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佛) . 법(法) . 승(僧) (1982년 5월 15일, 방장 대중법어)
마음 청정이 부처요 마음 광명이 불법이요
청정하고 광명하여 거리낌없는 것이 스님이다.
이것은 임제스님 법문인데, 실제로 심청정이 되고, 심광명이 되고
정광무애가 되어야 바로 깨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청정하다', '깨끗하다', 하면 어느 정도로 깨끗한 것인가?
구름 한 점 없는 허공, 그 허공이 참 깨끗합니다만 그것은 마음이
깨끗하다고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래서 허공이 깨끗하다는 그것도 또 한 방망이 맞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음 깨끗한 것에 비하면 허공도 깨끗한 것이 못 된다
는 말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것을 명경에 비유합니다. 먼지 한 점 없는 그 명경
이 얼마나 깨끗하겠습니까. 그러나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명경이
깨끗하다는 그런 유가 아닙니다. 어떤 스님이 말했습니다.
명경을 부수고 오라 너와 서로 보리라
그렇다면 불교에서 수행해 가는 차제로 보아서는 어느 정도가
되어야 참으로 깨끗한 마음, 청정한 마음인가?
구경각을 성취하기 전에는 십지등각도 심청정이 아닙니다. 왜
냐하면 십지등각은 아주 거친 망상은 떨어졌지만 자신도 모르게
제8아뢰야의 미세한 망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의식세계인 제8아뢰야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떨어져야만 이것이 참다운 청정입니다. 그러면 허공보다 더 깨끗하
고 거울보다 더 깨끗합니다. 이 자리는 일체 망상이 다 떨어진 무심
경계로 진여자성이나, 성불, 견성이니 하는데, 이것은 말로써가 아
니고 실제 경험에서 그 경지를 체득해야 합니다.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고 무심경계가 나타나면 목석과 같은 무심
인가, 아닙니다. 거기에서, 그 깨끗한 마음에서 큰 광명이 나타납
니다. 이 광명을 예전 스님들은 천일병조라고 말했습니다. 천일병
조 해가 하나만 떠도 온 세계가 이렇게 환히 밝은데 하나, 둘, 셋도
아니고 천 개의 해가 일시에 두루 비추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
도 오히려 유한입니다. '천'이라는 숫자가 있으니까.
마음이 청정한 여기에 생기는 광명은 천 개의 해가 한꺼번에 비
추인다 해도 오히려 적당하지 않은 광명이니 불가설, 말로써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방제불이 일시에 출현하여 하루 이틀도 아니고 미래겁이 다하
도록 이 광명을 설명하려 해도 다하지 못하는 참다운 광명이다. 이
말입니다. 이제 심광명이라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광무애, 즉 청정과 광명이 서로서로 거리낌이 없다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이 있으면 빛이 있고 빛이 있으
면 불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청정은 불에다 비유할 수 있고 광명
은 빛에다 비유할 수 있어서 불이 즉 빛이고 빛이 즉 불입니다.
빛 여읜 불이 따로 없고 불 여읜 빛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니 둘이
될 수 없는 이것을 무애라 합니다.
육조스님도 정과 해를 말할 때 불과 빛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습
니다. 근본 요점은 어디 있느냐 하면 심청정, 심광명을 성취하여
참으로 허공보다 더 깨끗하고 명경보다 더 깨끗한 무심경계만 증
득하면 자연히 거기서 천 개의 해가 일시에 비추는, 비유할 수 없
는 그런 대지혜 광명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광무애라
합니다. 빛 따로 있고 불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빛이 즉 불이고 불
이 즉 빛이다, 이런 말입니다.
이리하여 '청정'은 부처님이라 하고, '광명'은 법이라 하고, '무애'
는 스님이라 하여 불법승 삼보가 되는데 세 가지가 각각 다른 것
이 아닙니다. 불이라 말할 때는 부처님을 표현하고, 빛이라 말할
때는 불법을 표현하고 불이 즉 빛이고 빛이 즉 불이다 말할 때는
스님을 표현하는 것이니, 표현은 각각 달라도 내용은 똑같습니다.
