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수공양 2
간디 자서전을 보면, 그는 영국에 유학가서 예수교를 배웠는데
예수교에서는 사람 사랑하는 것을 배우고, 그 후 불교에서는 진리
에 눈떳는데 일체 생명 사랑하는 것을 배웠다고 되어 있습니다. 불
교는 사람만이 대상이 아닙니다. 일체 중생이 그 대상입니다. 불교
에서는 사람이고, 짐승이고, 미물이고 할 것 없이 일체 중생이 모두
다 불공의 대상입니다. 다시 말해 일체 중생을 돕는 것이 불공입니
다 우리는 이것을 실천하고 또 몸소 행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부처
님께서 말씀하신 도적놈 소리를 좀 면할지 모르겠습니다.
6.25사변 전 문경 봉암사에 있을 때,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향곡
스님 청으로 부산사람들 앞에서 법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불
공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불공이란 남을 도와주는 것이지 절에서 목탁 두드리는 것이 아니
며, 결국 절이란 불공 가리치는 곳이라고 불공은 밖에 나가서 해야
하며 남을 돕는 것이 불공이라고 그리고 행원품 이야기도 많이 하
였습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이 그 말을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법
문을 마치며 봉암사로 돌아왔습니다. 며칠 후에 부산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그때는 각 도마다 종무원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경남
종무원에서 긴급 회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절에서 하는 것은 불공이 아니고 절은 불공하는 것을 가르쳐 주
는 곳이라 하고 불공이란 남을 돕는 것이라 했으니 결국 이것은 절
에 돈 갖다 주지 말라는 말인데, 그러면 우리 중들은 모두 굶어죽으
라는 소리냐, 그 말을 한 중을 어디로 쫓아 버려야 한다고 야단들이
니 앞으로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조금 있
으니 서울에서도 누가 내려왔습니다. 서울의 총무원에서 똑같은 내
용의 회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말할까? 당신들 뜻대로 하자면 부처님께서 영험하
고 도력 있으니 누구든지 돈 많이 갖다 놓으면 갖다 놓을수록 복
많이 온다고, 절에 돈벌이 많이 되는 말만 해서 자꾸 절 선전할까?
당신도 천년, 만년 살 것 같애? 언제 죽어도 죽는 건 꼭 같애. 부처
님 말씀 전하다 설사 맞아죽는다고 한들 무엇이 원통할까? 그건 영
광이지! 천하의 어떤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해도 나는 부처님 말씀 그
대로를 전한 것뿐 딴소리는 할 수 없으니, 그런 걱정하지 말고 당신
이나 잘 하시오!"
우리 대중 가운데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없습니까?
"방장스님은 법문 해달라고 했더니 결국 우리 먹고 지도 못하게
만드는구나. 절에 불공 안하면 우리는 뭘 먹고살란 말인가?"
걱정 좀 되죠? 나도 걱정이 조금 됩니다.
물론 우리 해인사 대중뿐 아니고 다른 곳에서도 이런 생각 할 사
람이 있겠습니다.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불교를 믿든지 예
수교를 믿든지 자기의 신념대로 하는데, 예수교를 믿으려면 예수를
믿어야지 신부나 목사 같은 사람을 믿어서는 아니 됩니다.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도 부처님 말씀을 믿어야지 승려를 따라가
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은 천당도 극락도 아닌 지옥입니다. 지금 내
가 말하는 것은 부처님 말씀을 중간에서 소개하는 것이지, 내 말이
라고 생각하면 큰일납니다. 달을 가리키면 저 달을 보아야지, 가리
키는 손가락을 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대중도 다 알겠지만 승려란 부처님 법을 배워 불공 가르쳐
주는 사람이고, 절에서는 불공 가르쳐 주는 곳입니다. 불공의 대상
은 절 밖에 있습니다. 불공 대상은 부처님이 아닙니다. 일체 중생이
다 불공 대상입니다. 이것이 불공 방향입니다.
