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은 믿는 마음이다. 불자의 신심이라 하면 첫째는 부처님 세계에 대한 믿음이라 하겠다. 대승경전 중 가장 웅대한 가르침이 화엄경인데, 그 구성을 보면 제일 앞부분에 부처님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신심과 발심, 보살행을 설명하고 있으며 다시 부처님 되는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자가 첫번째 신심 이라고 하면 부처님 세계를 믿는 것인 것이다.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들의 명호(名號)를 살펴보면 부처님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웅전의 ‘대웅(大雄)’도 부처님의 호 중의 하나인데 ‘크게 웅장하다’는 뜻이며, ‘세존(世尊)’이라 하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이다.’ ‘여래(如來)’라 하면 ‘진리의 모습 그대로 오신 분’이다. ‘불(佛)’이라 하면 ‘깨달으신 분이다’ 라는 뜻이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명호는 ‘석가모니(釋迦牟尼)’이다. ‘석가(釋迦)’라고 하면 원래 종족의 이름인데 그 종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능인(能仁)’이라 번역되며 모든 인덕을 다 드러낼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어떠한 인덕도 자비도 다 이루고 실천 할 수 있으시다. ‘모니(牟尼)’는 성인이라는 말로 부르는데, 본래의 의미는 ‘적묵(寂默)’으로 고요하고 말이 없다는 뜻이다. 말이 없다는 것은 만족을 뜻하는 것이다. 만족하지 못한 사람이 말이 많기 마련이다. 정신세계의 극치에 도달하게 되면 자족과 만족을 이루게 되며, 자족과 만족을 얻게 되면 말은 줄어들고 실천으로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라 하면 만족 속에 어떠한 인덕도 다 실현 가능하게 이루신다는 것이다. 좋은 일을 많이 해도 자족하지 못한 상태에서 하게 되면 선행이 지속되지 못한다. 자족한 상태에서 해야만 지속 가능한 것이 되는 것이다. 또 다른 명호 중에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있는데, 무량광(無量光) 무량수(無量壽)라 번역된다. 광명이 한량없고, 수명이 한량없다는 것인데, 부처님의 세계에는 어두움이 없으며 죽음이 없다는 것이다. 진리의 세계에는 본래 어두움과 죽음이 없는데 사람들이 시각적으로 또 감각적으로 어두움을 느끼고 죽음을 느낄 뿐이다. 느낌이란 느껴질 뿐 존재하지는 않는 것이라는 것을 바로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여실지(如實智) 여실견(如實見) 이라 하였다. 실답게 알고 실답게 보아야 한다. 감각으로 엉뚱하게 알고 있는 것을 바르게 아는 것이 여실지이며 여실견이다. 그러므로 아미타의 광명이 무량하고 수명이 무량하다는 것은 어두움이 없다는 것이다. 어두움이 어딘가에 있다면 그것은 광명의 한계가 있다는 것이지만 어디에도 어두움이 없고 죽음이 없다. 그런데 왜 우리가 죽음을 느끼는가 하면 변혁을 잘못 느끼기 때문이다. 변하고 바뀔 뿐 없어지는 것이 아닌데 인간은 그것을 탄생과 사망으로 느껴서 태어나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과 밝은 것은 좋아하고 죽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과 어두움을 싫어하는 것이다. 이것이 감각의 현상이다. 삶과 죽음이란 불교의 깨달음에서 보면 변혁의 현상인 것이다. 태어나는 것도 변혁이요 죽는 것도 변혁이다. 순간 순간 우리는 변혁하고 있는 것이다. 생사와 밝고 어두움은 감각과 생각에서 나온 것이고, 지혜에서 보면 생사와 어두움은 없다. 그러므로 생각을 지혜로 바꾸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래서 어두움이 없는 무량광, 죽음이 없는 무량수가 아미타불인 것이다. 또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이라 하면 완전한 대광명(大光明)이라 하고 광명변조(光明遍照)라고도 한다. 온 우주에 광명이 두루 비춘다는 뜻이다. 그 외에도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대세지보살, 문수보살 등 수많은 명칭들이 모두 불세계의 만족과 인덕, 지혜와 자비의 부처님 세계를 드러내는 명호들이다. 그러한 세계를 믿는 것이 첫 번째 신심이다. 두 번째는 부처님 세계에만 가능하고 사람들에게는 전혀 불가능한 것인가. 우리 인간들에게도 부처님과 같이 될 수 있는 씨앗이 있고 불성이 있다. 다만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그것을 여래장(如來藏)이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나타내셨지만 우리는 감추고 있을 뿐이다. 감추지 않고 나타내기만 한다면 우리도 부처님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또 부처님을 불과(佛果)라 하고 우리 중생들을 불종자(佛種子)라 표현하기도 한다. 불성(佛性)에 대해서 비유해 보자면 부처님은 이미 활활 타고있는 나무라 하면, 우리 중생들은 아직 불붙지 않은 나무이다. 모든 나무는 불붙을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다만 불을 만나면 타고 만나지 못하면 타지 못하는 것과 같다. 좋은 인연을 만나서 햇볕에 잘 마르면 불이 잘 붙을 수 있고, 인연을 잘 만나지 못해 물 속이나 진흙 속에 들어있다면 쉽게 불이 붙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도 그러한 불종자를 가지고 있고 불성을 가지고 있고 감추어진 여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불성은 어디에 들어있는 것인가. 