불이 빛이고 빛이 불이지 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불법승 삼보
즉 청정, 광명, 무애가 하나인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셋이 즉 하나이고, 하나가 즉 셋이다"고
합니다.
이 근본법을 바로 깨쳐서 실제로 증득할 것 같으면 그때에야 비
로서 불법을 아는 동시에 모든 속박을 다 벗어나서 자유자재한 대
해탈을 성취한 때입니다.
그러면 모든 속박은 왜 생기느냐? 번뇌망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의 눈을 가리고 있으면 우리가 자유롭게 다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번뇌망상이 다 떨어
지고 무심을 증득하여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 경지를 성취할 것
같으면 모든 속박을 다 벗어나게 되는데, 이것을 진정한 자유라고
합니다.
눈감은 봉사에게 무슨 자유가 있습니까? 이리 가도 엎어지고 저
리 가도 엎어지고 조금도 자유가 없지만 자기가 눈을 뜨면 온 천지
를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런 의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왜 우리를 봉사라 하는가? 크게는 산도 보고 작게는 먼지도 다
보는데 어째서 우리를 두고 눈감았다고 하는가?
한 가지 비유를 말하자면 우리가 깨쳤다는 것은 꿈을 깨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꿈을 꾸고 있을 때는 그 꿈속에서는 모든 활동
이 자유자재하고 아무 거리낌이 없는 것 같지만 그것이 꿈인 줄 모
릅니다. 일단 꿈을 턱 깨고 나면 "아하! 내가 참으로 꿈속에서 헤매
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중생들이 세상을 살면서 그것이 꿈인 줄을
모릅니다. 꿈속에 사는 줄을 모릅니다. 실제 그 꿈을 깨고 나야, 그
제서야 비로소 여태까지 꿈속에서 살았구나 하는 것을 참으로 알
수 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사람이 아니면 꿈을 모르는 것과 같이, 깨쳤다는
것은 실지 마음의 눈을 떠서 깨어나기 전에는 이해하기가 참으로
곤란합니다. 예전 장자도 "크게 깨고 나서야 큰 꿈을 알 수 있다"
고 하였습니다.
중생이 번뇌망상의 유심속에 사는 동안은 전체가 꿈입니다.
그래서 십지등각도 꿈속에 사는 줄 알아야 됩니다. 오직 제8아뢰
야 근본무명이 완전히 끊어져서 구경각을 성취해야만 그때에야 꿈
을 바로 깨친 사람, 즉 부처입니다.
성불하기 전에는 꿈을 바로 깬 사람이 아니고 동시에 자유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중생의 자유라 하는 것은 꿈속 자유이고 깨친 사
람의 자유라 하는 것은 꿈을 깬 뒤의 자유이니, 꿈속에서의 자유를
어떻게 '자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꿈과 생시가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말한 깨쳤다는 것을 대강은 짐작할 것입니다. 깨쳤다
는 내용이, 성불했다는 내용이 무심에 있는데 무심을 증하면 거기
에서 대지혜 광명이 생기고 대자유가 생깁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꿈을 깬 사람, 마음의 눈을 뜬 사람이 되어 대자유자재한 활동을 하
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부처도 필요 없고, 조사도 필요 없고, 팔만대장경도
다 필요 없습니다. 부처다, 조사다 하는 것은 다 중생이 꿈을 깨우
기 위한 약에 지나지 않습니다. 약! 중생의 근본병인 꿈을 완전히
깨우고 나면 약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병이 있을 때 약이 필
요하지 병이 다 낫고 나면 약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꿈을 완전히 깨워서 참다운 해탈을 성취하면 그때 가서는
부처도 필요 없고 조사도 필요 없는 참다운 대자유입니다.
장부가 스스로 하늘 찌르는 기운 있거니
부처가 간 길은 가지 않는도다
내길, 내가 갈 길이 분명히 다 있는데 무엇 한다고 부처니 조사
니 하여 딴 사람이 가는 길을 따라가느냐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불
교의 참다운 대자유자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종교 일반에 대해 조금 이야기하겠습니다.
