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산 물은 물

97. 평생의 벗 향곡스님

쪽빛마루 2010. 1. 22. 20:55

97. 평생의 벗 향곡스님



성철 스님이 1981년 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었을 때 처음으로 한 말이 있다.

"향곡이 살아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아했겠노…."

향곡(香谷) 스님은 그렇게 성철 스님이 한평생 잊지않은 도반(道伴.구도행의 동반자) 이었다. 두 사람은 20대 후반 한창 구도열이 왕성하던 시절 만났다.

성철 스님도 작은 체구가 아닌데, 향곡 스님은 성철 스님보다 키도 더 크고 얼굴도 넓고 체구가 당당했다. 성철 스님은 자신보다 덩치가 큰 향곡 스님과 장난을 치며 어울렸던 일을 얘기하며 웃곤 했다.

"어느 날 향곡이하고 수좌 몇이 포행(산책) 을 나갔는데,마침 계절이 초가을이니 잣나무에 잣이 주렁주렁 달렸어. 그래서 향곡이하고 내기를 했제. '저 잣을 따 올 수 있나'고 하니 향곡이가 '그걸 못 따'하면서 잣나무를 막 오르려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라믄 옷을 벗고 올라야지, 옷 입고 오르다 잣송진이 옷에 묻으면 우짤라카노'하니 '그래 맞다'하며 옷을 훌러덩 벗고 잣나무로 막 올라가는 기라."

어느 산골 깊은 골짜기니 누가 지나갈 것도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성철 스님의 장난끼가 발동했다. 향곡 스님이 한참 나무에 올랐는데 밑에서 소리를 쳤다.

"아이구, 우짜노! 저기 동네 아가씨들이 서넛 올라오네. 니 빨리 내려와라."

성철 스님은 소리만 지르고 먼저 도망쳤다. 향곡 스님이 화가 난 것은 당연하다. 그 대목에서 성철 스님은 늘 웃느라 얘기를 다 마치지 못하곤 했다.

성철 스님은 1947년 '봉암사(경북 문경의 절) 결사'를 하면서 당연히 향곡 스님을 불렀다. 성철 스님이 들려주던 얘기.

"내가 향곡한테 편지를 냈지. 우리가 봉암사에서 결사했는데 당장 공부하러 오라고. 안 오면 내가 가서 향곡이 살던 토굴에 불을 질러 버린다고 했지. 그 편지 받고 당장 쫓아 왔지. "

향곡 스님이 찾아온 날 비가 와 길이 질퍽하게 젖어있었다. 인근 점촌에서 신도들이 마침 봉암사를 찾아오다 같이 마당에서 마주쳤다. 나이 많은 노인들이 깨끗한 옷을 입고 마당으로 들어오다가 성철 스님을 보고는 땅바닥에 엎드려 넙죽 절을 세 번이나 했다. 성철 스님이 흐뭇해 하던 기억.

"진흙탕에 넙죽넙죽 엎드려 절을 하니까 향곡이가 그거 보고 깜짝 놀라는 거라. 그 절한 보살이 알고 보니 바로 전진한(錢鎭漢.당시 사회부장관) 씨 어머니라. 향곡이 두고두고 그 이야기 했제."

성철 스님은 봉암사에서 처음 신도들에게 '스님들을 보면 세 번 절하라'고 가르쳤으며, 당시 실력자의 어머니인 귀부인이 진흙탕에서 절을 한 것이다. 이전에 없었던 진풍경이 아닐 수 없기에 향곡 스님이 놀랄만도 했다.

이렇게 향곡스님도 봉암사결사에 동참하게 되었다. 당시 봉암사에서 정진한 향곡 스님에 대한 기록은 제자인 해운정사 진제(眞際) 스님이 지은 비문에서 확인된다.

"정해년(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여러 도반들과 함께 정진하던 중 한 도반이 묻기를,'죽은 사람을 죽여라' 하면 바야흐로 산 사람을 볼 것이요, 또 죽은 사람을 살려라 하면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볼 것이다고 한 말이 있는데 그 뜻이 무엇이겠는??고 하거늘 이때 무심삼매에 들어 삼칠일(21일) 동안 침식을 잊고 정진하다가 하루는 홀연히 자신의 양쪽 손을 발견하자마자 활연대오하시고 게송을 읊으셨다."

여기서 향곡 스님이 용맹정진에 들게한 계기가 된 질문을 던진 분이 성철 스님이다. 향곡 스님은 봉암사 부속 백련암에서 정진을 마치고 깨달음을 얻은 뒤 큰절의 성철 스님에게 내려와 '깨달음을 둘러싼 대단한 논쟁', 즉 법전(法戰) 을 벌였다. 도우(道雨) 스님이 당시를 지켜봤다.

"정진을 끝낸 향곡 스님은 '이제 성철이가 아는 불법(佛法) 은 아무 것도 아이다. 내가 바른 법을 알았다'고 하면서 매일 성철 스님과 싸움을 벌였지요. 한동안 봉암사 산골짜기가 두 분 고함으로 가득 했지요."

이렇게 성철 스님과 함께 봉암사에서 정진한 향곡 스님은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이후 '북전강.남향곡(北田岡.南香谷) ', 즉 '북쪽에는 전강 스님,남쪽에는 향곡 스님'이란 말이 60, 70년대 불교계의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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