지금 여러분이 본인을 쳐다보고 있는 것 자체가 바로 불성이다. 생각만큼 듣고, 보고, 느끼는 것인데 그것이 불성이다. 자기 집에 있으면서 순간적인 착각으로 ‘이곳이 나의 집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고 나의 집으로 가야 한다며 한참을 안절부절하다가 어느 순간 이곳이 자신의 집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조금 전 자신의 집이 아니라고 알았던 것과 자신의 집임을 안 것이 둘이겠는가? 내 집이 아니라고 착각한 것 자체가 깨달음이다. 착각할 능력이 없다면 올바로 깨달을 능력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보고, 듣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그 자체가 불성이다. 늘 가지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밝게 활짝 펼쳐나가지 못하고 두려움, 미움, 착각 등의 번뇌 속에 감추어져 있을 뿐인 것이다. 번뇌는 공포, 분노 등인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욕망을 갖게 되어있다.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게 물질적인 탐욕은 있지 않다. 죽음이 두렵고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할수록 물질에 대한 욕망을 강하게 가지게 되는 것이다. 삶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삶이 무엇인지 확실히 모르고 죽음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나면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삶에 대한 애착이 줄어들고, 삶에 대한 애착이 줄어들면 물질에 대한 욕심이 저절로 줄어들게 되고, 물질에 대한 욕심이 줄어들면 자연히 자비보시를 행하게 되어있다. 우리 자신이 모두 불종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만 열면 된다. 착각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인식을 바로잡기만 하면 성불이다. 그러한 중생의 불성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현상속에서 살고 있다. 현상이란 역할인데, 곧 세력이다. 중생들은 늘 불성보다 세력을 중요시해서 그 세력에 밀리고 밀리며 살고 있다. 불성을 믿지 않고 세력을 믿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 된다.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란 두려워할 수 있는 능력, 미워할 수 있는 능력, 욕심 낼 수 있는 능력, 남을 헤칠 수 있는 능력, 거짓말 할 수 있는 능력 등이다. 번뇌를 떠나서 깨달음이 없는 것이 그것이다. 착각할 수 있어야 깨달을 수도 있는 것이고, 욕할 수 있어야 칭찬할 수도 있으며, 미워할 수 있으면 좋아할 수 있으며, 괴로워 할 수 있다면 즐거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이 불성이다. 그것을 잘 키우면 되는 것이다. 시시각각 보고, 듣고, 행동하고, 판단하고, 기억하고, 움직이는 등의 모든 것이 불성이다. 이것만 잘 열고 닫고 키우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자비로 키우고, 지혜로 키우고, 원력으로 키우고, 공덕으로 키우면 되는 것이다. 지금 미워하는 마음, 두려워하는 마음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바로만 열면 되는 것이다.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하는 것이 파도와 같다면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석가모니불 등의 불세계는 바다와 같은 것이다. 파도를 떠나서 바다가 없는 것이다. 미워하는 마음을 떠나서 좋아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미워하는 마음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바꾸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믿고 행하는 신행만 하면 성불할 수 있다. “왜 되질 않는가?”하는 말들을 하는데, 안 된다는 그 마음을 바꾸면 된다. ‘일념즉시무량급(一念卽是無量劫)이요 무량원급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이라’ 하였다. 빨리 성불하지 못하여 지루하다 빠르다는 그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고 부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매일 경을 읽는다 한들 생각이 일념이 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 믿음인 인과이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는데 이 원인과 결과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것이다. 생각으로 보면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으니까 다른 것으로 보이지만 지혜로 보면 일념이 무량급이요 무량원급이 일념이며,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인 것이다. 이 말은 시작과 결과가 함께 있다는 것이다. 천만년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생각이요, 천만년이 지나고 보면 한 순간인 것이다.