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를 바로봅시다』참선하는법 2

쪽빛마루 2011. 11. 8. 15:58

 

참선하는법

 

 

  우리 스님의 불법과 도덕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나를 위해 설파해 주지 않았음을 귀히 여긴다.


 


 


  화두의 생명이란 설명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또 설명될 수도 없


고 설명하면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다 죽어 버립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아무리 단청 이야기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


습니까. 듣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기가 눈을떠서


실제로 보게 해줘야 합니다.


  이처럼 조동종의 개조되는 동산스님은 화두란 설명하면 다 죽는


다고, 설명은 절대 안 한다고 평생 그렇게 말했는데, 후세에 그 종


파의 승려들이 떼를 지어서 수십 년을 연구하여 화두를 설명한 책


을 내놓았으니, 이것은 자기네 조동종이나 선종만 망치는 것이 아


니라 조동종 양개화상에 대해서도 반역입니다. 이렇게 되면 조동종


은 종명을 바꾸어야 될 것입니다. 반역종이라고


  일본에 이런 사람이 또 있습니다. 일본 불교학자로 세계적 권위


자인 중촌원이라는 학자가 있는데, 언젠가 해인사에도 왔더라고


전해만 들었습니다. 그의 저서로 [동양인의 사유방법]이라는


책이 있는데 유명한 책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었습니다. 그


책 속에 보면 선종의 화두인 '삼서근'에 대해 "무엇이 부처님이


냐고 물었는데 어째서 '삼서근'이라고 대답했느냐 하면, 자연현


상은 모든 것이 절대이어서 부처님도 절대이고 삼서근도 절대이다.


그래서 부처님을 물은 데 대해 삼서근이라 했다"라고 되어 있습니


다. 이렇게 딱 잘라서 단언을 해버렸습니다. 큰일 아닙니까. 혼자만


망하든지 말든지 하지 온 불교를 망치려고 하니


  그러나 그의 스승인 우정백수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이렇게 아주 선언을 해버렸습니다.


이것이 학자적인 양심입니다. 자기는 안 깨쳤으니까..자기는 문


자승이니까 선에 대해서 역사적 사실만 기록했지 선 법문


선리에 대해서는 절대로 말도 하지 않고 평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학자의 참 양심입니다. 그런데 중촌원은 화두에 대해 딱


단안을 내리고 있으니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식으


로 화두를 설명하려고 하면 불교는 영원히 망해 버리고 맘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화두의 하나인 '뜰 앞의 잣나무'에 대해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선종에서 유명한 책인 [벽암록]에 송을 붙인 운문종의 설두


스님이 공부하러 다닐때 어느 절에서 한 도반과 정전백수자


화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이야기하다가 문득


보니 심부름하는 행자가 빙긋이 웃고 있었습니다. 손님이 간


후에 불렀습니다.


  "이놈아 스님네들 법담하는데 왜 웃어?"


  " 허허 눈멀었습니다. 정전백수자는 그런 것이 아니니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흰토끼가 옛길에 몸을 눕히자


  눈 푸른 매가 언뜻 보고 토끼를 낚아 가네


  뒤쫒아 온 사냥개는 이를 모르고


  공연히 나무만 안고 빙빙 도는도다


 


  '뜰 앞의 잣나무'라 할 때 그 뜻은 비유하자면 '토끼'에 있지 '잣


나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 눈 뜬 매는 토끼를 잡아


가 버리고 멍텅구리 개는 '잣나무'라고 하니 나무만 안고 빙빙 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전백수자라 할 때 그 뜻은 비유하자면 토끼에 있는 것이니 나


무 밑에 가서 천년 만년 돌아봐야 그 뜻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조금 전에 말했듯이 '화두는 암호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생각나는 대로 이리저리 해석할 수 없는 것임을 능히 짐작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두에 대해 또 좋은 법문이 있습니다. 불감


근 선사의 법문입니다.


 


  오색비단 구름 위에 신선이 나타나서


  손에 든 빨간 부채로 얼굴을 가리었다


  누구나 빨리 신선의 얼굴을 볼 것이요


  신선의 손에 든 부채는 보지 말아라


 


  생각해 보십시오. 신선이 나타나기는 나타났는데 빨간 부채로 낯


을 가리었습니다. 신선을 보기는 봐야겠는데, 낯을 가리는 부채를


봤다고 해서 신선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화두에 있어서는 모든 법문이 다 이렇습니다. '정전백수자'니 삼


서근'이니 '조주무자'니 하는 것은 다 손에 든 부채입니다.


