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를 바로봅시다』사람이면 '사람'을 찾아야지 1

쪽빛마루 2011. 11. 9. 12:35

사람이면 '사람'을 찾아야지 1

  (1984년 3월 17일 조선일보, 법정스님, 안병훈 편집부국장 

   안전길 문화부장, 서희건 기자와의 대담)

 

 

★ 지난 겨울은 몹시 추었습니다. 그동안 스님께서는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나는 본시 산중에 사는 사람이라 늘 대하는 것은 푸른 산, 흰구

 

름입니다. 푸른 산이 영원토록 변하지 않고 흰구름이 자유로이 오

 

고 가는 것을 보며 사는데, 거기에서 모든 것의 실체를 볼 수 있습

 

니다. 또 무궁무진한 변화도 보면서 살고 있지요."

 

 

 

★ 연세도 많으신데, 건강은 어떠신지요?

 

 

"건강, 국민학교 3학년이지요. 내가 아마 3학년 학생은 될겁니다."

 

 

★ 재작년에는 낙상도 하셨고, 최근에는 신경통으로 불편하시다고 들었습니다.

 

 

"낙상한 팔은 다 나았는데, 요샌 신경통 때문에 다리가 아파가지

 

고 마음대로 안되는군요. 보행은 크게 관계가 없는데, 험한 길이나

 

먼 길은 못 가지요."

 

 

 

★ 스님의 섭생 방법이 독특하다고 들었습니다. 건강을 어떻게 유지하십니까?

 

 

"건강 유지라, 그렇게 말하면 곤란하지요. 살만큼만 먹고사니까

 

아주 조금 먹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3분의 1 정도 될까. 의사들도

 

놀랍니다. 밥 적게 먹고 매운 것 안 먹고 무염식으로 수십 년 살았

 

습니다. 어떻게 견디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지만, 괜찮습니다."

 

 

 

★ 키도 크시고 몸도 크신데, 그렇게 적게 잡수시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무염

 

식을 하시게 된 동기가 따로 있습니까?

 

 

"뭐, 동기가 따로 있나요. 몸에 좋으라고 골라 먹는 게 아니니까

 

요. 그리고 나는 맵고 짠 것을 먹는 성질이 아닙니다. 좋은 음식은

 

잘 안 먹고, 먹기도 싫어요. 젊었을 때부터 생식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음식에 매달리는 걸 보면 우스워요 대개

 

가 음식을 보면 정신을 못차리거던, 몸 유지될 만큼만 먹으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조금만 먹습니다. 조미료는 절대

 

안 넣고요."

 

(종정스님의 식사 상에는 솔잎 가루와 콩, 무 등 두, 세 접시의 반찬만이

 

오른다고 한다. 밥도 그릇의 3분의 1 정도만 올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두루마기는 얼마나 입으신 건가요? 아주 많이 해어졌는데 말입니다.

 

 

"이 누더기, 오래 되었지요. 한 삼십 년 될까? 많이 떨어져서 앞자

 

락을 좀 고쳐달라고 했더니 새걸 대가지고 옷을 버려버렸어요.(웃음)

 

조금 있으면 또 떨어지겠지요"

 

(함께 자리한 법정스님이 "새 시대의 옷이 됐습니다." 하니 좌중에 웃음꽃

 

이 피었다 기운 곳이 백여 곳도 넘을 진자 누더기를 소중하게 대하는 종정

 

스님의 태도가 퍽 이상적이었다.)

 

 

 

★ 종정이 되신 지 3년이 되셨지요. 요 몇 해 동안 한국 불교계는 불행히도

 

줄곧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지난해 종헌 개정으로 스님께서는 한국 불교

 

교단의 상징적인 존재에서 실질적인 종단의 대표자가 되셨습니다. 그동안 종

 

단을 위해 많은 심려가 계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산중에만 계셔서 그 역할

 

이 어렵지 않겠습니까?

 

 

"상징이니 대표니 하지만 그런 말이 나한테는 실제로 관계가 없

 

습니다. 종정 역할이 어떤 건지도 몰라요. 다만 '안 한다'는 소리만

 

하지 말라고 해서, 안 그러면 종단이 큰일난다고 합디다. 그래서

 

'한다'소리도 안 했지만 '안 한다' 소리도 안 했어요."

 

 

 

★ 국정자문위원으로 임명받으시고도 안 나가신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그렇지요. 청와대에서 사람이 와서는 국정자문위원회를

 

만드는데 신임종정이 들어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 거 뭐하는

 

거요'하고 물으니 뭐라고 이야기를 합디다. 나는 그런 재주도 없고

 

생각도 없어서 못하겠다고 했지요. 그거야 세속 사람들이 할 일이

 

지요. 그네들 갈 길이 따로 있듯이 난 또 내 갈 길이 따로 있는 거고"

 

 

 

★ 돌아가신 청담스님하고 친하셨다고 하던데요, 청담스님은 가끔 만나

 

기도 했습니다만,

 

 

"그건 사람마다 개성이 달라서지요. 사람 만나기 좋아하는 사람

 

도 있지요. 청담하고 가까운 편이었습니다. 친하긴 했지만 성격은

 

정반대였지요. 정혜사에 만공스님 계실 때니 내가 서른 살 때쯤

 

만났습니다. 그이는 나보다 열 살 위였지요. 정혜사에 있는데 청

 

담스님이 오시더군요. 이야기를 해보니 통해요, 나보다 나이가 더

 

많았지만 좋아하더군요."

