 갖는 자비의 폭이 좁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이다.


신을 섬기지 않거나 신을 모르는 사람, 또 지옥이나 짐승의 세계에서 괴로움을 받는 중생들은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을까? 자비심을 귀히 여기는 이라면 이같이 묻지 않을 수 없다.



2.불교의 구제법


불교는 신을 섬기는 종교가 아니다. 인과법을 소중하게 여기고 스스로 깨우치는  일을 삶속에서 이루어내는 길이요, 가르침이 불교다.


물론 불교에서도 신과 천국에 매달리지 않고 사는 것을 더 중요한 가르침으로 여긴다. 삶의 가치를 하나라고 고집할 때 삶을 이어주는 유기 관계는 어김없이 깨지고 그 본디 생명력이 시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신을 섬기든 섬기지 않 든 그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고집함이 없이 사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런 저런 신을 섬기는 이들이 가르침을 받으러 찾아 왔을 때 삶의 진실을 말씀 하셨을 뿐 섬기는 신에 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바른 가르침이란 주의(主義)가 아니라 삶의 진실에 눈을 뜨게 하는 일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바로 삶의 진실에 눈을 뜨는 일이다.


깨달음이란 덧없음과 무엇이, 무엇이 아님을 밝게 몸소 겪는 일이다. 선과 악, 참과 거짓, 신과 사람의 덧없음, 그것이 그것 아님을 밝게 알 때만 끝없는 자비심이 피어난다.

그래서 깨달은 이는 종교나 중생의 모습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행복과 기쁨을 공양(共養)하는 것이다.

 

악마까지도 행복한 존재가 되어야 나도 행복하겠다는 마음은 다른 종교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불교의 독특한 정신이라 하겠다. 신을 섬기는 종교에서 말하는 신과 악마는 선과 악이 맞섬을 상징한다. 그런 종교에서는 또 사람은 죄악에 물든 존재라 규정한다.

 

 신을 믿으면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악마를 따르면 영원히 타락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신을 내세우는 종교에는 인류의 시작부터 악마가 등장한다. 그러지 않으면 인류의 죄악을 설명할 수 없을 뿐더러 전지전능한 신이 왜 완전한 사람을 창조하지 못했나 하는 점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죄악은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그것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죄악은 삶의 현상이요. 삶의 사건이다 현상과 사건은 참으로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예측 할 수 없는 변화의 흐름이다.


이 변화의 흐름을 결정짓는 힘을 업(業)이라 하는데 이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겪는 선악 갈등의 괴로움은 업기운 (業氣運)의 맑고  어두움 가볍고 무거움에 달린 것 이지 신이나 악마의 존재와는 관계가 없는 것 이다.


아무튼 크게 깨달은 이는 삶의 진실에 들어 맞게 살뿐 틀 지워진 가르침에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깨달은 이, 곧 부처님이나 보살들은 꼭 착하고 좋은 모습만으로 악인을 구제 하지는 않는다.


악인의 모습으로 착한 사람을 제도하기도 한다. 불교는 조직으로 힘을 삼는 종교가 아니라 끝이 없는 자비심으로 힘을 삼는 종교다.  불교는 어떤 종교를 따르는 중생이든 어떤 모습을 한 중생이든 그들이  괴로움에 빠졌을 때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나아가 나고 죽는 윤회의 흐름을 길이 쉴 수 있게 도와주는 가르침이다.


불교는 조직이나 단체를 귀히 여기지 않는다. 삶의 진실에 눈을 뜨고 업의 기운을 바꾸는 일을 중히 여길 뿐 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배울 수 있고 또 마땅히 배워야 할 가르침이다 이것이 불법(佛法)이다.


우리가 불법을 가벼이 여기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의 괴로움은 더욱 커지고 길어질 것 이다.  그러므로 참된 불교인이라면 순간, 순간 중생의 괴로움을 잊지 말아야 하고 기회를 찾아 인연을 만들어 그들을 이끌면서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중생은 업이 무거워 진실성과 조화성을  나 몰라라 하는 삶의 방식에 깊이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생을 바르게 제도 하려면 너나 가릴 것 없이 그 어떤 보상 조건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중생의 삶을 당장 바꾸어 줄 수 없더라도 바른 가르침이란 반드시 꽂을 피우기 마련인 죽지 않는 빛과 생명의 씨앗임을 확신해야 한다.


