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첫 한글 법어
1981년 성철 스님이 종정이 되고 첫 부처님오신날을 맞았다. 총무원에서 "종정스님께서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법어를 내려주셔야 한다"고 전화가 와 보고하자 큰스님이 의외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런 법어도 해야 되는가? 해야 된다카면 한번 써보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큰스님이 불러 달려갔다.
"이게 4월 초파일 법어다."
내미는 종이 한 장을 보니 한문투성이다. 보통 큰법당에서 스님들을 상대로 하는 법어란 원래 이런 식이다. 그렇지만 일반인들에게 들려줄 법어로는 부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철 스님의 긍정적 반응에 힘입어 큰 맘 먹고 건의했다.
"큰스님, 이제 스님께서는 옛날처럼 산중의 스님이 아니십니다. 방장이 아닌 종정으로서 모든 국민들에게 한 말씀 하시는 것이니 이런 한문투로는 안됩니더.쉬운 한글로 법어를 내려주셔야 합니더."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데 성철 스님이 한참 말이 없다. 쏘아보는 눈길이 따갑다 싶은 순간 승낙이 떨어졌다.
"그래? 그라만 내가 다시 한번 써보지."
다시 방으로 들어가고 한두 시간. 큰스님이 다시 불렀다.
"이만하면 됐나? 니가 한번 봐라."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한문투다. 내친 김에 다시 간청했다.
"처음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지만, 말 자체를 한글체로 한번 더 바꾸어 주십시오."
예상했던 대로 호통이 없다. 잠시후 성철 스님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해 세번째로 받아든 법어가 다음과 같다.
"모든 생명을 부처님과 같이 존경합시다. 만법의 참모습은 둥근 햇빛보다 더 밝고 푸른 허공보다 더 깨끗하여 항상 때묻지 않습니다. 악하다 천하다 함은 겉보기뿐, 그 참모습은 거룩한 부처님과 추호도 다름이 없어서, 일체가 장엄하며 일체가 숭고합니다."
종정이 내린 최초의 한글 법어다. 이어 매년 신년 초나 연말에 내놓은 법어도 당연히 한글로 바뀌었다. 이듬해인 82년 부처님오신날 법어는 '자기를 바로 봅시다'이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유형.무형 할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그러므로 반짝이는 별, 춤추는 나비 등이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를 바로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영원하므로 종말이 없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의 종말을 걱정하며 두려워하여 헤매고 있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 이렇듯 크나큰 진리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다 함께 길이길이 축복합시다."
한글 법어에 대한 재가불자와 일반인의 반응은 좋았다. 일차적인 의미를 우선 이해할 수 있어서 친근한 탓이다. 특히 '자기를 바로 봅시다'라는 법어는 뜻있는 많은 분들에게 종교를 떠나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듯하다.
그 한 예가 작가 최인호씨다. 가톨릭인 최씨는 당시 월간 『샘터』에 연재하던 글에서 이 법문을 인용했다. 그는 특히 끝부분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에 감명을 받았다고 썼다.
최씨와의 인연은 10년쯤 전 그가 『길 없는 길』이라는 소설을 쓰던 당시 경허 스님의 친필인 방함록 서문이 해인사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온 때부터다.
그때 마침 큰절 소임을 맡고 있었기에 경허 스님의 친필 방함록을 앞에 두고 최선생과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최씨와 첫 대면을 했다. 얘기하다 보니 대학(연세대) 동문이고, 나이도 내가 한살인가 많은 정도라 '형님''아우'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지금 최씨와 함께 중앙일보 같은 면에 나란히 글을 연재하고 있으니 참 기이한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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