부채! 눈에 드러난 것은 부채일 뿐입니다. 부채 본 사람은 신선 본


사람이 아닙니다.  빨간 부채를 보고서 신선 보았다고 하면 그 말 믿


어서 되겠습니가?


  거듭 말하지만, 화두는 암호입니다. 이 암호 내용은 어떻게 해야


볼 수 있느냐 하면 잠이 깊이 들어서도 일여한 경지에서 깨쳐야만


풀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못 푼다는 것, 이 같은 근본 자세가


딱 서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눈을 확실히 뜨면 이것이 견성인


것입니다. 동시에 '뜰 앞의 잣나무'라는 뜻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옛날 스님들은 어떤 식으로 공부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임제종의 중흥조로서 오조법연, 원오극근, 대혜종고,


이렇게 세 분의 선사가 임제종을 크게 진흥시켜 천하에 널리 퍼


지게 하였습니다. 이 중에서 대혜스님이 공부한 것이 좋은 참고가


됩니다.


 


  대혜스님이 공부하다가 스무 살 남짓 됐을 때 깨쳤습니다. '한소


식'해 놓고 보니 석가보다 낫고 달마보다도 나아 천하에 자기가 제


일인 것 같았습니다. '어디 한번 나서 보자, 어디 누가 있는가' 하고


큰스님들을 찾아가 보니 모두 별것 아닙니다. 자기가 보기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자기가 제일이라고 쫓아다니는


판입니다. 당시 입제종 황룡파에 담당문준선사가 계셨습니다.


대혜스님이 그 분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병의 물을 쏟듯,


폭포수가 쏟아지듯 아는 체하는 말을 막 쏟아 부었습니다. 담당


스님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이렇게 물어왔습니다.


  "자네 좋은 것 얻었네. 그런데 그 좋은 보물 잠들어서도 있던가?"


  자신만만하여 횡행천하하여 석가보다도 달마보다도 낫다 하던


그 공부가 잠들어서는 없는 것입니다.


  "스님 다른 것은 전부 다 자신 있습니다. 그런데 잠들어서는 그


만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잠들어서는 아무것도 없으면서 석가, 달마가 아무것도 아니라


고? 그것은 병이야 병, 고쳐야 돼"


  이렇게 자기 병통을 꽉 찌르니 항복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


여 죽자고 공부하다가 나중에 담당스님이 병이 들어 열반하신 후에


는 그 유언을 따라 원오극근선사를 찾아갔습니다.


  찾아가서 무슨 말을 걸어 보려고 하니 마치 절벽을 만난 듯 자기


공부는 거미줄 정도도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원오스님이 자기의


공부를 조금이라도 인정하는 기색이면 그를 땅 속에 파묻어 버리리


라는 굳은 결심으로 찾아갔는데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하 내가 천하가 넓고 큰 사람 있는 줄 몰랐구나"


크게 참회하고 말했습니다.


  "스님 제가 공연히 병을 가지고 공부인 줄 잘못 알고 우쭐했습니


다. 문준선사의 법문을 듣고 공부를 하는데 아무리 해도 잠들면 공


부가 안 되니 어찌 해야 됩니까?"


  "이놈아 쓸데없는 망상하지 말고 공부 부지런히 해. 그 많은 망상


전체가 다 사라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공부에 가까이 가는 법이야"


  이렇게 꾸중듣고 다시 열심히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다 한번은


원오스님 법문 도중에 확철히 깨달았습니다. 기록을 보면 '신오'라


하였습니다. 신비롭게 깨쳤다는 말입니다. 그때 보니 오매일여입


니다. 비로소 꿈에도 경계가 일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원오스님에게 갔습니다. 원오스님은 말조차 들어보지


않고 쫓아냅니다. 말을 하려고 하면 "아니야 아니야" 말을 하기도


전에 아니라고만 계속합니다. 그러다가 화두를 묻습니다. '유구와


무구가 등칡이 나무를 의지함과 같다'라는 화두를 묻는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할 때는 환하게 알 것 같아 대답을 했습니다.


