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스님 스스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기 위한 법문출판사업에는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매일 새벽 한시간씩 구술한 정성도 그렇고, 간혹 스승의 구술을 자장가 삼아 졸고 있는 제자의 등짝을 두들겨 깨우는 손길에서도 남다른 애정이 느껴졌다.
성철 스님이 직접 구술한 내용은 쉽지 않았다. 받아 적고도 무슨 말인지 잘 몰라 기존의 법문 테이프에서 옮겨놓았던 것과 비교해가면서 다시 정리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본지풍광(本地風光)』과『선문정로(禪門正路)』의 초고다.
두 책은 선(禪) 불교에 대한 성철 스님의 생각을 정리한 것으로 선불교의 역대 고승(高僧) 들이 주고받은 얘기들을 많이 인용하면서 선(禪)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어 꽤 어려운 편이다.
출간과정에서 빠뜨려선 안될 공로자가 법정 스님이다.
얼추 초고가 완성된 즈음 성철 스님이 나를 불러 '송광사 불일암으로 법정 스님을 찾아가 윤문을 부탁한다고 말씀 드리고 오라' 고 했다.
불일암으로 찾아 뵙자 법정 스님은 흔연하게 승낙하면서 '되도록이면 큰스님 뜻이 후대에 잘 전해져야지. 내가 크게 윤문할 것이 없지'라며 원고를 봐 주었다.
또 출판과정에서 자세한 조언을 아끼지 않아 큰 도움이 됐다. 그런 도움을 얻어 마침내 1980년대 초반, 두 권의 책을 받아 든 성철 스님이 매우 흐뭇해 하며 했던 말이 기억난다.
"책 두 권 냈으니 나는 이제 부처님께 밥값 했다. 이 책 이해하는 사람이면 바로 나를 아는 사람인 거라."
이후에도 성철 스님의 법문을 서둘러 출간, 오늘날 11권의 장서가 쌓인 것은 현호(전 송광사 주지) 스님의 조언 덕분이다. 현호 스님은 송광사 방장이었던 구산(九山) 스님을 모셨던 분이다.
1983년 구산 스님이 열반에 들었을 때 성철 스님을 대신해 49재에 참석했을 때 얘기다.
광주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는데 타고 보니 옆 자리에 현호 스님이 앉아 있었다. 큰스님을 모신 입장에서 비슷한 경험을 앞서 한 현호 스님에게 이것 저것 물었다.
"큰스님을 모시고 계시다가 이렇게 훌쩍 떠나니 얼마나 황망하십니까. 노스님이 떠나신 뒤에 무엇이 가장 후회가 되셨습니까. 스님께서 가장 후회하는 것이 저에게도 가장 후회 될 일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큰스님 계실 때는 몰랐는데 이제 떠나시니 생전에 어록을 다 못 낸 것이 제일 후회 되네. 내방 궤짝에 노스님 자료가 가득 있다고 내가 자랑 했잖아. 그걸 큰스님 계실 때 다 책으로 내 놔야 했었는데…."
말꼬리를 흐리는 현호스님의 얘기를 들으면서 등줄기를 타고 강한 전류의 충격같은 게 느껴졌다.
당시 겨우 두 권의 책을 내놓은 상황, 성철 스님이 남긴 귀한 법문의 대부분은 여전히 빛을 보지 못하고 있지 않는가.
주변에 자문을 구했다. 불교학자들 가운데도 '큰스님 생전에 법어집이 나오면 아무도 의심하거나 시비를 걸지 않는데, 사후에 책이 나오면 위작시비에도 걸리고 하니 성철 스님 생전에 내는 것이 옳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그래서 성철 스님의 법문 중 핵심적인 중도(中道) 사상을 받은『백일법문(百日法門)』의 출간을 서둘렀다.
그러나 당시엔 절 살림을 책임지는 원주를 맡은데다, 산문을 나서지 않는 성철 스님의 심부름꾼으로 여기저기 다니랴 무척 바빴다. 자꾸 원고 정리가 차일피일 미뤄지게 됐다.
우선 원고가 정리되는 대로 출판하기로 하고, 백일법문 중에서 가장 먼저 정리된 『돈오입도요문론』을 내놓았다.
86년 5월이다. 백일법문이 상.하 두 권으로 완간된 것은 92년 4월. 성철 스님이 해인사에서 법문을 시작한 지 25년만의 일이다.
성철 스님은 생전에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나와 같이 부처님의 중도사상으로 선(禪)과 교(敎)를 하나로 꿰어 설명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중도사상으로 불교의 큰 두 맥인 선과 교를 묶어 설명하고, 방대한 불교의 역사와 사상의 변천과정까지 일관되게 풀어낸 책인지라 성철 스님 스스로도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지금도 아쉬운 것은 그런 법문을 일찌감치 책으로 엮어내는 작업을 했다면 성철 스님 본인이 많은 가필과 수정을 해 더 정연한 모습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큰스님 생전이라고 하지만 워낙 말년에 이뤄진 일이라 직접 가필.수정할 여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