이것이 불교의 구제 정신이다. 특히  중음신 구제법은 의식이 아홉 배 맑아져 지난 일을 환히 기억할 수 있는 중유기에 든 중생을 위한 가르침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 중요함과 뛰어난 공덕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다



 제 2 장 : 죽음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인가?


1.왜 태어나는가?


죽음은 태어남에서 생긴다.

죽음과 태어남은 윤회하는 삶의 주된 특징으로, 어리석음(無明)의 힘을 알맹이로 삼는다.


참으로 우리들의 삶이란, 순식간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꿈속의 생각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무명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없다. 이 같은 어리석음의 파동이 겹겹이 일어나서 업을 키워나가는 삶이 이루어지고 있다.


어리석음에서 일어난 업의 생은 컴퓨터의 기억장치처럼 삶의 모든 행동의 뿌리가 되어버린다. 어리석음에서 일어난 업력은 나와 ‘맞다’ 또는 ‘안 맞다’는 생각을 만들어내고 이 같은 생각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몸과 마음을 지어낸다. 그래서 힘살, 뼈, 피따위를 ‘나’ 라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고, 앞뒤 안 가리고 이 나를 지키려는 경향을 띠게 된다.


그럼으로 해서 ‘나’ 라는 존재를 고집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업력에 따라 좋고 나쁨, 아름다움과 미움 따위를 가린다. 그래서 저마다 다른 견해를 갖게 된다. 업력이 같은 사람이 모이면 친근감이 생기고 업력이 다른 사람이 모이면 관계가 성글어 진다. 이른바 정신없이 어지러운 탁‘濁’이 생기는 것이다.


업력은 몸으로써 자기를 한껏 나타내려고 한다. 또 고집된 ‘나’ 로 하여금 이득이 될 수 있는 정보와 지식을 얻으려는 한 마음으로 차차 눈, 코, 귀, 혀, 촉각신경과 생각하는 기능 같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지어낸다.


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형성되면 고집된 가짜 ‘나’ 가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활동은 먼저 바깥과의 접촉에서 시작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과 같이 모든 감각기관이 저마다 그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이 같은 바깥과의 접촉은 어머니 배 안에서부터 시작된다. 태교의 뿌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접촉에 따라 여러 가지 느낌이 아주 민감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 에게 이득과 편안함을 주는 것이면 즐겁게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싫어하고 맞선다.


그래서 사람의 성격이 바뀌면 좋아하지 않던 것을 좋아하게 되는데, 이것은 어떤 사물에 좋고 나쁜 특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물을 대하는 업력의 차이 때문이다. 무엇을 좋아하면 그것을 가지려는 행위로 이어진다. 그것이 소유욕이다.


가지려는 욕심도 소유욕이지만 갖지 않으려는 욕심도 소유욕이다. 중생은 이 같은 방식으로 ‘나’ 라는 몸뚱이를 끝까지 소유하고 싶어서 가지가지 억지를 부린다. 이것이 중생의 삶인데 죽음은 이런 저편에 있는 것으로 두려움과 괴로움을 던져준다.


2.왜 죽는가?


중생의 삶이란 무명의 업력이 일으킨 파장이다. 그렇다고 중생의 삶이 업력 하나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업력과 더불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조건들이 함께 해야 중생의 삶이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의 태어남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만큼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경전에 “한 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천만겁을 헤맨다.”고 했다. 이 말을 새겨 보면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려움을, 한 번 사람 몸을 잃게 되면 길이 삼악도에 떨어져 헤매게 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모두 사람의 마음 때문으로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누구를 죽이거나 삿된 음행, 거짓말, 도둑질을 해서 스스로의 마음을 짐승이나 지옥처럼 만들어, 죽으면 바로 그 업의 힘에 따라 그런 곳에 태어나게 된다. 업력에 따라 받은 몸을 보신(報身)이라 하고 업력에 따라 받은 세계를 보토라고 한다.