내가 생각할 때는 절에 사는 우리 승려들이 목탁 치고 부처님 앞
에서 신도들 명과 복을 빌어 주는 이것이 불공이 아니며, 남을 도와
주는 것만이 참 불공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이를 실천할 때, 그
때 비로소 우리 불교에도 새싹이 돋아날 것입니다.
남의 종교와 비교, 비판할 것은 아니지만, 예수교와 불교를 비교
해봅시다. 진리적으로 볼 때 예수교와 불교는 상대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그것은 일부 학자들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또 개인적으
로 볼때에도 예수교에서 보면 불교가 아무것도 아니고, 불교측에
서 볼 때에도 예수교가 별것 아닐 것입니다. 서양의 유명한 쇼펜
하우어같은 철학자도 "예수교와 불교가 서로 싸운다 하면 예수교
가 불교를 공격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로 보면 그러하지만 실천면에서 보면 거꾸로 되어 있
는 게 현실입니다. 예수교인들은 참으로 종교인다운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불교인은 예수교인 못 따라갑니다.
불교의 자비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남에게 베푸는 것인데
참으로 자비심으로 승려노릇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남 돕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가 문제일 것입니다 '자비'란 요즘 말로 표현
하자면 사회적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승려가 봉사 정신이 가장 약하리라 봅니다. 예수교인들은 진실로
봉사 활동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갈멘수도원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정월 초하룻날
모여서 무슨 제비를 뽑는다고 합니다. 그 속에는 양로원, 고아원, 교
도소 등 어려움을 겪는 각계각층이 들어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양로원' 제비를 뽑으면 1년 365일을 자나깨나 양로원 분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고아원'에 해당되면 내내 고아원만을, '교도
소'면 교도소 사람만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생활이 기도로 이루어지는데, 자기를 위해서는 기도
안 합니다. 조금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남을 위한
기도의 근본정신인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인입니다. 그들은 먹고사
는 것은 어떻게 해결하는가. 닭을 기르고 과자를 만들어 내다 팔아
서 해결한다고 합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자기들 노력으로 처리하고
기도는 전부 남을 위해서만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어찌 합니까? 불교에서도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데
소승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승은 남을 위해 사는 것입
니다. 불교의 근본은 대승이지 소승이 아닙니다. 원리는 이렇한데
실천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쪽 사람들은 내 밥 먹고 남만 위하는데
우리 불교에서는 이것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없다고 보
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교를 본받아서가 아니라, 불교는 '자비'가 근
본이므로 남을 돕는 것이 근본인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불공
이란 남을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활 기준을 남을 돕는 데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백련암에 찾아온 한 여학생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절을 했느나?"
"스님 저는 저를 위해 절하지 않았습니다. 남을 돕는 사람이 되
게 해 달라고 절했습니다"
"왜 빙빙 돌기만 하느냐? 남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
고 하지 말고 직접 '일체 중생이 행복하게 해 주십시오'하고 절해야
지, 이것은 '모든 중생이 행복하게 해 달라고 비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하는 거와는 다르지"
아무 생각 없이 절을 하지 말고, 절하는 것부터가 남을 위해 절해
야 된단 말입니다. 그리고 생각이 더 깊은 사람이면 남을 위해 아침
으로 기도해야 됩니다.
내게 항상 다니는 사람에게는 의무적으로 절을 시킵니다. 108배
절을 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면 날마다
아침에 108배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나도 새벽으로 꼭 108배를 합니
다 그 목적은 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과 같이 발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 발심하여 예배하옴은
제 스스로 복 얻거나 천상에 남을 구함이 아니요
모든 중생이 함께 같이 무상보리 얻어지이다(중략)
그리고 끝에 가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중생들과 보리도에 회향합니다.
일체 중생을 위해, 남을 위해 참회하고 기도했으니 기도한 공덕
이 많습니다. 이 모든 공덕이 다, 모두 일체 중생에게 가라는 것입
니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원하노니 수승하온 이 공덕으로
위없는 진법계에 회향합니다.