종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개 초월신을 주장합니다. 이현상
계를 떠난 저 천상에 있는 초월신을 주장하면서, 모든 것을 그 초
월신에 맡기고 그 밑에 무조건 절대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
이든지 그 초월신의 뜻대로 되게 해주시오, 이런 식입니다. 이리
하여 죽고 나면 그 초월신이 사는 곳에 가서 같이 산다는 것입니다.
초월신을 섬기면서.
그러나 자기 자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일거일동이 초월신의 지배
하에서 초월신의 뜻대로 살 뿐입니다. 이렇게 되면 영원히 초월신
의 속박을 받는 것이니, 그런 사상은 노예도 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습니까. 초월신은 주인이 되고 모든 사람은 종같이 되어 그
지배를 받아야 되니 자기 자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기침도 한번 크
게 못 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의 주장은 다릅니다. 본시 인간이란 불성이 다
있어서 자성이 청정하고 깨끗하여 거기에는 부처님도 설 수 없고
조사도 설 수 없습니다. '심청정'하여 깨끗하다고 한 거기에서는
부처도 때이고, 조사도 때입니다. 팔만대장경은 더 말 할 것도 없
는 것이고!
그토록 깨끗한 곳, 일체 망상이 다 떨어진 곳에서는 부처의 지배
도 받지 않고 조사의 지배도 받지 않고, 어떤 지배도 받지 않는 대
자유 대해탈 경계입니다. 어떤 속박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외
부의 상대적인 무슨 지배를 받고 무슨 속박을 받고 하겠습니까. 그
런 것은 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대 금기입니다. 이것이 대해탈인
동시에 성불이며 열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도 자유에 대해 많이들 말합니다. 인간은 자유이며
평등이라고 그러나 참다운 자유는 심청정을 실제로 증하고 심광명
을 증해서 청정과 광명이 거리낌없이 무애한 그 속에서 놀아야만
전에는 이리 얽히고 저리 얽히고 무조건 복종하고, 이렇게 되면 자
유가 어디 있습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해탈되어 있습니다. 해탈되어 있는데 번뇌망
상 때문에 여러 가지 구속이 생겨났습니다. 번뇌망상만 완전히 끊
어 버리고 무심을 증하여 본래의 대자유를 회복할 것 같으면, 그러
면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입니다. 내가 가장 높다 그 말입니다. '나'
라는 것도 설 수 없는 것인데, 부처님께서 말로 표현하자니 천상천
하 유아독존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다운 자유를 얻으려면 심청정, 심광명, 정광무
애를 성취한 대해탈 경계를 성취하면 천상천하에 무애자재합니다.
그런 자유자재한 생활을 하는 것이 불교의 근본목표입니다.
이렇게 되면 [기신론]에서 말하듯이 모든 고통을 벗어나서 구경
락을 얻습니다.
설사 초월신을 숭배하여 그 세계에 가서 난다고 해도 거기에서도
신에게 완전히 복종해야 하는 그런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일
체고가 안 됩니다. '이일체고'라 하는 것은 부처님의 속박도 받지 않
고 어떠한 속박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참다운 대자
유입니다. 이런 대자유는 우리 불교 이외에는 없다고 나는 단정합
니다.
불교에서 해탈이다. 자유다 하는 것에는 어느 종교 어느 사상에
서도 따라올 수 없는 큰 자유자재가 있음을 알야야 됩니다. 내 물건
이지만 이것이 진금인가 잡철인가, 그것도 구별 못해서 되겠습니까
실제 진금을 잡철로 착각해서는 큰일납니다.
이 대자유를 성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불교부터 버려야
합니다. 자꾸 부처님 믿고 조사를 의지하고 하면 결국은 거기에 구
애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 법을 성취하려면 자기 마음이 본시 부
처라는 것, 이것 이외에는 전부 다 안 믿어야 됩니다. "마음이 부처다"
이것만이 바른 믿음이고, 이것 이외에 딴 것을 무엇이든 믿으면 그
것은 삿된 믿음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만 믿고 팔만대장경도 버리
라고 항상 말합니다.