태어난 뒤로도 많은 조건들에 따라 업력은 바뀌어 가고 삶을 지탱하는 조건들이 다 하게 되면 죽게 된다. 사람마다 업력이 다르기 때문에 목숨도 저마다 다르다, 목숨은 결코 신이 정해 준 것이 아니다. 목숨이 저마다 다른 것은 ‘원인이 다르면 결과도 다르다’는 말씀처럼 아주 마땅한 이치이다.


중생은 결과만 보고 원인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생의 원인이 내생의 결과 됨을 알지 못한다. 만약 삶의 진실을 깨달아 인과에 눈을 뜨지 않으면 윤회하는 삶의 괴로움은 태어날 때마다 이어질 것이다.


중생의 생명은 삼라만상과 마찬가지로 조건의 형성으로 태어나고 조건의 이어짐으로 살아가고 조건이 무너짐으로 시들어가고 조건의 없어짐으로 죽는다. 이것이 이른바 성주괴공(成住壞空), 생주이멸(生住異滅), 生老病死의 변치않는 네 과정인 것이다.


좋은 조건을 태어나면 살아가기에 좋다. 그래서 좋은 인연을 만드는 일이 수행에 필요한 길이 된다. 불법을 알게 되면 태어남과 죽음을 저절로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죽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태어나지 않는 길이다.


죽지 않으려면 반드시 無生의 경지를 깨달아야 한다. 무생만이 죽지 않는 길이니 영생을 구하는 일은 환상일 뿐이다.


3 죽음이란 무엇인가?


중생은 저마다 업에 따라 몸과 세계를 받는다. 사람들은 업력과 환경이 비슷하기에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듣는다. 이 같은 삶의 조건들이 사라지면 업력도 바뀌고 보고 듣는 세계도 바뀐다.


이처럼 업이 다른 세계로 옮기는 것을 佛敎에서는 전류(轉琉)라 한다.

현대과학에 빗대어 말하면 업력은 전파와 같다.

같은 세계에 태어난 중생은 한 전파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삶의 조건이 사라지면 전파가 바뀌어 세계가 달라진다. 죽은 사람은 이제 더는 있었던 세계를 볼 수 없고 산 사람은 죽은 이의 세계를 볼 수 없다. 이것은 마치 TV 채널 1과 채널 2의 전파가 틀려서 채널에 따라 화면이 달라지는 현상과 같다. 중생은 지난 생의 업력에 따라 새로운 몸과 세계를 받는다. 이 같은 진실은 어떤 신의 이름을 불러도 바뀌지 않는다.


부처님은 “모든 존재는 자성(자기라고 고집할 만한 성품)이 없어서 저마다 허상일 뿐이다.”고 가르쳤다.

죽음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태어남과 죽음의 관계를 밝게 알아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게 되면 죽음이란 결코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평화로운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을 준비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왜 불교도들은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삶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않는가?”


이런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매우 어긋나는 말이다. 업력이 끝나지 않았다면 마땅히 과보를 받게 되어 있다. 과보를 받기 싫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오히려 나쁜 업을 짓게 되어 다음 생에 더 많은 괴로움을 받게 된다.


죽음을 맞는 준비란 무엇인가? 생명의 기원과 그 끝을 알아 모든 생명이 다 거쳐 가는 과정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날마다 염불하면 업력이 부처님의 감응을 받아, 죽을 때 윤회가 사라진 정토에서 태어날 수 있다. 염불수행을 정성스레 하면 스스로 죽을 날짜를 알 수 있고 병고가 없이 맑은 선정 속에서 극락왕생한다. 이것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다.


염불과 인연을 맺지 못한 불자나 다른 종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이들이 죽음을 맞을 때 스스로 구제하는 자기 구제법을 다음 장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자기 구제법이란, 비록 나쁜 내생의 길이 나타나도 그 길에 들지 않고 정토에 태어날 수 있는 특별한 법이다.



제 3 장 : 네 요소(四大:사람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地水火風)가 흩어짐


1.죽음의 앞뒤


사람은 한 기간의 업보가 끝나면 저절로 죽음을 맞는다. 불법을 수행한 사람이라면 죽음을 맞는 방법을 안다. 그러나 그렇지 �

출처 : 나무아미타불
글쓴이 : 향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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