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이라는 말은 소승불교에서는 구세(九世)를 이야기 하고, 대승불교에서는 십세(十世) 를 이야기 하는데, 삼세(三世)가 발전하면 십세가 되는 것이다. 삼세란 과거, 현재, 미래인데 과거세에도 삼세가 있고 현재세에도 삼세가 있고 미래세에도 삼세가 있다. 그리해서 구세가 되고 그기에 실재로 우리가 느끼고 보는 그 순간, 그 찰나의 일세(一世)를 합하여 십세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호상즉(互相卽)이란 말은 함께 있다는 말이다. 현재의 찰나를 번역하면 념(念)으로 번역한다. 그래서 한 찰나는 일념이 되는 것이다. 이 찰나는 구세 삼세에 포함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다가와도 다가와도 미래요, 지나가도 지나가도 현재일 뿐이다. 그래서 미래라는 것은 새롭게 다가오는 미래가 아니라 오래된 미래인 것이고, 지나간 미래인 것이다. 생각으로는 미래와 과거가 다르지만 진리로 보면 그것은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부처님세계를 믿고 중생이 여래의 씨앗임을 믿고 인과를 믿고 닦으면 되는 것이다. 언제 될까 하는 생각, 빠르고 느린 것, 되고 안 되는 것, 얻는 것 잊어버린 것 등은 모두 망상일 뿐이다. 오로지 닦고 또 닦으면 열리게 되어있는 것이다. 이것이 신심의 공덕이다. 그래서 불자들에게는 신심의 공덕이 아주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는 것 같지만 실지로 잘 믿지 않는다. 우리가 인간이다 라는 것은 믿지만 우리가 부처의 씨앗 이라는 믿음은 갖고있지 않다. 그러므로 실제로 우리가 신심이 있는가 하면 너무 미약하다. 인과와 불성과 불세계를 믿고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대광명, 무량광 무량수, 만족과 능인, 만족과 자비를 믿어야 한다. 자비가 없는 만족이 없고 만족이 없는 자비가 없다. 자비가 안되는 이유는 스스로 만족하는 자족을 못해서 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서도 보면 자유와 성장이 있는데, 선진국이 되려면 기본 조건이 경제성장이다.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가기에는 현재의 소득으로는 한동안은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이 성장 없는 자유냐, 자유 없는 성장이냐 하는 것이다. 예전 민주화 운동이 거셀 때 경제성장을 부정하지는 않았고 오직 인권과 자유 만을 외쳤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자유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성장을 외치고 있다. 자유를 점점 많이 누리면 그만큼 성장은 느려진다. 성장과 자유를 잘 조절하여야 한다. 성장하면서 자유를 누리고, 자유를 누리면서 성장을 하여야 한다. 그러려면 서로가 서로를 믿고 존경하고 단합하여야 한다. 존경과 믿음이 없으면 결속력이 생기지 않는다. 훌륭한 지도자가 있는 조직에서는 그러한 일들을 해내고 있는 것을 본다. 지도자가 구성원에게 믿음을 주면 일을 더 많이 하더라도 즐거운 것이다.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가장이 가족들에게 믿음을 주면 단합이 된다. 이렇게 자유와 성장이 공존할 수 있도록 조직이 바뀌어야 한다. 정리하자면, 죽음이 없고 어두움이 없는 부처님의 세계를 믿고, 중생이 여래의 씨앗을 가지고 있음을 믿고, 열심히 닦으면 더디고 빠름이 없이 금방 된다는 것을 믿고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기본적인 것을 믿고 해야지 현상적인 세력으로만 보면 자꾸 차별심이 생기고 장벽이 생겨서 안된다. 얼마전 어느 작품을 읽게 되었는데,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작품이었는데 큰 감동을 받게 되어 소개하고자 한다.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에게 헌 옷걸이가 한마디 하셨다. 헌 옷걸이: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새 옷걸이: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는 지요? 헌 옷걸이: 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자기의 신분인양 오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동안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생은 옷걸이이다. 인생의 옷걸이에는 어린이라는 옷도, 학생이라는 옷도, 청년이라는 옷도, 할아버지라는 옷 등 여러 가지 옷이 입혀지는데 그것은 잠시 입혀졌다 벗겨지는 옷에 불과할 뿐 옷이 아닌 것이다. 세력이란 그런 것이다. 옷걸이에게 잠시 입혀지는 옷인 것이다. 우리의 불성이 진짜 옷걸이이며 삶과 죽음은 잠시 입혀지는 옷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성을 잘 알아야 한다. 수시로 입혀지고 벗겨지는 옷에 연연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불성은 무엇인가? 불성은 원적(圓寂)이라고도 하는데, 만족한 평화인 것이다. 우리는 만족한 평화 속에서 있는데 그런 옷걸이에 태어남, 죽음, 잘남, 못남 등의 수많은 옷이 입혀지고 벗겨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신심으로 거기에 휘둘리지 말고 끊임없이 닦되 만족한 상태로 닦아나가는 것이 지속 가능한 공덕이다.
1963년 통도사에서 사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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