그래도 혹 남은 것, 빠진 것이 있어서 나한테로 올까봐 다시 한
번 모든 공덕이 온 법계로 돌아가고 나한테는 하나도 오지 말라고
발원합니다.
이것이 인도에서부터 시작하여 중국을 거쳐 신라, 고려에 전해
내려온 참회법입니다. 중국도 공산화 이전에는 총림에서만이 아니
고 모든 절에서 다 '참회'해 온 것입니다. 일체 중생을 위해서, 일체
중생을 대신해서 모든 죄를 참회하고, 일체 중생을 위해 모두 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불교 믿는 사람의 근본 자세이며, 사명이
며, 본분입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있습니다.
"스님도 참 답답하시네, 내가 배가 고픈데 자꾸 남의 입에만 밥
떠 넣으라니 나는 굶으라는 말인가?"
인과법칙이란 불교뿐만 아니라 우주의 근본 원리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선인선과 악인악과'입니다.
선안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오고 악한 일을 하면 나쁜 과보가
오는 것입니다. 병이 났다든지, 생활이 가난하여 어렵다든지
하는 것이 악한 과보입니다. 그러면 과거에 무엇인가 악의 원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그것이 기억에는 없지만 세세생생
을 내려오며 지은 온갖 악한 일들이 그 과보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선인선과라, 이번에는 착한 일을 자꾸 행합니다. 그러면 좋은 결
과가 오는 것입니다. 남을 자꾸 돕고 남을 위해 자꾸 기도하면, 결
국에는 그 선과가 자기에게로 모두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남을 위
해 기도하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한 기도가 되며, 남을 해치면 결국
나를 해치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도우면 아무리 안 받으려
해도 또다시 내게로 오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고 생활하면
남을 내가 도우니 그 사람이 행복하게 되고, 또 인과법칙에 의해 그
행복이 내게로 전부 다 오는 것입니다.
생물 생태학에서도 그렇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남을 해치면 자
기가 먼저 손해를 보게 되고, 농사를 는 이치도 그와 같다 하겠습
니다. 곡식을 돌보지 않으면 자기부터 배고플 것입니다. 그러니 내
가 배고파 굶어죽을까 걱정하지 말고 부처님 말씀같이 불공을 잘하
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비유를 말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불공할 줄 모르고 죄를 많이 지어서 지옥에 떨어졌
습니다. 지옥 문 앞에 서서 보니 지옥 속에서 고통받는 중생들 모습
이 하도 고통스럽게 보여서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대개 그 모습을 보면 '아이고 무서워라 나도 저 속에 들어가면 저
렇게 될 텐데 어떻게 하면 벗어날까' 이런 생각이 들 텐데 이 사람
은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저렇게 고생하는 많은 사람의 고통을 잠깐 동안이라도 나 혼자
대신 받고 저 사람들을 쉬게 해줄 수 없을까? 편하게 해줄 수 없을
까?'하는 착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생각을 하고 보니 지옥이 없
어져 버렸습니다. 그 순간 천상에 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일체
유심조입니다. 착한 생각을 내면 자기부터 먼저 천상에 가는 것
입니다.
요즘은 사회에서도 봉사활동을 많이 하고 있는데, 우리 스님들은
산중에 살면서 이런 활동에는 많이 뒤떨어지고 있습니다. 오직 부
탁하고 싶은 것은 부처님 말씀에 따르는 불공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석으로 부처님께 예불하면서 꼭 한 가지 축원을 합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일체 중생이 다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세 번 하는 것입니다. 매일 해보면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좋은 것
을 느끼게 됩니다.
절을 한 번 하든 두 번 하든 일체 중생을 위해 절하고, 일체 중생
을 위해 기도하고, 일체 중생을 위해 돕는 사람, 일체 중생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어야만 앞에서 말한 부처님을 팔아서 사는 '도적놈'
속에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서로서로 힘써 불공 잘해서 도적놈 속에 들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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