 

(청담스님이 성철스님을 무척 아끼고 좋아했다고 법정스님이 일러줬다. 사

 

진 기자가 실례지만 좌중의 자리를 좀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찍었잖아. 그래, 조선일보 돈 많으면 많이 찍어가."

 

(좌중에 또 웃음이 터졌다.)

 

 

★ 스님을 만나려면 부처님께 3천 배를 먼저 해야한다고 해서 화제가 되고 있

 

습니다. 스님을 만나뵙기 어렵다는 이야기로 이해되기도 하고, 스님이 오만하

 

기 때문이 아니냐는 오해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래, 당신들은 3천 배 하셨소? (웃음) 왜 3천 배를 시키는가, 이

 

말이지요? 중이 신도를 대하는데 사람은 안보고 돈과 지위만 본다

 

말입니다. 그래서 난 백련암에 들어올 때는 돈보따리와 계급장은

 

소용없으니 문밖에 걸어 놓고 알몸만 들어오라고 합니다. 사람만

 

들어오라 이 말입니다.

 

들어오면 '내가 뭐 잘났다고 당신들을 먼저 만날 수 있겠는가.' 합

 

니다. 부처님 찾아왔다면 부처님부터 뵈라는 말이지요, 부처님을 정

 

말로 뵈려면 절을 3천 번은 해야지요. 부처님한테는 신심이 제일입

 

니다. 부처님을 알 때까지 절하는 정신이 중요한 것지요. 그래야 부

 

처님께서 '너 왔구나'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이면 나도 옆에

 

서 좀 도와주지요. 중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입니다. 그러니 부처님

 

을 믿어야지요."

 

 

 

★ 그런데 어떻게 해서 스님이 되셨습니까?

 

 

"지리산에 대원사가 있었지요. 집에서 가까웠거든, 거기 가서 한

 

동안 있었습니다. 그러데 살생을 금하는 게 불교의 근본인데 경찰

 

서장이 온다니까 중들이 법석을 떨며 큰 돼지를 잡고 술을 몇 통씩

 

메고 개천에 나가고 난리더군요. (일제 때인 당시 대원사에는 대처승들

 

이 살았다고 한다.)

 

젊었을 때 사상적으로 이리저리 헤매다가 불경을 보니까 불교가

 

가장 마음에 들더군요. 그래서 참선 좀 하려고 찾아갔던 절인데 그

 

모양입니다. 그러니 부처님 믿고 불교는 믿어도 중은 안되겠다고

 

결심했지요. 당시에 대원사 탑전이 참 좋았습니다. 그래, 그곳에 들

 

어가서 좀 있자니 누가 펄쩍 뜁디다. 본시 탑전이란게 스님만 있는

 

곳이지 속인은 들어가지 못한다면서

 

그래서 한판 했지요. '너희들은 계집 다 있고, 소 잡아먹고, 술장

 

사 떡장사 다 하고 그러고도 중이냐,' 된다, 안된다 한참 실랑이를

 

하는 도중에 주지가 바뀌고 젊은 중이 주지 대리인가를 맡았는데

 

그와는 말이 통했어요. 그래서 그 탑전에 있으면서 한겨울을 보냈

 

는데, 중들이 보기에 이상했던 모양입니다. 보기도 싫고 그래서 해

 

인사에 공문을 보냈다나 봐요(대원사의 본사가 해인사였다고 법정스

 

님이 알려주셨다.) 이상한 청년이 와서 있는데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

 

겠느냐고 물어본 게지요.

 

그때 해인사에는 백용성스님, 송만공스님이 계셨어요. 유명한

 

도인들이었지요. 그분들이 나를 데려오라고 했다는군요. 그래,

 

최범술이라는 스님이 대원사로 와서는 해인사가 절도 크고 좋은

 

곳이니 가자고 합디다, 나는 이곳도 조용한데 해인사는 왜 가느냐

 

고 반대했지요. 꼭 오라고 하면서 그이는 떠나고, 얼마쯤 있다 생

 

각해보니 큰절도 괜찮겠다 싶어서 여기 해인사로 왔는데 그 범술

 

스님은 없고 이고경이란 스님이 주지를 하고 있더군요. 찾아가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습니다. 나는 중은 싫어하는데 부처님을 좋

 

아해 공부를 좀 하려고 그런다고 이리저리 말을 해보니까 통하더

 

군요. 유명한 스님이었습니다. 화엄학도 연구하고

 

그 이튿날 다시 나는 공부하러 왔다고 했더니 원주스님을 부릅디

 

다. 그런데 그 원주가 안된다는 거야, 속인을 선방에서 받은 일이

 

없다는 거지요. 주지가 이 청년은 다른 사람과 다르다면서 야단치

 

더군요. 주지가 받으라면 받지 무슨 말이 많으냐면서, 그러니까. 모

 

르겠다며 고개를 흔들면서 나를 선방으로 데려가더군요

 

(속인이 선방에 들어간 것은 전무후무한 예외라고 법정스님이 설명했다.)

 

그래, 내가 처음이고 마지막일거야, 당시 해인사에 김법린이라고

 

전에 문교부장관 하던 이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나를 볼 때 마다

 

책을 내놔요. 그리고 자꾸 책을 바꿔 주면서 교학을 함께 공부했

 

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참선하지 말고, 그래서 내가 '우리 집이 부

 

자는 아니지만 책 살 돈은 있소이다.'하고 거절했지요"

 

 

 

★ 그때 연세가 몇이셨지요?

 

 

"스물 다섯."