  "이놈아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그것 아니야, 공부 더 부지런히 해!"


  대혜스님이 그 말을 믿고 생명을 다 바쳐 더욱 부지런히 공부했


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참으로 확철히 깨쳤습니다. 이렇듯 대혜스님


은 원오스님에게 와서야 잠들어도 공부가 되는 데까지 성취했습니


다 그리고 거기에서 확철히 깨쳤습니다.


  잠이 깊이 들어서도 일여한 경계를 두고 원오스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애석하다, 죽어버려서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겠구나"


  일체 망상이 다 끊어지고 잠이 들어서도 공부가 여여한 그때는


완전히 죽은 때입니다. 죽기는 죽었는데 거기서 살아나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살아나느냐? "화두를 참구 안 하는 이것이 큰


병이다"라 했습니다. 공부란 것이 잠이 깊이 들어서 일여한 거기


에서도 모르는 것이고, 견성이 아니고 눈을 바로 뜬 것이 아닙


니다. 거기에서 참으로 크게 살아나야만 그것이 바로 깨친 것이고


화두를 바로 안 것이며, 동시에 마음의 눈을 바로 뜬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중국의 스님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나라 선문 중에


태고스님이 계십니다.


 


  태고스님은 공부를 시작한지 20여 년만인 40여 세에 오매일여가


되고 그 후 확철히 깨쳤습니다. 깨치고 보니 당시 고려의 큰스님네


들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인가해 줄 스님도


없고, 자기 공부를 알 스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으로 갔습니


다. 그리고 그곳에서 임제정맥을 바로 이어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태고스님 같은 분, 이 동쪽 변방에 나신 스님이지만 그 분은 깨치


고 바로 알고, 바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스님은 항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점점 오매일여한 때에 이르렀어도


  다만 화두하는 마음을 여의지 않음이 중요하다.


 


  이 한마디에 스님의 공부가 들어 있습니다. 공부를 하여 오매일


여한 경계, 잠이 아무리 들어도 일여하며 8지 이상 보살 경계, 거기


에서도 화두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몽중일


여도 안된 거기에서 화두 다 알았다고 하고 내 말 한번 들어보라,


하는데 이것이 가장 큰 병입니다.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귀하고 좋은 약을 가지고 와서 "이 약만


먹으면 산다" 하며 아무리 먹으라고 해도 안 먹고 죽는 것은 어떻


게 합니까. 먹여서 살려 낼 재주 없습니다. 배가 고파 다 죽어가는


사람보고 만반진수를 차려 와서 "이것만 잡수시면 삽니다"해도


안 먹고 죽으니 부처님도 어떻게 해볼 재주가 없습니다. 아난이


30여 년을 부처님 모셨지만 아난이 자기 공부 안 하는 것은 부처


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오늘 법문을 요약하면 불교란 것은 팔만대장경이 그토록 많지만


'마음 심'자 한 자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만법을 다 알 수 있고, 삼세제불을 다 볼 수 있고, 일체법


을 다 성취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 바로 자성을 보


는 것이고 견성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든지 노력해서


마음의 눈을 바로 떠야 되는데 가장 빠른 길이 화두입니다.


  이 화두란 것은 잠이 깊이 들어서 일여한 경계에서도 모르는 것


이고 거기에서 크게 깨쳐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다가 무슨 경


계가 나서 크게 깨친 것 같아도 실제 동정에 일여하지 못하고, 몽중


에 일여하지 못하고, 숙면에 일여하지 못하면 화두를 바로 안 것도


아니고, 견성도 아니고, 마음의 눈을 뜬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그 근본 표준이 어디 있느냐 하면  "잠들어서도 일여하느


냐, 않느냐"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부지런히 화두를 하여 잠이


푹 들어서도 크게 살아나고 크게 깨쳐서 화두를 바로 아는 사람, 마


음 눈을 바로 뜬 사람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야기를 가만히 생각해서 하나라도 좋고 반쪽이라도 좋으


니, 실지로 마음의 눈을 바로 뜬 사람이 생겨서 부처님 혜명을 바로


있도록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