고불고조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이 법을 성취하려면
부처와 조사를 원수와 같이 보라
부처와 조사를 원수와 같이 보라니!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
가? 자기 마음만 믿어야 합니다.
자기 마음이 부처이고 자기 마음이 조사입니다. 자기 마음이 극
락이며 자기 마음이 천당입니다. 자기 마음을 놓고는 아무것도 없
습니다. 부처와 조사는 꿈속에서 하는 소리입니다. 부처와 조사를
원수같이 보라고 하면 말 다한 것 아닙니까
예수교를 공부하는 어떤 사람이 벽에 부닥쳤습니다. 더 나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참선을 해보겠다고 나를 찾
아왔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근본문제를 해결하려면 참선을 해야 되는데, 당신이 참선을 하
려면 근본조건이 있어"
"무슨 조건입니까?"
"스님네도 참선을 하려면 불교부터 버려야 되는데, 당신이 예수
교를 버리지 않으면 이 공부는 못 해. 예수교라는 속박에서부터 벗
어나야 돼!"
"스님, 가서 생각해 보고 오겠습니다"
" 허허, 생각해 보고 온다는 말은 안 온다는 말 아냐? 예수교 못
버리면 아예 오지 말아, 그래서는 백 년 해봤자 참선이 안 돼"
내가 처음에 '심청정'이라 한 것은 부처와 조사도 설 수 없는 그
런 청정을 말한 것입니다. 팔만대장경도 여기 와서는 때란 말입
니다. 그러니 우리 대중들도 이것을 깊이 믿고 오직 자기가 본시
부처라는 것, 자기 마음 이외에 불법이 없고 자기 마음 이외에 부
처가 따로 없다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믿고 오직 화두를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로만 깨치면 그 속에서 대자유자재한
부사의 해탈경계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요점은 어디 있느냐? 밥 이야기 아무리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실
제로 밥을 먹느냐 안 먹느냐, 이것입니다. 공부 부지런히 해서, 화두
부지런히 해서 내 말이 헛된 말이 안되고 실제로 이것을 성취한
사람이 하나라도 생기도록 노력해야 안 되겠느냐,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은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자기만을 믿으라'고
한다고 "옳지, 술 생각이 나는데 한번 가볼까?" 이렇게 했다가는 큰
일납니다. 그것은 자기가 아닙니다. 망상이고 도둑놈이란 말입니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자기'란 것은 '깨끗한 자기'를 말함이지 '거
짓의 자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성인인 공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70살이 되니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동으로 가고 싶으면
동으로 가고, 서로 가고 싶으면 서쪽으로 가고, 앉고 싶으면 앉고,
무슨 짓을 해도 법도에서어긋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나쁜 짓 안
한다는 말입니다.
심청정, 허공보다 더 깨끗한 이 마음을 실제로 알고 보면, 직접
자기가 증득해 놓고 보면 이리 가도 대해탈 경계, 저리 가도 대해탈
경계, 부처님 행동 그대로입니다. 저 시방세계를 다 찾아봐도 술 먹
고 싶어 날뛰는 그런 사람은 그 깨끗한 거울 속에는 없습니다. 이것
을 알아야 됩니다.
태평양 한복판, 물이 깊고 깊어서 태풍이 불어 아무리 바닷물이
움직이고 움직여도 깨끗한 물 그대로입니다. 그렇지만 얕은 구정물
을 보고서 "물은 꼭 같지?" 이렇게 나오면 그때는 깨끗한 물은 평생
못 보고 마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참으로 허공보다 더 깨끗한 마음, 그것을 말했
습니다. 그것은 일체의 선과 악이 다 떨어진 곳이고 부처와 조사도
설 수 없는 곳입니다. 청정한 자기를 바로 믿고, 청정한 자기를 바
로 깨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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